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거 아셨나요?
옛날 옛적에 창비라는 출판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가 업계에서 많이 늦게 세계문학전집을 발간하기 시작했답니다. 여태까지 다 해서 여든 권을 만들었으니 그래도 나름대로 열라 만든 편입니다. 별난 외국어 표기는 창비적 창의성이라고 치고, 그래도 작품은 나름대로 신중하게 선택해 출간하니 다른 회사들과 비교해 품질이,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뭐 출판사라는 곳이 비슷하기는 한데, 특히 이 창비란 회사는 자신들이 우리나라의 최고급, 아주 최상의 지식인들이 모인 곳이라는 자만심이 대단해서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일반 시민이 질문을 해도 답변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앞으로 365일 안에 여의도 만한 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확률하고 비슷합지요.
그런데 어쩐 일로 "리뷰대회"라는 경품을 건 겁니다. 워낙 안 팔려서 그랬을까요? 진짜 괜찮은 책이 많은 데도 말입니다. 솔직히, 창비가 세계문학 시리즈를 너무 늦게 시작해 여러 좋은 책이 다른 출판사하고 중복이 되는데, 그렇다고 다시 책을 사 볼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럼 후발에서 비롯하는 핸디캡은 그냥 떠 안을 수밖에요.
1등은 세계문학 여든 권 몽땅. 2등은 기억나지 않는데 뭐 문화상품권이었던가 그렇습니다. 3등은 세계문학 가운데 두 권을 준다는 거였습지요. 그래, 두 권이라. 흠. 사려고 장바구니에 담은 책 가운데 창비 세계문학이 두 권 있었습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두 권짜리 장편소설입니다. 그래 잠깐 스톱, 하고 이미 서재에 독후감 써놓은 거 <현혹>하고 <주군의 여인>을 여기다 올렸더니 덜컥 3등으로 뽑혔습니다. 우하하하...
근데 3등으로 뽑힌 다음에 정신차리고 잘 읽어보니까, 책 두 권 보내준다는 게 "랜덤"이라는 조건이 있더라고요. 원하는 책이 아니고, 출판사가 골라서 아무거나, 아마 판매실적이 거의 없어 창고에 재놓고 있는 거 두 권을 주겠다는 의미 같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알아요? 그죠? 그래 책이 도착할 때까지 주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첨자 발표가 5월 8일. 어제 라면박스보다 더 큰 박스에 두 권의 책만 달랑 든 채로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5월 21일. 딱 14일 걸린 겁니다.
제가 지금 빌어먹고 사는 회사가 네 번째 회산데요, 네 군데 다, 5월 8일에 결정이 된 사안을 21일까지 질질 끌었다면 최하가 시말서고요, 보통이 징계에다가, 최고가 사직섭니다. 얄짤 없어요. 이 회사 경품잔치 담당자들은 무사했을지 참 걱정입니다. 아무쪼록 가벼운 시말서 수준에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예? 창비라는 출판사의 평균 수준이 이 정도라서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요? 에이, 설마.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최고급 출판산데요.
그러면 어떤 책을 받았을까요.
정말 고맙게도, 라면 박스보다 더 큰 포장박스에 아무런 완충장치 없이 달랑 두 권의 책만 들어 있던 건데, 와, 대단한 고전들입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불멸의 명작 <젊은 베르터의 고뇌>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 각하가 쓰신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런, 이런, 이렇게 고마울 수가.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고전 작품 가운데서도 무척 앞 줄에 있는 잡문이고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 딱 이 책은 2014년 8월 28일에 알라딘에 주문해 읽은 바로 그 책입니다.
좋겠다고요? 좋아 죽겠습니다. 책 좀 읽어서 "리뷰대회"라는 곳에 독후감을 올릴 정도의 인간들에게 아주 어울리는 작품이잖습니까? 물론 제가 속물이라 기껏 선물을 받아놓고 고마운 줄 모르는 후안무치한 발언을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아놔, 어제 술김에, 또 술 마셨느냐고요? 그럼요, 일용할 양식인 걸요, 육회 만들어 한 병 깠습지요, 하여간 술김에 박박 찢어버리려다가 째려보는 마누라한테 한 소리 얻어 들었습니다.
아, 창비는 정말 저하고 궁합이 맞지 않는 거 같아요. 책은 좋은 거 많은데 어찌 하는 짓마다 다 이리도 밉상인지 원. 몇 번을 얘기했다시피, 그렇다고 창비의 책을 읽지 않을 수도 없는 애증의 출판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