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이제니 지음 / 창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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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쏘옥 꽂히는 시집을 읽는 밤
말이 말처럼 살아 뜀박질하는 풍경에 나도 덩달아 쿨렁쿨렁
표지의 저 말은 아주 적절하다. 말言을 그림으로 멋들어지게 그려야 한다면
말馬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꽃나무가 수놓인것은 그 말들이
슬픔으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아아 맛있다 말들이 멋있다.

자주자주 등장하는 말떼들, 그러니까 동어반복과 같은. 참 적절하게 반복의 효과를 살려
읽는 맛을 배가 시키고 있다. 수많은 말떼를 거느린 그를 부러워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추운 밤.
나는 그저 달큰하게 더워진 딱 한잔의 정종만 생각날 뿐이고. 그리고 거기다 나도 내 말들을 타고
끝없는 말판을 누비고 싶다면 그건 지나친 욕심인지. 내 말을 갖고 싶다.

실용/경제 서적이 판을 치는 마당에 쓰잘데기 없는 시집을 읽는것은 정말로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받고 먼지같이 지워지다 먼지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43p 는 시인과 다를바가 없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마음이 끕끕한 소금밭 같거나 온종일 슴슴한 눈시울로 버티다버티다 겨우 맞이한 저녁나절
읽어가는 한 편 시 안의 한 문장들이 주는 허무한 위로와 위안의 맹탕함.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시집 한 권 읽는 게 무슨 대수로울수도 없듯이. 내리는 눈송이 만큼 헤아려도 헤아려지지 않는 게
마음이다.

표제작인「아마도 아프리카」와 「고아의 말」 이 두 편을 읽어본다면 이 시집 전체를 아울러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p104「아마도 아프리카」 부분

결국 어미 없이 혼자 서 있는 말
고아의 해변에서 고아의 말을 내뱉으며
혼자 울면서, 울면서 혼자 달려가는 말 -p131 「고아의 말」 부분

드넓은 들판을 누비던 각양각색의 야생마떼 처럼 수많은 말言들을 떼지어 놓았지만 야생마를 떠올릴법한
자유나 야생의 힘은 어디에도 없다. 멀리 있어 어떻게 보면 모호하게 보일법한 것들이 가져다주는 슬픔이
들판 가득하다. 그 들판을 헤매는 자는 고아다. 고아가 들판을 헤매면서 하는 말들이 이번 시집인 것 같다.
당신도 들판에 혼자 서 있는 상상을 해봤다면 어쩌면 이제니의 말들이 당신의 들판을 달리는 소리에 마음이
습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김경주의 첫 시집에서 어떤 '스타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 느꼈던 걸 이제니의 첫 시집에서도 발견한다.
다분히 많은 말을 해버린 김경주가 되지 말고 지금처럼만 이제니의 말들을 키워내주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면서 다음 시집을 기대해 본다. 

아마도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참 멀다. 멀리 있다. 죽기 전에 가 볼일이 없는.
누구처럼 너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볼까, 하다 그만둔다. 그것들도 듣지 못하고 나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보다 말이 싫기 때문에. 

 
나는 지금 죽지 않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 /.../
... 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은 불을 끈 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기체나
액체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사라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실행에 옮기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도 없으면서, 그저 무심코 손톱 끝을 바라보길 좋아하는
무의미한 습관처럼. -p25

  

밤의 공벌레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
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
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
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
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림자 정원사는 내게 말했지
너는 한번 결혼하고 또 한번 결혼하게 될 거야
한번은 너 자신과 또 한번은 네 그림자와 -p71

 

어쩌다 우리는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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