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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 김숨 장편소설
김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밝고 건강하고 건전한 가족 안에는 별로 이야깃 거리들이 없다. 불온하고 기이하고 불행한
가족이라는 공동체만이 이야기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저주스런 원동력이 있다. 그 구성원들의
동의 따위는 불필요하다.
어떻게보면 '가족'소설만큼 뻔한 소설도 없다, 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라고 나는 단정한 사람이다.
개인과 개인이라는 타자가 만나 생물학적인 결합으로 또 하나의 생물을 생산해 내는 합의적인
2인의 공동체가 '가족'이라는 괴물의 다른 이름과 다르지 않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의 가면을
부여받아 뒤집어 쓰게되면 세상 그 어떠한 괴물과도 맞설수 있다. 마치 영화 '괴물'에서 괴물과
맞서는 그 가족들처럼.
여기에 기이하면서도 불가사이한 한 가족이 등장한다. 불과 물, 소금과 금 그리고 공기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정작 이들이 한 가족의 구성원이 맞나싶을만큼 가족이라는 조직에 구속되어 있다는
끈끈함 따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조금은 어거지스럽게 상생과 상극인 원소들의 배치를 가족이라는
집합체 안에 장치한 작가 의도의 적나라함이 쉽게 노출 된다.
7-80년대 가난에 얽힌 가족사에 관한 소설이나 한때 '엄마'에 관한 영화나 소설의 리얼리티를 생각했다면
즉시 이 소설에 관한 관심을 티끌 만큼도 남기지 말고 버리길 바란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동생 이라는 호칭은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신 그자리를 난데없이
불이라거나 물 아니면 공기나 금과 같은 물질들의 호칭이 난무한다. 다분히 의도한 바다. 어찌보면
이것은 위험한 의도일 수 있다. 물과 불을 여자와 남자 아내와 남편으로 배치했을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뻔할수 있다. 그 위험을 알면서도 써먹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자신감일까?
여하튼 시종일관 물질(또는 원소)의 이미지들이 곧 이야기가 된다. 잘 버무리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라 한다면
지루하지 않게 요소요소 뒤섞어가며 이야기는 흘러 간다할 수 있겠다.
이 이상한 가족 이야기의 끝은 도대체 어떻게되는거냐 싶어 빨리 마지막 장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작가가 고백한대로 바슐라르의 사유들이 소설의 일정 부분 동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특별한 서사보다
물을 토대로 한 각 물질의 '이미지 전개'가 이 소설이다라고 한다면 작가의 노력에 너무 가혹한 말일까.
이 책을 처음 펼쳐보면서 스물한 가지의 원소들이 나열되는 프리모 레비의『주기율표』가 떠올랐지만
그런 생각은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주기율표』가 차가운 이성적 소설이라면 『물』은 뜨거운 감성적 소설이다.
물에 녹으면 사라지는 소금이라거나 물에서 나온 소금, 소금을 더욱 소금 답게하는 것은 불이라거나 또는
뉘앙스 적인 차원에서 그냥 '금'과 소'금'이라고 하는 두 물질의 극명한 차이점을 아주 적절하게 배치한 점 등
기발하면서도 재미있는 장치와 비현실적인 공간의 등장은 읽는 재미를 분명하게 주는 것은 틀림없다.
이것에서 만족하는 독자라면 후한 점수를 줄 것이요 그 이상을 원했던 독자라면 뭔가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까 싶다.
궁극적으로 김숨이 이 소설을 쓴 목적(내지는 이유)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 자체가 요즘 시대엔 촌스러운 걸까. =.=
여하튼 『물』이전의 작품은 어떨까 싶고, 그 이야기들 속에는 또 어떤 기발함을 동원했을지 궁금하고 앞으로
지어낼 그의 이야기에 기대를 해본다.
사족을 달자면, 본문 편집을 함에 있어 너무 벙벙한 행간과 들여 쓰기 그리고 필요이상의 행갈이로 인해
작품이 가지는 긴장감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은 출판사 측의 책의 볼륨감 키우기나 아니면 편집상
종이의 대수 맞추기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아쉬운 점이다. 종이도 좀 두꺼운 게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