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벽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김석희 옮김 / 마운틴북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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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그럴때가, 그런 느낌이 드는 때가 있지 않던가.
머릿속 생각으로는 이게 아닌데,라는 목소리가 분명한데 그 목소리를 객관화 시키는 나는
그 아닌 곳으로 뭔가에 이끌리듯 그 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경우. 내 의지이기도
하면서 의지라고 할 수는 없는.
그런걸 운명이라고 해야하나. 거기에서 한참 지나 그때를 생각하면, 아 그때, 하게 되는.

인간은 어느 시기가 되면 자신을 믿지 않게 된다. -94p

우오즈, 미나코, 고사카. 그들 인생의 한 순간에서 그 어쩌지 못하는 불가해한 끌림에 끌려간
순간들의 이야기 쯤 이라고 해두자. 넘어선 안되는 것을 더 넘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면 
불행은 결국 인간에 내재하는 건가.

어쩌면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불행하긴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를테면 판도라의 상자를
손에 쥔 인간이랄까. 열어서는 안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결국 열고 마는 게 인간이고 만약 열지 
않는다면 영원히 상자를 버리지 못한 채 갇혀버릴 것이다. 

문제는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 아니겠어? 자제할 수 있다면야 아무 문제도 없겠지.
하지만 꼭 자제해야 할 때 자제할 수 없는 게 인간이야. 사실 말이지 자기 자신이란 건 별로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94p

고사카 역시 미나코와 안된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포기하는 게 안되는 것. 그게 운명이라면.

"난 안 돼." -102p

























우오즈 역시 머리로는 미나코와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엔 알게 모르게 미나코가 와 있었다.
미나코는 어떤가. 그녀 또한 다를바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산에서 일어난 사건과 함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타며 전개된다.
두툼한 분량에 비해 빨리 잘 읽히는 건 행 간을 시원하게 편집한 영향도 있겠고
무엇보다 어떤 결과가 날 것이며 과연 짐작이 맞을것인가와 같은 호기심을
쫓아가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 때문일 것이다.

1957년에 발표된 작품이기 때문에 현재의 감각이나 감성으로 읽어보면 조금은 아쉬운 부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이 풍기는 감정코드가 영 맞지 않아 일본 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일본인 특유의 가치관이랄까, 뭐 그런 것들.

몇 년째 책꽂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작품을 별 생각없이 뽑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막힘없이 빠르게 읽었다. 딱 그 정도.
마흔 넘어 등단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작가의 이력이 눈에 띈다.
표지 디자인이 참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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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흡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5
리카르도 피글리아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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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와 돈크라이포미~ 밖에 아는 게 없는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시절에 출간된 이
작품은 당시의 폭압적 상황 속에서 살았던 외삼촌을 찾아가는 여정과 그 주변인물들의 이
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 1부와,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쏟아내는 아르헨티나 문학에
대한 그럴듯한 진짜같은 문학담론이 백미라고 할 수 있는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좀 지루했다. 또 포기할 뻔 했다는 뜻이다. 겨우겨우 1부를 읽고 이걸 더 읽어야하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포기했으면 큰일날뻔한 작품이었다.

히틀러, 카프카, 비트겐슈타인, 제임스 조이스 등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2부는 정말
압도적이다. 내용은 당연히 그럴듯한 '뻥'이지만 이거 정말 그럴듯한데? 할만큼 귀가 솔깃
눈이 번쩍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들이지만 보르헤스, 제임스 조이스, 카프카 등을 읽어
보고싶게 하고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는것 같다. 그리고 아를트와 보르헤스를 비교하고 아를
트의 문학이 왜 현대적인것인지 설명하는 렌시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독서의 재미를 선사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것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의 의지는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하찮은 우연으로 인한 인간의 삶은 인간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 흘러
가는 것인지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패자'들에게 심취하게 됐다는 타르텝스키의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니 좀많이 거슬리는 건
간접화법의 문장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그가 말했다,> 같은 화자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읽는 리듬을 딱딱 끊는지 정말 짜증이 날 정도다. 이게 원래 작가가 그렇게 썼겠지만
번역상 의도 또는 번역의 한계라면 정말 안하니만 못한 부분인것 같고 원본도 이렇다면 아르헨티나어
특유의 말버릇인건가 싶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번역자도 여실히 느꼈을 텐데 이정도는 부드럽게
수정해줘도 괜찮은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 부분을 수정한다고 전체 작품의 의도가 훼손되는 건
아닌것 같다. 정말 짜증 제대로였다는!!!

그리고 필요 이상의 각주. 어떤 각주는 꼭 필요한 것도 많았으나 단순 사실의 설명에 그친 각주 또한
많아서 이 역시 읽는 리듬을 따박따박 깨고 있다는 사실.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러하지만, 남미 소설도 메모를 해가면서 읽어가야 한다.
특히나 등장인물이 많고 혈연으로 엮여있거나 하면 가계도를 그려가야 한다. 저 유명한
『백년 동안의 고독』의 가계도를 생각하면 쥐난다... 다행히 등장인물은 그리 많이 나오
지 않으셨도다...

솔직히,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낸건가 싶다. 남미 소설은 각 나라의 문화 역사 경제 등이
너무 낯설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이라면 뭔가 가까운게 아닌가 싶지만 남미는...
이런저런 소개와 귀동냥으로 남미 작가들의 작품을 몇 읽기도 했지만 임팩트는 미미했고
역시 남미쪽은 내게 맞지 않아, 하는 부정적 이미지만 쌓여갔다.
마르케스, 보르헤스 같은 작가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을것 같기도 하다. 몇번 시도
했으나 번번히 실패. =.=
리카르도 피글리아 역시 남미 작가여서 과연 내가 읽어낼 수 있을까 이번에도 포기하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집어들었던 게 사실이다.
읽어 볼 마음이 생겼다면 1부는 진득하니 읽어나가시라. 2부를 기대하면서. 실존했던 작가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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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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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셋

'너'라고 부를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고독하다
내가 너라고 부르는 네가 너의 너라고 하는 대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두 불행하다

굳이 소설을 들추지 않아도 불행했던 세 명의 연인들은 비극을 살았고 그들을 등장시킨
소설 역시 많다. 작가들의 형형색색 변주에 따라 그들이 위로 받기를 바란다. 그들의 비극으로
우리는 우울한 행복감에 빠지기도 하니까.

씨안이 본 영화가 소설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면에선 너무 선명하게 이야기해 버린 건
아닌지 좀 아쉬운 부분이다. 그 영화에 대한 부분을 읽다보면 아 이런 소설이구나, 맥이
좀 풀렸다고나 할까.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독자를 잘 끌고 나가긴 했다.
문장들이나 전개과정을 보면 꽤나 공을 들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책 뒷편에 평론가 정여울도 언급했지만 '셋'에 관한 박솔뫼 식의 소설인 것이다.
박솔뫼는 하얀 도화지에 굵은 4B연필로 인물의 윤곽 정도만 그리면서도 이야기는
또렷하게 읽히게 했다는 점에서 수상작이 되었을 것 같다.

셋에 관한 유사한 많은 작품이 있겠으나 신경숙의『깊은 슬픔』이 생각났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너는 또다른 곳을 바라본다던가 뭐 그런 문장이 있었을 것이다.


2.을

인간관계에서 절대적인 갑 절대적인 을의 위치에 있는 경우는 없다. 관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을의 위치에 있는 연인들은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주이 처럼.
비극은 거기에 있는 것이지만.

교묘하게 노'을'이라는 작명을 했지만 노을 보다는 '을' 이야기를 해야한다.
을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갑이 하는 사랑과 을이 하는 사랑은 다르다. 갑과 을이 서로 사랑한다해도 그 사랑의 무게추는
한쪽으로 기우는 게 사랑의 속성이다. 관계의 속성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이 '더' 하게 마련.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을'의 입장이다. 을 위에 있는 갑이 아니라 갑의 밑에 있는 을.
'노을'도 을이며 '민주'도 을이다. 민주는 노을에게 있어선 갑일지 모르겠지만 윤에게 있어서는
민주도 을이다. 프래너 주이 씨안 모두 상대적으로 을의 사랑을 했다고 본다.

삼각형은 가장 안정된 도형이겠지만 세 연인은 가장 불안할 것이다. 그리고 불행할 것이다.
'을'의 이야기와 '셋'의 구조가 잘 엮인 소설을 만났다.
군더더기 없는 작품을 써낸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진다.




이제 그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났고 서로 잊는다.
여행객들을 상대로하는 호텔에서 만났던 그들이 캐리어를 끌고 아니면 간단한 여행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모두 이름을 잃는다. 민주가 507호 남자가 돼버린 것처럼.
내가 당신(들)과 맺는 관계 또한 그렇다. 그러하기를 나는 바라는 사람이다. 민주가 떠난
507호에 을이 떠나기 전에 방문할 수 있다면 흔한 여행객이 되어 507호의 남자가 되는 여행을
떠나 영원한 여행생활자가 되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 여행이 있을까. 내가 나의 무늬를 잃는 여행.


하루키 이야기를 듣고 읽기도 해서인지 씨안이 자주 올라가던 옥상 장면에서
상실의 시대의 그 옥상이 생각나기도 했다.


*본문 급수가 작아서 보는 내내 눈이 피로했다. 확실히 여타 소설보다 글자들이 작고 작다보니 좀 희미한
감이 있다. 왜 그렇게 편집을 했을까? 개인적 시력의 영향인가? 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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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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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와 미셸, 두 형제 개인의 영역과 개인이 살아냈던 시대의 철학 과학 예술 사회 등을
망라햐여 지어낸 걸작이라 하겠다.

개인의 무기력함이나 결정론적 운명관은 곧 인류전체의 열등함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면
산다는 건 절망적일수밖에 없다. 그러한 절망적 정황들을 겪어내고 있는 게 대부분 인간들의
삶이겠지.

「나도 자아가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그래서 고통이 사라질 수 있다면
좋겠어. 하지만 자아가 환상이라 해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인걸…….」
-73p

브뤼노를 중심으로 하는 욕망과 쾌락의 질주, 극단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미셸의 고독한
삶은 모든 현대인들의 모습과 다를바 없다.

결국 소설이 제시하는 나름의 해결책과 그에따른 미래에 대해 나는 긍정의 편에 서고 싶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아닌 그곳은 정말
'멋진 신세계'일까? 가능하다면 그 세계에서 살고 싶기도 하다만 너무 멀거나 영영 안오지 싶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136

두 개의 소립자가 결합되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가 형성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한 몸에 관한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187


대부분의 독자들이 짐작하듯이 소립자는 각각의 개인을 뜻한다고 본다.
소립자를 개인으로 바꿔 읽어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가늠할 수 있다. 뒤집어 본다면 이런 이야기도
되는 것이다. 브뤼노가 그의 아들을 바래다주며 느끼는 절망감 같은 것도 같은 이야기다.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브뤼노는 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음을 알고 절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셸은 결국 하나의 통일체라고 할 수 있는 2세 생산에 실패한다. 그는 한 몸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이나 사랑에 관심도 없었으며 이루지도 못했다. 미셸의 연구결과가 그의 사후에
만들어 놓은 모습은 당연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나는 찬성하는 바이다.

결국 그렇게밖에 안되는 삶을 살아버린 두 형제의 모습을 쫓아가면서 드는 안타까움과 씁쓸함은
지금 우리가 내가 살아가고 살아갈 모습의 적나라함 때문이겠지.


꽤나 오래전에 무슨 이유로 질렀는지 모르겠고 몇 년 전에 좀 읽다가 말았다는 기억도 없이
다시 집어들었더니 어느 페이지 어떤 문장엔 밑줄도 그어져 있다. 책은 일단 당장 읽든 말든
삘이 꽂혔을 때 일단 질러놔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역시나 요즘 판형 책값이 많이 올랐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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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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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영화 '파이란'에서 장백지가 최민식을 부르는 음성이 읽는 내내 귀에 걸린다
"강재 씨..."

은교가 무재를 부를 때 마다 장백지의 음성이 덫입혀져 들리곤 했다
무재 씨...


2
황정은을 처음 읽는다
아마 k군?의 소개가 아니었나 싶다 그게 2년 전 쯤인가 보다
앞부분 조금 읽어나가다 덮어두고 요즘 일독했다 책과 독서란 것도 궁합과 때가
있긴 있나보다. 읽으려고 해도 읽히지 않는 때가 있고 스르르 다가와 살갑게 읽히는
때가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책에는 특별한 서사(란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서 쓰기 싫지만)는 없다 어쩌면
그래서 (읽고 나서)끌리는 작가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소설이나 작가가 대중적
인기는 없겠지만 다소 지루하고 따분한 감도 있지만 그런것이 좋으니 어쩌랴
최근에 출간된 황정은의 소설집도 읽어보아야 하겠다


3
조곤조곤
작가의 입술 또는 입을 본 적 없으나 그가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있는 입을 생각하면
조곤조곤 이라는 낱말이 딱.

나도 작가를 따라서
조곤
조곤
조곤
...


좀 이상하긴 하다


아주 차분해서 마치 진공의 구 안에 사는 어떤 사람들의 세계속 이야기랄까
무재와 은교가 나누고 건네는 대사의 뉘앙스가 인상적이다 그런식으로 배치한 작가의
의도 또는 작법이 소설의 전체 분위기를 끌고 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철거예정인 건물의 분위기나 등장인물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

그림자가 일어난다니?
다소 황당하다고? 그렇지 않다. 그림자가 없으면 귀신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보더라도
그림자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미는 절대적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그림자에 알게 모르게
지배받고 있다고한다면 억측일까? 아님 말고. 난 억측이 아니라고 보는 바.

그림자가 나를 데려가고 나는 그림자에 홀려 따라가고.
누구나 자기가 자신의 주체라고 여기지만 때론 자기 자신도 주체되지 못하는 자신을 따라
자기를 파괴해 버리는 일. 자주 듣는 일들 아니던가.
그림자를 따라가면 안된다는 외부의 충고는 무의미하기에 내 안에서 마음이 일어나
그 마음을 따라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강 한가운데까지 다리를 따라 걸어가고 하는 일.
그림자가 일어나는 일과 같은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아님 말고. ㅋㅎㅎ

그림자는 어둡다. 마음 한 켠 땅거미가 깔리듯 어두워지기 시작한다면 그림자가 일어날 것이다
당신이든 누구든.

어두운 마음을 응시한 시간이 참 오래 돼기도 했다는 생각이다. 갈수록 너무가 쌓인다. 너무 쌓인다.


4
은교와 무재.
세상엔 그들과 같은 연인도 있을 것이다. 아니 꼭 있기를 바란다.
은교가 부르는
무재 씨
무재가 부르는
은교 씨

모르긴 해도 같은 톤의 두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딱 그럴것이다
그런 연인들이 있다면 부디 행복하시라


은교와 무재가 있음으로 소설의 이야기가 존재키는 하지만 따지고보면
주인공은 없다 '百의 그림자'는 아주 공평한 소설이다 비록 소설 속 상황은
공평하지않지만서도. 무슨 말이냐
은교는 은교의 이야기를 하고 은교가 아는 사람들을 조곤조곤 친절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너 따위는 대략 생략하겠어,가 아니라는 말이다,라고 하면 언더스탠?


5
지금은 가동 나동 다동 라동 마동 모두 철거가 됐겠지
여 씨 아저씨 공 씨 아저씨 유곤 씨 오무사 할아버지 은교 씨 무재 씨 ...
그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거기 한번 가봤을텐데 무재 씨가 은교 씨를 부르던 목소리

은교 씨

하고 부를 때 먼 데서 한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타인에게 무관심한 누군가는 '슬럼'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들처럼 자꾸만 외곽으로 가야하는 사람들의
무거운 그림자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
그런데 나는 영화 파이란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스치듯이 본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짧게 나오던 장백지의 음성 한 조각이 어딘가 떠돌다가
불쑥 귀에 내려앉았을 뿐이다
이유 같은 게 있을리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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