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평점 :
시인 진은영은 그의 시집 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 시절, 성수동에서 이대 입구까지
다시 이대 입구에서 성수동까지
매일 전철을 타고 가며 그녀를 상상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 만약 당신이 앉아 있다면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에게
어디 진은영 뿐이었을까. 본 시집의 해설을 쓴 박혜경 또한
"1980년대에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최승자의 시들에 열광했던
젊음의 한때를 지나왔다."고 했다. 만약 당신이 최승자의 '다음 시집'을 기다려 보았던
독자라면 당신 또한 그러했으리라.
비록 2000년대에 들어서야 나는 최승자를 읽을수 있었지만 나 또한 얼마나 열광했던가.
11년이다. 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린 시간. 그가 다음 시집을 내기까지 견뎌낸 시간은.
무엇보다 그 시간에 촉각을 세워왔던 건 그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다. 뒤표
지글 "나는 잿빛으로 삭았"다는 부분에서 지난 시간의 길이보다 깊이로 먼저 읽히는 것
도 투병과 무관치 않게 보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인은 시인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간간히 신작시를 발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초판 1쇄에서 3쇄까지 단 7일. 최승자를 기다려온 사람들의 갈망이다.
여전히 최승자는 시단의 중심에 있음이다. 가운데 있어야 한다. 비록 이번 시집에서 말
수가 줄었다고는 하나 최승자의 거침없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있다.
출판사 새책 페이지를 보다가 이게 누군가 싶어 본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잠시 멍 했던
그때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참 다행입니다라고 속으로 되뇌이던 그 순간.
그런 마음으로 쓸쓸하게 머나먼 곳에 있었던 한 시인의 시집과 만나는 일. 행복한 밤이다.
가시 영역과 가청 영역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그 영역은 좁다. 우리 생각의 지도 또한
아직도 확장중이지만 밝히지 못한 영역 끝이 없다. 어떤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고 그 허무맹랑
안에 시가 숨어 있어 우리는 미처 간파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입을 빌어 귀신이
하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어느 책에서 최승자 는 자신이 써온 시가 귀신이 들려준 이야기였다고
하고 지금도 혼자 중얼거리곤 하는데 그런것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영감'이란
게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의 말대로 귀신이 던져주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런 귀신의 말을
잘 낚아채는 인간부류가 시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번 시집 시들을 한 편 한 편 넘기면서 자꾸만 드는 불온한 느낌들. 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고
불길한 예감만이 언제나 적중하기 마련이다.
앞날을 내다보는 귀신의 이야기가 이번 시집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란다.
부디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어떤 풍경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詩集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時間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詩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흐린 날 -일부
병원 안 컴퓨터실
고요한 실내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름다웠던 부운몽, 그러나
여실했었던 부운몽
책상 앞에서 -일부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