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굴 가이드
김미월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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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의 소설을 두고 "똘똘하다" 라고 한다면 이해하실란가.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전혀 안 똘똘하지만 김미월의 소설은 똘똘하게 읽힌다.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라 한다면 주례사 리뷰가 되겠는가?

잘 짜여진 편물 의류같은 문장들. 한 코도 빠지지 않아 촘촘하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밋밋'하다. 뭔가 '아삼삼'한 그런 점이 없다는 게 내 취향엔 아쉽다.
별 거 아닌 허접스런 문장에 '시큰'해 지는 게 사람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다.
똘똘한 아이들이 공부는 곧잘 해도 착하긴 어려운거 아니냐 하는 일종의 편견이 섞인
내 기준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너무 똘똘해서 그런것 까지 능수능란하게 감춰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수 년 전에 읽었던 것도 있고 처음 읽는 것도 있다. 수 년 전엔 참 괜찮았다 싶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때의 감흥을 찾기 힘든 것도 있어 다소 당혹스럽기도 하다.

좀 더 많은 이런저런 이야기는 다음 작품집 또는 장편 소설 하나 정도는 더 읽어 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여하튼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보자.


근데, 표지 색깔이 너무 칙칙하다. 아무리 내용 자체가 칙칙하다 그래도 그렇치.
요샛말로 북 디자이너가 작가 안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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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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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러 놓고 2년이나 묶힌 소설의 리뷰를 한다는 것도 좀 뭐하지만 여하튼.

'참, 잘 쓴다.'라는 생각을 나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애란을 읽어 본 사람 가운데.
김애란은 '결'을 쓰다듬을 줄 아는 작가 같다.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결이, 무슨 멍이 들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작가다. 그것을 따박따박 문장으로 찍어낼 줄 아는 소질이
있다. <<달려라, 아비>> 부터 김애란에 열광하고 김애란이 각광받는 이유라고 본다.
그러나 만약 김애란의 직간접적인 경험과 읽는이의 감성이 맞닿지 않는다면 내 말은 다
'뻥'일 뿐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과 빙빙 도는 지하세계의 기차, 옥상 위의 불켜진 창문, 하루에 두 번씩
한강 다리를 지나며 보는 한강에 대한 감상, 이런 것들에 당신의 감상이 닿는다면 아마 당신도
김애란의 독자가 될 것이다. 내가 그러하듯이.
그런 점에서 내 얘기를 대신, 알아서, 때론 쓰다듬어 주는 작가라면 홈빡 빠질법하지 않은가 말이지.
흔히 말하는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하고 빙빙 도는 비루한 인생들. 그 가운데 여성이라면.
김애란은 '오바'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다. 반지하에서 사람들의 구두 뒤축을
올려다보듯 그는 낮고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곧잘 잘한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는 좀 의외로 읽힌다.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고 다소
엉뚱한 '이야기'같은 줄거리도 그렇다. 김애란 '답지'않다고나 할까. 두 권의 소설집을 통해
'김애란 다운' 그의 스타일이 있다고 본다.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스타일은 곧 '한계'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도 있다.
벌써부터 김애란의 스타일과 한계를 논한다는 건 이른 일이다, 아주. 그런 면에서 김애란이
펼쳐 보일수 있는, 발설하고 싶은 이야기 형식의 작은 단초는 아닐까 짐작해 본다.

어떻게 책장이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따라가다보면 한 편의 이야기들이 툭툭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이번 소설집을 다 읽었다. 아쉬운 눈맛을 다시면서 말이다. 여전히 그들은 복잡한 골목
그 안에 있거나 어두운 방 앞에 멈췄거나 골방에서 불편하게 연필처럼 잠들어 있다는 생각에
불편한 어떤 이야기를 들킨것 같아 못내 불편하다, 그래서 잘 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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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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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7.21 초판 2쇄

약 7일만에 1쇄가 다 팔려나갔다. 각 출판사마다 '상'을 만들어 내는 이유다.

의심할 수 없고 의심하지 않는, 또다른 달의 출현이라는 착상은 신선하다. 그로인한 '무중력증후군'이라는
제목 또한 눈길을 끈다.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이 번쩍 떠오른 건 다 제목 탓이었다. 여차저차
근 1년 만에 일독했다. 제목만 보고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은 사람이 얼치기였다.

달이 두 개가 되었다니. 그것도 갑작스럽게 말이다.
지구의 위성은 하나다. 그게 달이다. 달에 사는 옥토끼를 더이상 상상하는 사람은 없다. 대신 달이 두 개가
되었다면 그에 따른 지구와 달 간의 물리적 관계의 변화에 따른 변화 따위가 궁금해진다. 이 소설에서 그런
과학적 접근은 찾아볼 수 없다. 기대한다는 게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이건 그냥 소설일 뿐이다. 그런데 소설이
소설같지 않고 '이야기'로 읽힌다. 옛날에 아무개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대요, 라고 하는 이야기.
최근의 소설들이 그렇다. 비평가들은 소설의 지평을 넓혔다라고 나름의 평을 내놓고 있다. 문학소설의 지평은
어디까지일까 한번 물어보고 싶다.

갑작스런 제2, 제3의 달의 등장과 그로인한 여러가지 상황들을 재빠르게 때론 어물쩡 넘어가는 게 힘이자
매력이지만 그렇게 숨가쁘게 좇아가 어느날 새 달들이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 보는 순간 지금까지 얼마를
달려 왔고 무얼 좇았는지 멍하다.

정말로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 같은 다소 무거운 이야길 하던가, 아니면 획일화된 뉴스에
의해 휘둘리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보던가. 이것도 저것도 살짝 건드려 보다가 치고 빠지기
식인, 하다만 이야기들의 혼재랄까, 그렇다. 두껍고 질긴 줄거리는 없고 곁가지 두어 개만 늘어놓고 끝낸.

어설픈 점을 하나 더 꼽으라면, 작가의 성은 여성이다. 화자는 남성이다. 자신의 성 영역 안에서만 작품을
쓸 수는 없다. 여성 작가가 건드리는 남성만이 느낄수 있는 말초적인 부분의 묘사나 설명은 어설프다. 안하니만
못한 부분이라고 본다. 남성과 여성이 각각 달리기 할 때 덜렁거리는 서로의 성기나 가슴의 느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건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신뢰를 더욱 떨어트린다.


역시나 아무개 상 수상작 이런 건 집어드는 게 아닌것 같다. 대부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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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별장, 그 후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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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의 추천에 힘입어 냉큼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z의 말대로 두 권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단지 유령일 뿐』은 어떤 놈이 씹어 먹고 있는지 반납 예정일보다 보름이 더 지났는데도
아직도 대출중이다.

솔깃하게 했던 z의 소갯말 때문에 시종일관 '왜'라는 생각으로 읽었다. 어떤 독자(로써의 작가라도)
한 사람이 또 어떤 한 작가를 좋아하는 대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직접 들을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수 없다면 직접 읽어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호기심이 작용했다. 전혀 아닐 수도
있을 짐작만 가진 채 이렇게 몇 자 쓴다.

9편의 단편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는「오데르 강의 이쪽」곳곳에서 작가 h의 성향이랄까 뭐 그런게
어른거렸다고 한다면. 물론 그런 생각은 이미 내가 그런 생각에 취한것일수도 있다.
유디트 헤르만의 딱딱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도 h의 문장을 생각하면 이미지 중첩의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좋아한 작가의 문체를 알게 모르게 흉내내거나 표방하는 걸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리고 그런 인물들의 공간과 그 공간 속의 이야기들이 마치 정지한 한 컷의 사진처럼,
먼저와 나중이 다 잘려나가고 사진 한 장만 들여다 보고 있는 그런 소설. 사진 속의 여자가 이전에는 웃고 있다가
울고 있는지 계속 말이 없었는지 알수 없는 상태. 인물과 사건들이 대부분 그렇다. 그런 것들을 탁탁탁 잔가지들을
과감하게 쳐내는 가위를 가지고 글 쓰는 작가. h는 쉼없는 쉼표 가위로 쳐내면서 썼다는 느낌이다.

전작에 이어『단지 유령일 뿐』역시 같은 번역자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다른 번역자였으면 어떨까 싶다.
취향나름이겠지만 번역자의 어투가 그리 탐탁치 않다.  외국 작품들은 그 나라 말을 공부해 그 나라 말로 읽는 게
최고의 선택이지만.

「붉은 산호」 의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선 관심 없어."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라는 문장은 h 작품에서 본 다음 문장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했다.

생각해보면 내 관심사는 오로지 나 자신뿐이었으니까요. 지독히도 나 자신뿐이었죠.


의사가 말하네,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난 우울해
- 톰 웨이츠

왜 저 말을 책 제일 앞에 걸어 놓았는지 읽어 본 사람이라면 느끼지 않을까 싶다.
9가지로 변주된 짧은 소설 하나하나가 결국 저 말과 다름아니다. 그래서 그 우울함이 『단지 유령일 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궁금하다. h'꽈'라고 말한 내가 계속 주목해봐야 할 또다른 작가의 출현과 앎에 반가운 마음이다.
그리고 z에게 "땡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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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책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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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음의 책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재미없는 소설을 쓰는 재미없는 소설가 한유주의 두 번째 소설집.

첫 소설집의 까만 밤 표지가 인상적이더니 이번에는 하얗다. 거기에 결정 모양의
UV코팅까지. 물론 표지가 하얗다는 건 아니고 표지를 벗겨내고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얼음의 책'다운 표지 디자인. 멋지다. 밥벌이가 밥벌이인 만큼 눈에 띠는 책표지 이야길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네.

젊은 소설가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는 김애란의 '재미'있는 소설과는 다른 재미없는 소설가의
다음 소설을 기다린 독자라면 그런 재미없음의 재미가 뭔지 아는 사람이거나 직업적으로 비평을
해야하는 사람밖에 없겠지. 그리고 하나 더 보태자면 글쟁이를 꿈꾸는 치들.

여하튼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잘 보았다. 문장과 문장에 홈빡 빠져서 말이다.
흔히 말하는 '서사'따위는 희미하다. 소설가 한유주에게 서사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 기대 하지
않는다. 서사에 빠져 허부적 거리지 않기를. 한유주의 서사는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러나 지금과 같은 소설을 유지한다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얼마나 읽어줄 수 있을까.
벌써 세 번째 작품집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부정문의 매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는 문장을
따라가다 출구가 보이는 찰나, 찰싹찰싹 따귀를 맞는 기분이랄까. 생각 같아서는 모든 부정문을 긍정문
으로 바꿔 읽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한 것'들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어리석은 생각일 것이다.
왜 이토록 많은 부정문을 썼을까, 부정문을 쓰게 만든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따위의 생각들까지 품는다면
쓰잘데기 없는 오지랖만 넓은 것이겠지.

한 문장 한 문장, 줄거리 생각에 빨리 지나쳐가지 않고 문장 자체를 읽어나가는
행태가 즐겁다. 한유주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써보고 싶은 말들이 속에서 뭉글뭉글 피어올라 때론 넘쳐나기도 한다. 소설적 '재미'를
원한다면 재미없는 소설가의 재미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몰입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아주 역동적인 것이지만 그 역동적인 힘이 숨어 있는 곳은
있어도 있는줄 모르는 보잘것 없는 것들의 처소다. 역동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 서사라면
보잘것 없는 것들에 관한 것을 묘사라고 한다면 어떨까. 지루한 묘사, 재미없는 묘사.
볼품있는 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의 면면에 관한 시선을 가졌다는 것은 비극일까
무엇일까. 이런 상념.
웅얼웅얼, 나레이션을 읊조린다. 그런 소설을 따라 나레이터가 쓰는 외따옴표 속의 생각들을
읽는 일. 까만 의식 속에 살면서 겉으로 드러날 수 없는 말소리였지만 그 들끓는 것들을, 자궁 안의 것을
밖으로 생산해내야만 하는 것처럼, 까만 활자의 몸을 빌려 꺼낸 것을 눈으로 쓸어 담는 일. 때론 그런
일에서 쓸쓸한 위안을 얻는다.

「허구0」을 읽는 내내 째깍거리는 시각 때문에 시계를 사볼까 하는 생각에
언젠가 메모해 둔 바탕화면의 메모장을 열어 모델명으로 검색해 봤다
sailaway ycs515g. 막상 다시 이미지를 보니 역시 생각은 이내 사그러 들었다. 매 초 마다
전진하는 초침과, 시침과 분침이 이루어내는 각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재미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는 듯 시계는 돌고 시간은 저 멀리 간다.
미래로, 동그란 시계알 속에서 무한한 미래로 옮겨가는 초침을 응시하는 일. 과거로 자꾸만
미끄러지는 지금, 미래형 문장들을 써보는 것도 벌써 초침을 따라 둥둥 옛날로 사라지는 일.
 

특별하기도 하고 특별하지도 않은 줄친 문장들을 옮겨와 본다.

누군가가 미래 시제를 잘 사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묻기에, 미래를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지겹지만 지루하지는 않은 일이다.
이것과 저것이 허물어지고 있는 방향.
담배는 끝에서부터 안쪽으로 타들어 간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진다. 모든 것은 앞으로 나아간다.
두고 온 것은 없다. 자신은 유실된다.
이 글은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야 한다 혹은, 영원히 생각해야 한다. 가능에 거역하고 불가능에 불응할 것.
음악이 문자로 수렴한다.
그러나 그는 복수로 존재한다.
반복하는 행위는 지루한 쾌감을 동반하고, 그것이, 시간과 더불어 이전의 행위와 이후의 행위를 다르게 만든다.
이 글에서 가장 큰 사건은 점진적 실패가 될 것이다.
무엇이든 집어넣어도 무엇이든 나올 것이다.
반복은 반복되기를, 혹은 반복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항상 스스로를 베낀다.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한 줌의 믿음과 한 줌의 불신이 필요하다.
나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이곳과 저곳, 여기와 저기, 거기, 그리고 아무 곳에나 있다. 그러니 굳이 모든 문장들에서 나를 삭제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폭력적인 수다와 구축되지 않는 응시와 추락과 나락과 자기애와 이타적인 사랑, 그러한 허구적 감정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없다. 있어도 없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다.
당신이 그러했듯, 생각해보면 내 관심사는 오로지 나 자신뿐이었으니까요. 지독히도 나 자신뿐이었죠.
집은 가정을 연상시키고 가정은 가족을 연상시킨다. 가족이라는 말이 사랑이나 온기, 혹은 유대감과 같은 말들까지 에두를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런 집도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축구나 야구에 목을 매는 것은 이러한 경기들이 시작하는 순간 끝을 향해 치닫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경기란 없고 기승전결이 없는 경기도 없는 법이다.
나이를 먹기도 전에 이미 나이 든 지 오래이므로, 자라기 위한 짧은 시간 조차 이제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긴 호흡을 지닐 수 없던 이야기들, 말, 얼음의 말들,
이것은 부정어 편람이 아니다.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세상의 모든, 썩어가는 것들이, 영원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시각.
이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서 나는 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리고 나는 너를 필요로 한다. 인물들보다는 고유명사들을, 사건들보다는 시간성을, 배경들보다는 불가능한 묘사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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