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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드디어' 또는 '결국' 다 읽었다. 나 같은 의지박약 인생이 재미있지 않은 딱딱한 책을
거기다 두껍기까지 한 책을 완독하기란 쉽지 않다. 전공자도 아닌데 굳이 평론집까지
펼쳐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으나 다 읽은 지금 생각해보면 '괜찮았던'
독서라고 자평한다.
덕분에 관심 대상에 넣은 작가와 시인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메모해 뒀거나 구입 대상이
늘어 났다. 무엇보다 '맛있는'문장들을 많이 음미했다는 것이다. 무수한 독서에서 뿜어
나오는 예시들과 예문들이 부러웠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물론 읽어도 모르는 많은 인용과
이론들도 있었지만.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두껍고 재미없는 평론집이 근 8개월여 만에 5쇄를 찍었다니 이것은 평론가 신형철 개인의
매력일까 아니면 그의 문장과 말들이 갖는 흡입력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의 비평에서 느낄수 있는 '온정'이 아닐까 싶다. 그 온정이 어떤 것인지는
수고롭겠지만 그의 비평들을 찾아 읽거나 본 도서를 일독해야 할 것이다.
수없이 밑줄 그은 문장들 가운데 그나마 읽으면서 적어본 것들이다. 옮겨 놓지 않은 말들은
읽는 이들끼리만 공유하기로 한다.
어떤 비평가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론집도 이만하면 나같은 일반독자가 읽어도 괜찮겠다는
긍정을 한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 5p
몰락인지 알수없지만, 몰락하지 않기 위해 매일, 하루를 쓰는 나날들의 연속선상에서
몰락에 대해 잊고 있던 생각을 들쑤셔 주는 문장을 만났다. 이미 몰락에 대해, 일찍이
새겨 듣게끔 하던 당신의 일성도 생각났었다. 몰락의 진행중이던 깊은 밤 아니었던가.
가까스로 몰락의 현장에서 나는 잠시 이탈해 있지만 몰락은 기정 사실이요 변함없는
의지 아니던가. 몰락해야 드러날 어떤 것이 있다면 지금 기꺼운 마음으로 나는 몰락해
야 하지 않겠나. 물론이다. 그럼에도 몰락을 하루하루 미루는 이 실험은 언제 끝낼것인가.
몰락을 작심하는 순간 많은 것들은 대수롭지않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나르키소스의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호수에 비친 나르키소스의 얼굴이 몰락을 작정한 사람의
얼굴이다. 몰락을 바라보는 일이 곧 자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왜 우리는 이모양인가. 개별자의 내면에 '세계의 밤'(헤겔)이, 혹은 '죽음 충동'(프로이트)이 있기 때문이다. 부분 안에 그 부분보다 더 큰 전체가 있다는 역설, 살고자 하는 것 안에 죽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는 역설 때문이다. ... 덕분에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과연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캉). 그러니 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신경증)은 쉬운 일이고 그것에 삼켜지는 것(분열증)은 참혹한 일이다. ... 말에 배반당하기 때문에 다른 말들을 찾아헤매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 실패를 한없이 곱씹는다. ... 한편 행동이 통제 불능이라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려는 자들이 소설가다. ... -13p
당대적 현실의 세목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 꼭 좋은 소설인 것은 아니다. ... 그 소재가 무엇이건, 도대체가 미학적으로 태만한 작품은 옹호할 수가 없다. ...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이 있다. -23p
강박증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죽어 있는가, 살았는가?"이다. 강박증자는 그 자신의 충동과 향유의 대상에 직면하면 스스로가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향유를 통제하려고 한다. -112p
단편소설에서 반전은 자칫 예상을 깨는 답을 제출하는 데 봉사하는 수수께끼 놀이의 차원에 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기술이다. -125p
"작가는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 소설가 쓰지 히토나리의 매력적인 단언인다. 비어 있는 목적어의 자리에 '윤리'를 넣고 싶다.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우선 도덕이 아닌 그 어떤 것이다. 윤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를 도덕이라는 오염된 문제틀로부터 빼내와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 -142p
아름답지만 위선적인 도덕이 아니라 참혹하지만 진실한 윤리가 문학의 몫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144p
욕망이 고갈된 삶이 고통이라서 앞으로 다가올 죽음은 휴식이 된다. -148p
한유주에게 소설은 '듣는 것'이고, 편혜영에게 그것은 '냄새 맡는 것'이며, 김중혁, 이기호, 김애란 등에게 그것은 '상상하는 것'이다. -172p
... "지금은 서정의 시대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서정성의 메커니즘을 충실히 따르는 서정시가 씌어질 수 있고 또 씌어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미적으로 아름답기는 쉬워도 우리 시대의 진리 혹은 실재에 접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 진정한 진리는 착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진리는 언제나 위협적인 것이다. -185p
자아의 위력이 놀라운 것은 여하한 종류의 타인들에게서도 자신의 거울상을 찾아내는 능력 때문이다. 언제나 자아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이 경우 타인과의 만남을 규정하는 공식은 1+1=2가 아니라 1+1=1이 된다. 이것은 사랑의 메커니즘에 대한 쓸쓸한 설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위 연애시의 성패는 자아가 거울에서 궁극적으로 그 자신을 보는가(1+1=1), 아니면 타인의 타자성을 인지하는가(1+1=2)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다 ... -192p
이 꼭지의 글을 읽고 되새겨 본다. 축약하자면 '뭐 눈엔 뭐만 보인다'라고 하는 말로 대체하면 어떨까 싶다.
개개인인 우리가 타자를 흔히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대상인 타자의 모습에서 사랑하게 되는 건 결국 그 타자에서
읽어내는 나의 모습이라는 것. 나와 다르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망은 성립되겠지만 그 관계망이 철거되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연인들 간의 불화는 결국 서로
'넌 나완 달라' 또는 '나 같으면...'이라는 나르시시즘의 실망일 것이다.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이는
바로 '나'뿐이다. 그러니 자기애自己愛가 강한 사람은 타인과의 '사랑'은 할 수가 없다.
'사유의 논리'가 아니라 '감각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고집스럽게 당당하고 시종일관 읽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 그 감각의 과잉 때문에, 누구든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누구도 김경주를 너무 많이 알 수는 없다. ... 서정적인 구절들에 밑줄을 치는 버릇이 있는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시편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런 독자들에게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불친절하거나 고집스러워 보일 감각의 향연들도 허다하다. ... 그 자신 명료한 사유를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사유가 되려다 만, 사유가 되려고 하는, 혹은 사유의 형식을 이미 초과한 어떤 에너지들이 흘러넘친다. -304p
김경주의 시세계를 저자는 어떻게 보고 있나, 참 궁금했다. 김경주의 시를 이야기할 때 '감각'이 빠지면 말 하지말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명 김경주의 시는 감각적이다. 그 감각에 무릎을 치거나 위안받는 독자가 어느 시집의 독자보다
많았음은 분명하다. 시집이 팔려 나가는 현상이 그것의 반증이라고 본다. 그러나 첫 시집이후 그가 들려주고 있는 많은
말들(시와 산문들)의 색채는 이제 슬슬 바래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의 '감각'에 싫증이 난다는 것이다.
사유가 부족하거나 정제되지 않은 감각들의 한계랄까 그런. 빛나는 그의 감각에 호들갑 떨던 때는 지났다는 것이다(최소
시에서만큼은).
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는 어디를 보는가. 이렇게 '옆'을 본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들뢰즈)
그녀는 '시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부류의 시는 본질적으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 그녀의 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지 말고 그녀의 시와 더불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353~367p
창작자는 작품을 통제할 수 없다. 작품이라는 결과는 창작자의 의도를 초과할 수 있고, 수용자의 해석은 그 결과를 또 한번 뛰어넘는다. 이것은 즐거운 이중의 배반이다. ... 시에서 '나'란 하나의 "닉네임"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를 시인에게로 환원하지 말라는 주문일 것이다. ... 손가락은 지시가 아니라 암시입니다." -372p
『이상 문학전집 1-시詩』(문학사상사, 1989)는 정본 텍스트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오식과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 인용 텍스트로는 부적합하다. -464p
바로 이 전집을 가지고 있는 한 독자로써 뜨끔하지 않을수 없는 지적이다. 한문이 그대로 있어서 읽기가 난해했지만
오식과 오류라니... 물론 내가 연구자 수준의 읽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작년에 뿔(웅진)에서 나온 이상 전집에
관심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