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 달의 궁전


더~~~ 럽게 재미 있음!

갈 데까지 가보면 그다음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지
하지만, 정말로 '갈 데'까지 가보는 사람은 많지않아
그 종국이 두렵기 때문이지

이름에 신경쓰면서 읽어야 함
작가가 이름에 설치해 놓은 장치들이 기특함

마지막엔 조금 늘어지는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내키지 않게 처리해 버린 점이 있어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거야 지극히 개인적인 편력이므로 혼자 삯일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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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 쿳시 -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읽어내기에 짜증남
'그'의 남발로 인한 헛갈림
현재형 시제가 마음에 안듬

여하튼 짜증도 나지만 할말도 많을 소설

악려에서 느낄수 있었던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가 쓴것은 아닐까 하는 것
작가가 얼만큼 그를 연구하고 익혔ㄴ느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흉내낸것같은
예를들면 도스토예프스키가 흔히 범하는 화자 와 나를 헛갈리게 하는것같은 조차
작가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렇게 읽히게 하는거 또한 장치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의 '역사'를 끌어들여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완전한 '실제'는 아닌
물론 그러기에 소설이겠지만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와
글쓰기에 관한 인식 혹은 태도에 관해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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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트루니에 - 마왕

본문 중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살인마적인 악의적 전위들 중의 하나가 <순수성>의 개념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순수성은 천진성의 악의적 전위이다. 천진성은 삶에 대한 사랑이고 천상적이자 동시에 지상적인 양식에 대한 미소 띤 수락이며, 순수성-비(非)순수성이라는 처절한 교차 개념에 대한 무지(無知)이다. 그 자발적이고 거의 선천적인 신성(神聖)을 사탄은 역으로 바꾸어 자신을 닮은 모사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순수성>이다. 순수성은 생(生)에 대한 공포이고 인간에 대한 증오이며 허무에 대한 병적인 열정이다. 화학적으로 <순수한> 육체란 철저하게 반자연적인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 야만적인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순수성의 악마와 교합한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 파괴와 죽음을 씨뿌리고 다닌다. 종교적인 정화작용, 정치적 숙청, 종족의 순수성 보호 등 그 잔혹한 개념의 변화 형태들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한결같이 종국에는 범죄에 즐겨 등장하는 도구는 불(火)-순수성의 상징이자 지옥의 상징이다.

사슴 사냥에 있어서 말의 원초적인 역할로 말할것 같으면 그 의미는 더욱 명확해 진다. 즉 항문 천사가 남근을 이고 있는 천사를 학대하는 것. 즉 오메가에 의한 알파의 추격 내지는 사형이다. 그 암살놀이에서 겁장이에 엉덩이만 큰 짐승에게는 공격과 몰살시키는 주도권이 주어지고, 숲 속의 왕이자 머리에 이고 있는 뿔에 당당한 남성을 짊어진 짐승은 헛되이 공격하는 짐승에게 눈물로 자비를 애걸하면서 쫓기는 먹이가 된다. 그 놀라운 자연의 전위(轉位)작업에 티포쥬는 다시 한 번 경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칼덴보른의 닫힌 어항 속에 가두어 놓은 이 아이들을 가지고 무얼 해야할까? 이제야 나는 왜 폭군의 절대적인 힘이 항상 폭군을 미치게 만드는지 알겠다. 왜냐하면 그가 그 힘으로 무얼 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한히 행할 수 있는 <힘>과 유한히 행할 줄 아는 <앎>사이의 그 불균형보다 더 잔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운명'이 빈약한 상상력의 한계를 깨뜨리지 않는 한, 또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의지를 강간하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과잉 적응자는 마치 <물 속에 있을 때의 고기처럼> 자신의 환경 안에서는 행복하다. 물론 물고기란 전형적으로 물에의 과잉 적응 어류이다. 그것은 물고기의 행복이란 완벽한 만큼 더욱 불안정한 것이라는 풀이가 된다. 왜냐 하면 만약에 물이 너무 뜨겁거나, 너무 짜거나, 혹은 수위가 너무 내려가면...... 어찌될까?
그러니 차라리 단순히, 가능하면 적당히 물에 <적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마치 수륙 양서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눅눅한 곳에서나 건조한 곳에소나 완전히 행복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두 환경에 대충은 적응할 수 있다. ........................반면에 수륙 양서동물인 우리들은 항상 사물들과 일치가 빗나가고, 일상적인 삶에서도 늘 당하거나 깨진다. 그래서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환경에서 오는 모든 배신들에 대충 대항할 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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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풍부함, 잘 짜여진 날실과 씨실의 옷감이 주는 탄탄함 같은 구조
작가의 박식함
맛있는 책. 입맛을 한참 다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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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 허삼관매혈기

마치 옛날 이야기책을 보는것 같은 흥미 진진함
소위 말하는 '요즘 소설' 읽기에 익숙해 졌다면 다소 당황스럽고 유치해 보일수도 있지만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읽히는것이 최대의 장점일 수도
그러나 그렇게 얼기설기 엮은듯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한번 생각해 보길


작가는 스스로 '평등' 에 관한 글이라 했다
동감
보라 우리가 얼마나 평등하게 살고있는지를

그나마 평등하달 수 있는 '매혈'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내 이야기

그 사내 왈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단 말씀이야"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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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 셔윈 B. 누랜드

본문 중에서

현대 의술의 진보에 힘입어 우리는 죽음의 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죽음의 속성 자체까지도 거부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음의 면전에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짓일 뿐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호기심 때문
에 손가락 사이로 죽음이란 것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상세한 과정을 알고 나면 죽음이라는 존재
앞에서 나름대로 공포와 두려움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뒤에
야 비로소 죽음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자지지만과
환면 속으로 우리를 끌고가는 회백색 죽음의 공포로 부터 빠져나올 수 있
을 것이다.
죽는 것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말이다.
무너지는 육체와 달리 심적상태를 아름답게 유지해서 훌륭한 죽음을 맞
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악마가 가져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 악마에게 이름
을 붙여 정체를 드러나게 하고 거기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
일단 어떤 대상에 꼬리표를 붙이면 그것과의 대결은 한층 쉬워진다.
이러한 대결 과정을 통해 잔인하게 다가드는 괴물을 잡아 앉혀 얌전하게
길들일 수도 있고 공포감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질환이든 우선
정체를 밝혀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그것을 정복할 수 있다. 그래야만 우
리식대로 그 질환과 게임을 벌일 수가 있는 것이다.
질병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그 질병을 물리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략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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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깃들어 있는 또다른 나의 하나인 내 육체가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그것이
내 영혼으로 하여금 치루어내게하는 끔찍한 고통과 인간 존엄성 상실을 볼 때 과연
진정한 나는 어느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많은 불치의 병들이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아 댈때 인간 이하의 나락으로
떨어져 결국에 맞게 되는 죽음. 그가 살아 구축해 놓았던 자신의 모습들 또한 여지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희망'을 놓지못하는 의사나 환자의 가족들에게
있어 환자는 이미 그 환자 자체로써의 존재는 없어져 버렸을 지도 모른다. 의사는 병에 대
한 수수께끼 를 그 환자를 통해 풀고 싶을지도 모르며 가족들 역시 환자의 부재를 받아들
이고 싶지 않은것 뿐일지도 모른다.
'희망' 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절망적인 환자가 가질 수 있는 희망
이란것이 뼈를 깍아내는 고통을 감내하며 얼마간 '유예'되는 삶, 죽음의 연기일지 아니면
나름의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것인지.

죽음과 사투를 벌인다고 하는 치료과정의 끝에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본다.
영원한 삶이 있나? 죽음의 얼마간의 유예와 약물들에 의한 엄청난 고통이 그 댓가일 뿐.

의학은 결코 죽음의 '정복'에 있지 않으며 또한 그럴수도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의학의
발달이 죽음으로 부터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다만, 질병과 그에 따르는 고통으
로부터의 '유예'를 연구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생물은 죽어야만 마땅하다. 세대와 세대를 거듭한다는 것은 결국 전세대의 죽음을 담보
로 하는 것이므로.

지은이가 보아 온 숱한 죽음들에 대한 객관적 진술들은 죽음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촉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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