태평양을 막는 제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7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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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을 조금 넘긴, 당시 기준으로 보면 중년의 과부. 프랑스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가난했으나 공부를 잘 해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상급과정 학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도 부모가 반대하지 않았다. 졸업 후 2년 동안 북부 프랑스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899년의 한 일요일, 면사무소 유리창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만다.

 

  “식민지 군대에 지원합시다.”
  “젊은이들이여, 식민지로 오십시오. 기회가 기다립니다.”

 

  포스터에는 로브그리예의 <질투>에서나 볼 수 있을 번성하는 바나나 농장에서 나무 그늘 아래 백인 부부가 편한 모습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있고, 사진을 찍을 때 미소를 지으라고 명령을 받은 것이 분명한 원주민들이 즐거운 얼굴색을 하고 분주하게 작업을 하고 있다. 식민지 행에 관심이 생긴 선생 앞에 역시 초등학교 교사이며 이국취향에 흠뻑 빠져 프랑스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남자가 나타나자 즉각 결혼했다. 당시엔 십대 후반, 늦어도 이십대 초반이 결혼 적령기이기도 했으니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부부는 식민지 교사직에 지원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넓은 영토에 교사로 임용된다.
  식민지, 식민(植民)이 무슨 뜻인가. 심을 식, 백성 민. 이것만큼 노골적인 말도 없다. 대항해 시대 이후에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신대륙의 넘쳐나는 재화를 효과적으로 가져오는 것과 과밀한 자국 내 빈곤층을 효율적으로 구제하는 일을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하여 힘 센 나라의 백성(民)을 신대륙에 심는(植)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절대로 자기네 백성이 아닌 식민지 원주민들은 간신히 굶어죽지 않을 노예상태로 삶을 유지시켜주고, 그들이 생산하는 모든 물자, 땅에 묻혀있는 모든 자원을 모국으로 이전하는 행위가 식민통치다. 이 젊은 부부 역시 면사무소의 유리창에서 식민지로 오라는 포스터를 보고, 식민지로 가기만 하면 많은 원주민을 노예나 노예 비슷한 상태로 지배하면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어쨌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한 부분인 코친차이나로 갔다. 정착한지 2년 만에 아들 조제프와 딸 쉬잔을 낳았다. 아내는 쉬잔이 생기자 교사직을 포기하고 프랑스어 개인교습을 하면서 육아에 전념한다. 때마침 젊은 아빠가 원주민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해 몇 년간 엄마의 기억 속에서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가장 좋았던 행복의 시기를 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불행이 가족을 덮치기 시작한다. 불행은 너무 이른 시기에 아빠를 잃은 것부터 시작한다.
  가장의 무책임한 죽음. 자연사라도 처자식을 남긴 죽음은 너무 무거운 죄다.
  멀고도 먼 타국에서 아이 둘이 달린 과부가 된 어머니는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하고 있던 프랑스어 개인교습에 이어 피아노 교습까지 시작했고, 이것도 모자라 당시 무성영화를 상영하며 사이사이에 피아노 연주를 하는 에덴 시네마에 피아니스트로 취직을 했다.
  어머니는 울었다. 꼬맹이들 교습은 어떻게라도 시키겠는데 대중을 상대로 연주를 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서. 다행히 극장주가 괜찮은 사람이라 시간을 충분히 주고, 게다가 거의 비슷한 곡만 연주하면 됐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무난히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불안한 어머니는 극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아이들만 집에 둘 수 없다는 건 핑계였고, 이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피아노 노동을 하고 있으니 잘 봐달라는 뜻이었다. 관객은 호의적이었다. 원수 같은 남편. 원수 같은 남편. 원수 같은 남편.
  이렇게 십 년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아 식민지 토지국에 토지 불하신청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었다. 신청을 하고 또 2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람 평야, 수도 사이공에서 8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 매년 7월이면 남중국해, 라는 촌스런 이름보다는 태평양이라고 부르고 싶은 바다에서 바닷물이 범람해 평야에 심은 모든 작물을 쓸어버리는 불모지 백 헥타르와, 백 헥타르의 불모지를 마치 옥토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달려 있는 듯한 5 헥타르의 평지로 이루어진 땅.
  태평양은 7월이 되자 어머니가 심은 논에도 공평하게 범람해 농사를 완전히 망쳐놓았다. 이때 어머니는 희망을 본다. 방조제를 지으면 된다는 것. 마침 통나무도 도로공사를 마치고 그때 쓰던 것이 그대로 있으니 완전히 헐값에 구할 수 있고, 방조제가 완성되면 무려 5백 헥타르의 평야를 얻는다는 계산으로 지역 원주민 수백 명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5헥타르의 좋은 땅 위에 지은 방갈로와 기타 등등을 담보로 제공하고 돈을 빌려 기꺼이 엔지니어의 검토 없이 일을 벌이고, 수개월 동안 제방을 쌓아간다. 그러다 다시 7월. 태평양 바닷물이 범람할 시기가 오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단 하룻밤 만에 태평양은 제방을 모두 쓸어 가버렸다. 이제 원주민도 다 떠나고, 조제프와 쉬잔도 아무 의욕 없이 절망과 권태와 의욕상실에 지쳐갈 때, 어머니는 제방 건설의 꿈을 결코 놓지 않는다. 조금씩 정신이 빠지기 시작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어떻게 해서든지 작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은 본능일 수도 있다.

 

  없는 살림에 2백 프랑으로 말과 마차와 마구를 샀으나 말이 너무 늙었다. 마차가 있으면 조제프가 람에서 운송업으로 약간의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말이 사람 나이로 치면 백 살은 넘어버려 풀조차 먹으려 하지 않았다. 낡은 시트로앵 B.12로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 달려야 하는 람까지 그런 말을 끌고 갔다 왔고, 말은 벼의 모종 위에 주둥이를 박고 있어도 너무 지쳐 뜯어먹지 못했다. 그러다가 죽었다. 불행은 계속 오는 것이니까.
  양철통 수준의 시트로앵 B.12를 타고 람의 군 회관에 도착하자 먼지 하나 없이 세차가 된 5만 프랑짜리 레옹 볼레가 서 있고, 회관 안에는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인장반지를 낀 조 씨 성의 화교가 앉았는데, 참 못 생긴 얼굴에다가 어깨도 좁고 팔도 짧고, 키도 중국인 평균이 안 되는 것 같은 인간이 최고의 여름 비단인 작잠견 옷을 입었다. 레옹 볼레의 주인. 고무농장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부동산을 사고 판 차익으로 거금을 모은 화교 부동산 투기꾼 백만장자의 아들이다.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재주도 없고, 파리에 유학을 했지만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 다시 인도차이나에 와 아버지 사업을 거드는 무능한 한량이다. 있는 건 돈밖에 없다. 이 조의 눈에 열일곱 살짜리 쉬잔이 들어온 것.
  어머니는 조를 통해 자기 희망을 이룰 기회를 엿본다. 쉬잔으로 하여금 조의 애가 타게 만들라고 하고, 조에게는 쉬잔과 자고 싶으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쉬잔은 결코 조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도 어머니의 뜻을 좇아 조에게 샤워하는 자신의 알몸을 보여주고 비싼 축음기를 선물 받는다. 조의 어머니 것이라고 하는 2만 프랑짜리 다이아몬드도 받는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큰 그림이 그려진 상태. 2만 프랑으로 은행 빚을 갚고, 다시 5만 프랑쯤 대출을 얻어 마지막으로 제방을 완성한다는. 누구나 알고 있다. 결코 태평양의 범람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면 결국 남을 것은 완벽한 절망. 식민지 람 평야에 결국 남을 것은 원주민 밖에 더 있겠나.

 

  뒤라스는 프랑스인으로 <태평양을 막는 제방>에서 당연히 프랑스인의 시각으로 작품을 썼다. 식민지 토지국 공무원들이 식민지의 프랑스인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도 잘 보여주고, 결국 그들에게 죄를 묻는 일은 착취당한 프랑스인들과 뜻을 함께 했던 현지인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도 꽤 의미가 있다.
  이런 정치, 식민주의도 정치의 하나니까, 정치적인 논의는 그만하자. 나는 책을 덮으면서 가슴 속에 태평양의 썰물이 좌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는 자기만의 문장이 아니라, 늘 읽을 수 있는 보통의 문장으로도 뒤라스는 독자를 이렇게 쓸쓸하게 만들 수 있었구나. 절망에 대한 약한, 가없는 희망을 유지하며 늙어가는 여자의 모습에 집중해서 읽었다. 역시 “희망을 가진 사람은 불행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더 불행”한 건가.
  8년 후 뒤라스는 역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배경으로 하는 <부영사>를 쓴다. 십대 소녀가 출연한다. 무대는 바닷가가 아니라 호숫가다. 그 책도 인상 깊게 읽었는데 너무 오래 전이라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한 번 들춰봐야겠다.

 


 

앗차!
제목으로 썼으며 본문에도 있는 문장은 정호승의 시에서 따온 건데, 어느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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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2-16 0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퐐님 별다섯! 그렇다 그렇다! 제가 먼저 읽은 책 퐐님 리뷰로 보는 거 처음인데 엄청 생생해요. 저는 아니땐 굴뚝의 희망보단 정직한 절망이 더 낫지않는가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너무 열심히 살면 정직하게 절망하기가 얼마나 어렵나… 그런 생각을 하게되더라구요.

Falstaff 2021-12-16 09:10   좋아요 4 | URL
앗, 이게 처음입니까? ㅎㅎㅎ

하여튼 결론은, ˝절망엔 약이 읎다!˝ 였습니다.
독자의 가장 큰 시선은 조제프와 쉬잔을 향할 겁니다. 그건 독자 나름대로 품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뜻에서 엄마 시각으로 썼는데요, 엄마는 사실 희망을 가장한 절망에 절절하고 절절하게 빠져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절망의 시작은 웬수 같은 남편의 죽음일 겁니다.
쉬잔, 어린 뒤라스로서 충분히 실감하지 못했을 고통과 고독의 시발점. 그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라니, 참 나.

공쟝쟝 2021-12-16 12:02   좋아요 3 | URL
절망의 시작이 남편의 죽음이지 않았을까. 그렇게도 읽는 구나~ ^^ 역시 소설 같이 읽는거 너무 재미지다요.~~~

Falstaff 2021-12-16 12:2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이 세 식구가 내리는 행복의 정의는 중국인 조와 달리 거의 전적으로 돈에 달려 있습지요. 조제프가 조한테 행복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얘기하잖아요.
그러니 안정적 수입이 갑자기 끊긴 아빠의 죽음이 절망의 시작이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꼬박꼬박 저축해 둔 돈까지 병치레로 다 날렸다면 아이고....

잠자냥 2021-12-16 11: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암튼 전 뒤라스 작품 중 이 작품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요!

Falstaff 2021-12-16 11:11   좋아요 3 | URL
솔직히 뒤라스한테 거장이니 대가니 하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물론 오직 제 생각입니다. 행운의 손이 뒤라스를 쓰다듬어 인플레이션 된 명성을 즐기고 있으니 저승에서나마 기분 좋을 듯합니다. (다시 강조. 오직 제 생각입니다.)
습작하는 지망생들이 (진짜 습작으로) 이이의 작풍을 사용/참작/참고/모방해 단편을 써보는 정도로는 아주 적당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저도 뒤라스 작품에 별 다섯 개 줄 수 있는 건 이 책 말고는 없습니다.

이런 댓글 잘못 쓰면 코피 터지는데.... 흑흑.....

stella.K 2021-12-16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웅~ 제목 좋네요. 시인은 어느 별에서 왔을까요?ㅠ

Falstaff 2021-12-16 20:02   좋아요 2 | URL
ㅎㅎㅎ 시인은 별자리를 타고 나야 합니다!

stella.K 2021-12-16 20:26   좋아요 1 | URL
아멘! ㅋㅋ

쎄인트saint 2021-12-16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이하라 2021-12-16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thkang1001 2021-12-16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2021 서재의 달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얄라알라 2021-12-16 1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엠블렘을 어딘가에 마구 감춰놓으셨음이 분명

폴스타프님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1-12-16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달인 축하드립니다. 실제 생활도 달인 포스가 느껴집니다~!!

Falstaff 2021-12-16 20: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만장하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사실 달인, 이게 혜택 가운데 1년 동안 무조건 플래티늄, 죽여주거든요. 요즘 기념품은 별거 없어요. 걍 다이어리 하나, 캘린더 준다는데 모르겠고, 예전에 (전에도 받은 적이 ㅋㅋㅋ 있답니다) 비하면 그저 흉내내는 수준입니다.
근데요, 솔직히 달인...되려면 책 많이 사야 하니까 저절로 플래티늄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하여튼 이런 이벤트 해주는 알라딘이 고맙기는 합니다.

독서괭 2021-12-17 10:49   좋아요 1 | URL
폴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엠블럼 어디 숨겨놓으신 거죠? 절대 하나뿐일 리 없다..
저도 그 생각 했는데, 플래티넘 서비스 좋다고 해도 어차피 지금도 구매실적으로 플래티넘인데, 의미가 있을까-^^;; 내년엔 좀 덜 사고 많이 읽어볼까? 싶지만 가능할런지 모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1-12-16 2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리뷰 읽으니 이 소설이 다시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식민이라는 단어가 참 아프고도 질깁니다^^
리뷰의 달인이십니다**

Falstaff 2021-12-16 20:30   좋아요 2 | URL
아휴, 소쿠리 비행기 탔다가 떨어지면 을매나 아픈데 이리 띄워주십니까. ^^;;

그레이스 2021-12-16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