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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책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얼음의 책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재미없는 소설을 쓰는 재미없는 소설가 한유주의 두 번째 소설집.
첫 소설집의 까만 밤 표지가 인상적이더니 이번에는 하얗다. 거기에 결정 모양의
UV코팅까지. 물론 표지가 하얗다는 건 아니고 표지를 벗겨내고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얼음의 책'다운 표지 디자인. 멋지다. 밥벌이가 밥벌이인 만큼 눈에 띠는 책표지 이야길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네.
젊은 소설가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는 김애란의 '재미'있는 소설과는 다른 재미없는 소설가의
다음 소설을 기다린 독자라면 그런 재미없음의 재미가 뭔지 아는 사람이거나 직업적으로 비평을
해야하는 사람밖에 없겠지. 그리고 하나 더 보태자면 글쟁이를 꿈꾸는 치들.
여하튼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잘 보았다. 문장과 문장에 홈빡 빠져서 말이다.
흔히 말하는 '서사'따위는 희미하다. 소설가 한유주에게 서사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 기대 하지
않는다. 서사에 빠져 허부적 거리지 않기를. 한유주의 서사는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러나 지금과 같은 소설을 유지한다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얼마나 읽어줄 수 있을까.
벌써 세 번째 작품집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부정문의 매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는 문장을
따라가다 출구가 보이는 찰나, 찰싹찰싹 따귀를 맞는 기분이랄까. 생각 같아서는 모든 부정문을 긍정문
으로 바꿔 읽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한 것'들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어리석은 생각일 것이다.
왜 이토록 많은 부정문을 썼을까, 부정문을 쓰게 만든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따위의 생각들까지 품는다면
쓰잘데기 없는 오지랖만 넓은 것이겠지.
한 문장 한 문장, 줄거리 생각에 빨리 지나쳐가지 않고 문장 자체를 읽어나가는
행태가 즐겁다. 한유주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써보고 싶은 말들이 속에서 뭉글뭉글 피어올라 때론 넘쳐나기도 한다. 소설적 '재미'를
원한다면 재미없는 소설가의 재미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몰입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아주 역동적인 것이지만 그 역동적인 힘이 숨어 있는 곳은
있어도 있는줄 모르는 보잘것 없는 것들의 처소다. 역동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 서사라면
보잘것 없는 것들에 관한 것을 묘사라고 한다면 어떨까. 지루한 묘사, 재미없는 묘사.
볼품있는 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의 면면에 관한 시선을 가졌다는 것은 비극일까
무엇일까. 이런 상념.
웅얼웅얼, 나레이션을 읊조린다. 그런 소설을 따라 나레이터가 쓰는 외따옴표 속의 생각들을
읽는 일. 까만 의식 속에 살면서 겉으로 드러날 수 없는 말소리였지만 그 들끓는 것들을, 자궁 안의 것을
밖으로 생산해내야만 하는 것처럼, 까만 활자의 몸을 빌려 꺼낸 것을 눈으로 쓸어 담는 일. 때론 그런
일에서 쓸쓸한 위안을 얻는다.
「허구0」을 읽는 내내 째깍거리는 시각 때문에 시계를 사볼까 하는 생각에
언젠가 메모해 둔 바탕화면의 메모장을 열어 모델명으로 검색해 봤다
sailaway ycs515g. 막상 다시 이미지를 보니 역시 생각은 이내 사그러 들었다. 매 초 마다
전진하는 초침과, 시침과 분침이 이루어내는 각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재미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는 듯 시계는 돌고 시간은 저 멀리 간다.
미래로, 동그란 시계알 속에서 무한한 미래로 옮겨가는 초침을 응시하는 일. 과거로 자꾸만
미끄러지는 지금, 미래형 문장들을 써보는 것도 벌써 초침을 따라 둥둥 옛날로 사라지는 일.
특별하기도 하고 특별하지도 않은 줄친 문장들을 옮겨와 본다.
누군가가 미래 시제를 잘 사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묻기에, 미래를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지겹지만 지루하지는 않은 일이다.
이것과 저것이 허물어지고 있는 방향.
담배는 끝에서부터 안쪽으로 타들어 간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진다. 모든 것은 앞으로 나아간다.
두고 온 것은 없다. 자신은 유실된다.
이 글은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야 한다 혹은, 영원히 생각해야 한다. 가능에 거역하고 불가능에 불응할 것.
음악이 문자로 수렴한다.
그러나 그는 복수로 존재한다.
반복하는 행위는 지루한 쾌감을 동반하고, 그것이, 시간과 더불어 이전의 행위와 이후의 행위를 다르게 만든다.
이 글에서 가장 큰 사건은 점진적 실패가 될 것이다.
무엇이든 집어넣어도 무엇이든 나올 것이다.
반복은 반복되기를, 혹은 반복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항상 스스로를 베낀다.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한 줌의 믿음과 한 줌의 불신이 필요하다.
나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이곳과 저곳, 여기와 저기, 거기, 그리고 아무 곳에나 있다. 그러니 굳이 모든 문장들에서 나를 삭제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폭력적인 수다와 구축되지 않는 응시와 추락과 나락과 자기애와 이타적인 사랑, 그러한 허구적 감정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없다. 있어도 없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다.
당신이 그러했듯, 생각해보면 내 관심사는 오로지 나 자신뿐이었으니까요. 지독히도 나 자신뿐이었죠.
집은 가정을 연상시키고 가정은 가족을 연상시킨다. 가족이라는 말이 사랑이나 온기, 혹은 유대감과 같은 말들까지 에두를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런 집도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축구나 야구에 목을 매는 것은 이러한 경기들이 시작하는 순간 끝을 향해 치닫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경기란 없고 기승전결이 없는 경기도 없는 법이다.
나이를 먹기도 전에 이미 나이 든 지 오래이므로, 자라기 위한 짧은 시간 조차 이제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긴 호흡을 지닐 수 없던 이야기들, 말, 얼음의 말들,
이것은 부정어 편람이 아니다.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세상의 모든, 썩어가는 것들이, 영원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시각.
이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서 나는 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리고 나는 너를 필요로 한다. 인물들보다는 고유명사들을, 사건들보다는 시간성을, 배경들보다는 불가능한 묘사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