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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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또는 '결국' 다 읽었다. 나 같은 의지박약 인생이 재미있지 않은 딱딱한 책을
거기다 두껍기까지 한 책을 완독하기란 쉽지 않다. 전공자도 아닌데 굳이 평론집까지
펼쳐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으나 다 읽은 지금 생각해보면 '괜찮았던'
독서라고 자평한다.

덕분에 관심 대상에 넣은 작가와 시인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메모해 뒀거나 구입 대상이
늘어 났다. 무엇보다 '맛있는'문장들을 많이 음미했다는 것이다. 무수한 독서에서 뿜어
나오는 예시들과 예문들이 부러웠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물론 읽어도 모르는 많은 인용과
이론들도 있었지만.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두껍고 재미없는 평론집이 근 8개월여 만에 5쇄를 찍었다니 이것은 평론가 신형철 개인의
매력일까 아니면 그의 문장과 말들이 갖는 흡입력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의 비평에서 느낄수 있는 '온정'이 아닐까 싶다. 그 온정이 어떤 것인지는
수고롭겠지만 그의 비평들을 찾아 읽거나 본 도서를 일독해야 할 것이다.

수없이 밑줄 그은 문장들 가운데 그나마 읽으면서 적어본 것들이다. 옮겨 놓지 않은 말들은
읽는 이들끼리만 공유하기로 한다.
어떤 비평가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론집도 이만하면 나같은 일반독자가 읽어도 괜찮겠다는
긍정을 한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 5p

몰락인지 알수없지만, 몰락하지 않기 위해 매일, 하루를 쓰는 나날들의 연속선상에서
몰락에 대해 잊고 있던 생각을 들쑤셔 주는 문장을 만났다. 이미 몰락에 대해, 일찍이
새겨 듣게끔 하던 당신의 일성도 생각났었다. 몰락의 진행중이던 깊은 밤 아니었던가.
가까스로 몰락의 현장에서 나는 잠시 이탈해 있지만 몰락은 기정 사실이요 변함없는
의지 아니던가. 몰락해야 드러날 어떤 것이 있다면 지금 기꺼운 마음으로 나는 몰락해
야 하지 않겠나. 물론이다. 그럼에도 몰락을 하루하루 미루는 이 실험은 언제 끝낼것인가.

몰락을 작심하는 순간 많은 것들은 대수롭지않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나르키소스의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호수에 비친 나르키소스의 얼굴이 몰락을 작정한 사람의
얼굴이다. 몰락을 바라보는 일이 곧 자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왜 우리는 이모양인가. 개별자의 내면에 '세계의 밤'(헤겔)이, 혹은 '죽음 충동'(프로이트)이 있기 때문이다. 부분 안에 그 부분보다 더 큰 전체가 있다는 역설, 살고자 하는 것 안에 죽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는 역설 때문이다. ... 덕분에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과연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캉). 그러니 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신경증)은 쉬운 일이고 그것에 삼켜지는 것(분열증)은 참혹한 일이다. ... 말에 배반당하기 때문에 다른 말들을 찾아헤매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 실패를 한없이 곱씹는다. ... 한편 행동이 통제 불능이라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려는 자들이 소설가다. ... -13p


당대적 현실의 세목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 꼭 좋은 소설인 것은 아니다. ... 그 소재가 무엇이건, 도대체가 미학적으로 태만한 작품은 옹호할 수가 없다. ...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이 있다. -23p


강박증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죽어 있는가, 살았는가?"이다. 강박증자는 그 자신의 충동과 향유의 대상에 직면하면 스스로가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향유를 통제하려고 한다. -112p


단편소설에서 반전은 자칫 예상을 깨는 답을 제출하는 데 봉사하는 수수께끼 놀이의 차원에 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기술이다. -125p


"작가는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 소설가 쓰지 히토나리의 매력적인 단언인다. 비어 있는 목적어의 자리에 '윤리'를 넣고 싶다.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우선 도덕이 아닌 그 어떤 것이다. 윤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를 도덕이라는 오염된 문제틀로부터 빼내와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 -142p


아름답지만 위선적인 도덕이 아니라 참혹하지만 진실한 윤리가 문학의 몫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144p


욕망이 고갈된 삶이 고통이라서 앞으로 다가올 죽음은 휴식이 된다. -148p


한유주에게 소설은 '듣는 것'이고, 편혜영에게 그것은 '냄새 맡는 것'이며, 김중혁, 이기호, 김애란 등에게 그것은 '상상하는 것'이다. -172p


... "지금은 서정의 시대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서정성의 메커니즘을 충실히 따르는 서정시가 씌어질 수 있고 또 씌어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미적으로 아름답기는 쉬워도 우리 시대의 진리 혹은 실재에 접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 진정한 진리는 착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진리는 언제나 위협적인 것이다. -185p


자아의 위력이 놀라운 것은 여하한 종류의 타인들에게서도 자신의 거울상을 찾아내는 능력 때문이다. 언제나 자아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이 경우 타인과의 만남을 규정하는 공식은 1+1=2가 아니라 1+1=1이 된다. 이것은 사랑의 메커니즘에 대한 쓸쓸한 설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위 연애시의 성패는 자아가 거울에서 궁극적으로 그 자신을 보는가(1+1=1), 아니면 타인의 타자성을 인지하는가(1+1=2)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다 ... -192p

이 꼭지의 글을 읽고 되새겨 본다. 축약하자면 '뭐 눈엔 뭐만 보인다'라고 하는 말로 대체하면 어떨까 싶다.
개개인인 우리가 타자를 흔히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대상인 타자의 모습에서 사랑하게 되는 건 결국 그 타자에서
읽어내는 나의 모습이라는 것. 나와 다르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망은 성립되겠지만 그 관계망이 철거되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연인들 간의 불화는 결국 서로
'넌 나완 달라' 또는 '나 같으면...'이라는 나르시시즘의 실망일 것이다.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이는
바로 '나'뿐이다. 그러니 자기애自己愛가 강한 사람은 타인과의 '사랑'은 할 수가 없다.


'사유의 논리'가 아니라 '감각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고집스럽게 당당하고 시종일관 읽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 그 감각의 과잉 때문에, 누구든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누구도 김경주를 너무 많이 알 수는 없다. ... 서정적인 구절들에 밑줄을 치는 버릇이 있는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시편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런 독자들에게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불친절하거나 고집스러워 보일 감각의 향연들도 허다하다. ... 그 자신 명료한 사유를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사유가 되려다 만, 사유가 되려고 하는, 혹은 사유의 형식을 이미 초과한 어떤 에너지들이 흘러넘친다. -304p

김경주의 시세계를 저자는 어떻게 보고 있나, 참 궁금했다. 김경주의 시를 이야기할 때 '감각'이 빠지면 말 하지말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명 김경주의 시는 감각적이다. 그 감각에 무릎을 치거나 위안받는 독자가 어느 시집의 독자보다
많았음은 분명하다. 시집이 팔려 나가는 현상이 그것의 반증이라고 본다. 그러나 첫 시집이후 그가 들려주고 있는 많은
말들(시와 산문들)의 색채는 이제 슬슬 바래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의 '감각'에 싫증이 난다는 것이다.
사유가 부족하거나 정제되지 않은 감각들의 한계랄까 그런. 빛나는 그의 감각에 호들갑 떨던 때는 지났다는 것이다(최소
시에서만큼은).


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는 어디를 보는가. 이렇게 '옆'을 본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들뢰즈)
그녀는 '시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부류의 시는 본질적으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 그녀의 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지 말고 그녀의 시와 더불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353~367p


창작자는 작품을 통제할 수 없다. 작품이라는 결과는 창작자의 의도를 초과할 수 있고, 수용자의 해석은 그 결과를 또 한번 뛰어넘는다. 이것은 즐거운 이중의 배반이다. ... 시에서 '나'란 하나의 "닉네임"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를 시인에게로 환원하지 말라는 주문일 것이다. ... 손가락은 지시가 아니라 암시입니다." -372p


『이상 문학전집 1-시詩』(문학사상사, 1989)는 정본 텍스트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오식과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 인용 텍스트로는 부적합하다. -464p
바로 이 전집을 가지고 있는 한 독자로써 뜨끔하지 않을수 없는 지적이다. 한문이 그대로 있어서 읽기가 난해했지만
오식과 오류라니... 물론 내가 연구자 수준의 읽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작년에 뿔(웅진)에서 나온 이상 전집에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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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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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진은영은 그의 시집 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 시절, 성수동에서 이대 입구까지
다시 이대 입구에서 성수동까지
매일 전철을 타고 가며 그녀를 상상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 만약 당신이 앉아 있다면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에게


어디 진은영 뿐이었을까. 본 시집의 해설을 쓴 박혜경 또한
"1980년대에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최승자의 시들에 열광했던
젊음의 한때를 지나왔다."고 했다. 만약 당신이 최승자의 '다음 시집'을 기다려 보았던
독자라면 당신 또한 그러했으리라.

비록 2000년대에 들어서야 나는 최승자를 읽을수 있었지만 나 또한 얼마나 열광했던가.
11년이다. 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린 시간. 그가 다음 시집을 내기까지 견뎌낸 시간은.
무엇보다 그 시간에 촉각을 세워왔던 건 그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다. 뒤표
지글 "나는 잿빛으로 삭았"다는 부분에서 지난 시간의 길이보다 깊이로 먼저 읽히는 것
도 투병과 무관치 않게 보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인은 시인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간간히 신작시를 발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초판 1쇄에서 3쇄까지 단 7일. 최승자를 기다려온 사람들의 갈망이다.
여전히 최승자는 시단의 중심에 있음이다. 가운데 있어야 한다. 비록 이번 시집에서 말
수가 줄었다고는 하나 최승자의 거침없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있다.

출판사 새책 페이지를 보다가 이게 누군가 싶어 본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잠시 멍 했던
그때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참 다행입니다라고 속으로 되뇌이던 그 순간.

그런 마음으로 쓸쓸하게 머나먼 곳에 있었던 한 시인의 시집과 만나는 일. 행복한 밤이다.


가시 영역과 가청 영역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그 영역은 좁다. 우리 생각의 지도 또한
아직도 확장중이지만 밝히지 못한 영역 끝이 없다. 어떤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고 그 허무맹랑
안에 시가 숨어 있어 우리는 미처 간파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입을 빌어 귀신이
하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어느 책에서 최승자 는 자신이 써온 시가 귀신이 들려준 이야기였다고
하고 지금도 혼자 중얼거리곤 하는데 그런것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영감'이란
게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의 말대로 귀신이 던져주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런 귀신의 말을
잘 낚아채는 인간부류가 시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번 시집 시들을 한 편 한 편 넘기면서 자꾸만 드는 불온한 느낌들. 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고
불길한 예감만이 언제나 적중하기 마련이다.
앞날을 내다보는 귀신의 이야기가 이번 시집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란다.
부디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어떤 풍경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詩集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時間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詩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흐린 날 -일부


병원 안 컴퓨터실
고요한 실내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름다웠던 부운몽, 그러나
여실했었던 부운몽


책상 앞에서 -일부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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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라는 뼈 문학과지성 시인선 369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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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마음사전』이후 급 관심의 대상이 된 시인의 시집이라 곧장 서점으로 달려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펼쳐놓은 사전의 빛나는 말들의 향연을 맛 본 이라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시집 곳곳에서도 말들의 빛남은 여전했다. 아울러 그
말들을 빚어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 이야기 곳곳에서 책장 귀퉁이를 접어 표시해야 했다.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사람이 아니기를,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고통을 발명하다,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노련한 손길, 공무도하가, 시인, 모른다
등이 그러한 시들이다. 아울러 부분적으로 곱씹어 볼만한 싯구가 수북한 점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슬프거나 우울할 땐 더 슬프고 우울한 영화를 보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그래서 발벗고
나선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텍스트에 어떤 치유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타인의 우울을
엿보는 것으로써 내 감정을 전염시키고 싶은 것, 딱 그것 뿐이다. 물론 모두 자기만족이다.
뭐라고 딱히 말로 풀지 못하는 상태에서 적절한 비유를 만난다는 것도 작은 위안거리임에
분명하다. 비록 그 위안이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해도 읽는다는 행위를 하는 시간의 지속
안에 자신을 놓아둠으로써 버팀목 하나를 또 덧대는 일이다.
별로 버티고 싶은 심정도 아니지만 말이다. 여하튼 읽는 동안 함께 더 우울함으로써 위로 받는다.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
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
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
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
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
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
습니다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부분-



내려앉는다
우주의 잔별들이 거스름돈처럼 지금
손바닥 위에
묵직하게

나는 부자가 되어
나락으로
편안히 가라앉는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오후
키 큰 꽃들은 창자를 내어 말린다
창자는 뼈처럼 단단해진다

어딘가에서 울음이 들린다
울음의 박자를 나는 젓가락으로 받든다
한 박자 하나, 반 박자 두 개

미지근한 커튼을 친다

바람만 들어오시고
빛은 나가 있으라
제발 나가 있으라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키 큰 꽃들의 뼈를 집는다
너와 나의 길목에 배열한다

가장 늦은 일이 돼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찾아내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전문-


자기 기억을 비워내기 위해
심장을 꺼내어 말리는 오후

자기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헹구는 오후

여자는 혼잣말을 한다
왜 나는 기억이나 슬픔 같은 것으로도 살이 찌나
왜 나의 방은 추억에 불만 켜도 홍등가가 되나

고통을 발명하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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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젠씨, 하차하다
야콥 하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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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k군이 나름 생각해서 뽑아준 책선물. 잘 읽었네.
옌젠씨를 읽으니 좀머씨가 그 앞을 종종 걸음으로 지나가더라구.

어느 세계가 허상이고, 그 허상의 반대가 (일단은)우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여기인지는
분명치 않아. 분명하다고 '믿는'것 뿐이지 말이야. 믿음이란 그런 거니까. 각자, 자신이
사람임에 털 끝만큼의 의심도 없는 것처럼 여기가 허상이라고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다면
그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지. 좀머씨가 그랬잖아 " 날 좀 내버려 둬!"라고.
하지만 여기 현실속의 사람들은 옌젠씨도 좀머씨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지. 웃긴 사람들이야.

근데, 옌젠씨는 하차한 게 아니라 승차한 거라구.
나는 그가 영원히 하차하지 않길 바래. 새로운 열차를 갈아탄 거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메텔과 999호를 타는 철이처럼 말이지. 나는 옌젠씨가 다시는 이
허상의 세계로 발디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 그게 다른 많은 옌젠씨와 옌젠씨이기를 바라는
이들의 갈망일테니까.

옮긴이는 '옌젠씨는 하차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 제목을 뽑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옮긴이의
감상은 아니라고 본다. 하차를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말이다.-멍청한 옮긴이 같으니라구-

당신이 옌젠씨'꽈'라면 이 책은 그나마 값어치를 했을 것이고
지금 여기 단단한 시멘트벽 현실에 붙박혀 꼼짝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휙 집어던질 지도 모른다
서울의 옌젠씨가 읽는다면 그도 휙- 집어던질 것이다 누가 자신의 자서전을 일독하겠는가 말이지

책장을 덮고 휙- 집어던지려 했으나 k군의 성의를 생각해 다음에 고이 돌려 주기로 했다.

원서 이미지는 어떤가 싶어 아마존을 검색.
그럼 그렇치. 아무리 국내 소설 표지 트렌드가 개나 소나 일러스트 도배질을 한다고 하지만
이게 뭐니. 꼭꼭 닫아 걸어 논 저 원서의 문을 한번이라도 봤나? 짜증 제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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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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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질러 놓은지 근 2년여가 다 되어서야 읽히는 본분의 영광을 맞았다. =.=
우연히 알게 되어 일단 지르고 보자는 2년 전의 요즘이었던가 보다. 여하튼.

본 책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 이 작가에 대해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건
모든 독자라면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대충 검색해보면 나오는 내용을 다시
재방송하는 수준이겠지만.

약력에 나와 있듯 저자는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박사 출신이다. 그래서 책 곳곳에
화학적인 사실 설명이 많다. 소설의 본분은 아니지만 내겐 꽤나 재미있게 읽히는 작용을
하고 있다. 이런 점은 작품의 살을 찌우고 흡입력과 설득력을 높인다.
화학과 출신이 아니라면 겉핧기 수준에 머물렀을테고 그랬다면 밍밍한 문장들이 넘쳐 났으리라.

그 다음으로 그의 출생과 그에 따른 불행, 그리고 사망에 이른 인생역정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전쟁 중에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 그러나 그는 살아 돌아왔다.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그 기적을 몇 권의 소설로 풀어냈다. 다시, 그러나 그는 돌연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 남은 그가 '자살'이라니!!! 어쩌면
그 아이러니한 점 때문에 이 작가의 작품에 솔깃했었던 것 같다.
얄팍한 짐작에, 살아 있는 지옥을 견디고 나온 그가 목격한 전후의 세계에 대한 참담함이랄까
아니면 『이것이 인간인가』를 쓸 만큼 인간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어 그만 생을 마감해 버린건 아닐까 싶지만 알 수 없다.

수용소에서 자살이 드물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
... 우리는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363p


작가연보의 말을 빌리면 이 책 『주기율표』는 회고록.명상록의 성격을 띠고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그 지적이 적절한 것 같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있지만 각 장을 따로 떼 읽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이 작품 자체에 대해 언급 하고 있다는 점도 소설적 색체가 옅어지는 점이다.

작가의 약력만 언뜻 보고 아우슈비츠로 대변되는 학살과 만행에 대한 소설이라고 짐작하면 상당한
오해다. 물론 간접적이나마 그러한 정황과 증언을 들을 수 있지만 본 이 작품은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한 편의 시이며, ...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 주기율표는
압운까지도 들어맞는다! -64p

라고 한 것처럼 길게 풀어 쓴 시에 가깝다고 한다면 억측일까. 지옥에 관한 뚜렷한 증언은 작가의
다른 작품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 만나보면 될 듯 하다.
그래서인지 <탄소>의 마지막 마침표 까지 다 읽어내도 딱히 어떤 '줄거리'에 압도 당하거나 생생한
이미지는 없다. 한 편의 시 또는 한 권의 시집을 읽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행복했다.

'서술의 시제인 과거시제보다 묘사의 시제인 현재시제가 어울린다.' -327p

대부분 서술과 설명이 주를 이루지만 무시무시한 과거는 희미하고 그 위에 여러가지 원소들의
이미지들이 안개처럼 퍼져있다. 안개 속을 거닐며 그 안에서 만나는 각 원소들의 이야기는 빛났다.  


아르곤 수소 아연 철 칼륨 니켈 납 수은 인 금 세륨 크롬 황 티타늄 비소 질소 주석 우라늄 은 바나듐 탄소

이것이 차례에 나오는 소제목들이다. 제목만 봐서는 소설인지 과학책인지 의심이 갈 만도 하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
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움직임
없는 것'(아르곤), 그리고 '낯선 것'(제논)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로 활성이 없어서, 그러
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 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 하지도
않는다. ...


소설의 시작 부분 <아르곤>의 도입부다. 각각의 원소에 걸맞는 이야기와 은유 그리고 사건들로 가득할 것 같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영화 <수퍼맨>에 나오는 그 '크립톤' 행성이 번쩍 생각났다.

이것은 이교도들(곧 구윔) 사이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이들의 하루하루의 비참한 유배 생활과 그들의 성스러운
소명 사이의 모순이다. 좀더 일반적인 것으로 이 언어가 반영하는 또 다른 대조는 인간의 조건 속에 내재해 이
다. 인간은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와 같은 존재, 영혼과 육신, 성령과 먼지가 한데 뭉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언어의 뿌리에 굴욕적인 측면이 있음은 자명하다. 예컨데 '태양'. '인간', '낮', '도시' 같은 단어들이 없다.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 '훔치다', '목매달다'와 같은 단어들은 있다. 그 밖에도 멸시를 표현하는 단어들도 적지 않다.



아연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충동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이쯤에서 '순수'와 '불순'에 대한 한번쯤 생각해 볼만하지 않나 싶다. 성령과 먼지가 한데 뭉친 불순물이
포함된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순수에 대해. 약간 다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우리 안의 배타성을 갖다 붙여 본다면 어떨까. 과연 '순수'라는 개념을 앞세우는 것은 옳은 것일까? 뭐 이젠
다문화 시대가 어쩌고 하는 공익광고까지 하는 마당에 이런 이야긴 구닥다리가 되고 있다만.

나는 내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데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똥개'를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은 없다. 그냥 완전 잡종견을 가리켜 우리는 변견이라고 한다. 잡종,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피가 섞이고 섞인 개의 대표명사되겠다. 그 반면 순수한 '혈통'이 있는 개는 무려 족보 씩이나
갖추고 계시며 몸값 또한 상상을 초월 하신다. 난데 없는 왠 개~ 소리나 하고 자빠졌느냐?
개~ 새끼도 혈통과 족보를 들추며 순수 혈통을 따지는 마당에 만물의 영장이자 위~대한 창조주의 피조물인
인간께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데 자부심을 갖기 시작하셨다니 하는 소리되겠다.
누가 당신들에게 순수하지 못하다고 손가락질 하면 당신의 기분은 좋으시겠는가? 여기에서 '순수'에 대한
정의나 기준을 따져야 하겠지만 뭐가 됐든 패쓰.
한낱 잡설에 불과하기도 한 소설 나부랭이에서 이렇게 생각 '꺼리'를 던져주니 '잘 썼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리타 주위를 맴돌면서 운 좋은 상황이 하나 더 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가방 밖으로 누런 빛깔의 표지에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낯익은 책이 비죽 나와 있었다. 표지 그림은 까마귀가 부리로 책을 물고 있는 거였다. 제목은? '마'
와 '의'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 역시 충분했다. 번개같이 떠오른 제목 때문에 한번 피식 웃었다. 책 속에서 읽혀지는 책이 중복되는 상황이란?
막상 맞고 보니 흥겹다. 무슨 말이냐하면,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와타나베가 읽던 '마의 산'이란 게 무슨 책인가
싶어 나도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다. 결국 1권도 다 못 읽고 포기했지만, 문고판으로 나왔던 예전 식자판본의 책이
아직 어딘가엔 있을 걸 생각하니 다시 도전해 보고픈 마음이 인다. 하루키나 프리모 레비 역시 토마스 만의 작품을
꽤나 좋아하는 듯 싶다.




철과 구리처럼 소박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숨기지 못하는 원소들이 있는가 하면, 비스무트나 카드뮴처럼 잘 속이고
겉잡을 수 없는 원소들도 있다.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하지 말고 믿으라고 강요받는 것을 치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는 모든 독단, 입
증되지 않은 모든 단언과 명령에 혐오를 느낀 것이 아닐까?



칼륨

즉 거의 같은 것(나트륨은 칼륨과 거의 같다. 하지만 나트륨을 썼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
질적으로 같은 것, 유사한 것, '혹은'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 대용품, 미봉책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아주 작을지 몰라도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



니켈

우리에게는 파베세가 말한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 겪는 두 가지 경험", 곧 성공과 실패밖에 없다.

우리는 실수를 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얻어맞고 다시 한방을 되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납이야말로 죽음의 금속으로 제격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납은 죽음을 가져다주고, 그 무거운 성질은 추락하려 함인데
추락은 바로 죽은 자가 하는 것이고, 그 색깔도 핏기 없는 죽음의 색이며, 이 모든 것은 납이 행성들 중에서 가장 느린
죽음의 행성인 '투이스토'의 금속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은 감정적으로 중성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의 토대는 노동자를 억압하고, 다른 이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배를 불리고,
생각할 줄 알고 파시즘에 굴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었고, 체계적
이고 계산적인 거짓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서나 노동자는 착취 당하기 마련인가. 그리고 바로 '지금'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걸 보면 극단적인 비유로 '파시즘'을 들먹이는 게 그리 극단적인
건 아닌것 같다.


바나듐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게 아니다. 현실은 허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덜 정돈되어 있으며,
더 거칠고 덜 원만하다. 그것이 같은 차원에 놓여 있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지상에서 지옥을 다녀 온 작가에겐 당연한 귀결이다.


화학자 출신 답게 화학적으로 소설을 제조해 낸 멋진 작품이다.
특히 <바나듐>과 <탄소>는 응축된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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