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린 울만 지음, 이경아 옮김 / 뮤진트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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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보니 아버지 나이 48 엄마 나이 27

나의 엄마는 4.5번째 아내였다

최고의 영화 감독 아버지

최고의 여배우 엄마

 

린 울만의 소설 <<불안>>을 읽기 전에 몇 가지 검색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책 뒷표지에 실린 첫 문장 때문이었다

 

스웨덴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과 노르웨이 배우 리브 울만

이 위대한 예술가들을 부모로 둔 여자아이

 

물론 이 말은 사실이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검색해 보면 쉽게 확인이 가능한데 그의 부모는 그야말로 대단한 유명인사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가 바로 이 소설의 작가 린 울만이고

자신의 부모에 대해 쓴 소설이 이 작품이다

 

그렇다면 소설 <<불안>>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인데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부터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존 인물들-부모님이나 아이들, 연인들, 친구들, 적들, 형제들, 삼촌들, 이따금 지나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글을 쓰려면 그들을 허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기억하는 것은 다시 또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매번 똑같이 경탄하는 행위다. /.../ 하지만 어떤 일은 아마도 내가 지어냈을 것이다.

373~374p

 

아버지가 일정표에 내 이름을 쓰는데 손이 떨린다. /.../ N 하나, N 하나, 자 끝났다.

484p

 

참고로 작가의 이름 철자다. Linn Ullmann



우리가 소설을 읽는다고 할 때는 작품에 속아야만 한다. 속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따지고 드는 건 비평가들이나 할 짓이고 소설을 읽는 독자의 바른 자세는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읽다보면 이 부분은 경험하지 않았다면 못썼겠다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런 부분이 이 소설을 읽는 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드러내서 좋을 게 없어 보이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시시콜콜한 모습들과 카세트테잎 녹음 작업을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 속의 감정 부침들이 그러했다.

 

 

자식들은 부모가 전매특허처럼 쓰는 단어와 표현을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식은 부모가 입버릇처럼 쓰는 말들을 알기 마련이다.

396p

 

 

이 소설은 반전이 있다거나 하는 소설은 아니다. 줄거리라고 해봐야 어린 여자아이에서부터 아버지의 사망 후까지 양친에 대한 담담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읽게 하는 힘은 사실적 기억이든 왜곡된 기억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라는 공통적 기억 가운데 다른 집 부모와 자식은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소설 속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냥반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는 성격과 지위의 소유자들이다.

그 두 인물을 검색하다 본 것 가운데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지독하게 영화를 찍는 것 때문인지 악마 감독이라나 뭐라나 그런 말도 있었고 배우 리브 울만에 대해선 실생활에서 대단히 잘 웃는 놀랍도록 쾌활한 사람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소설 속에서 그 딸이 이야기하는 어머니 리브 울만은 결코 쾌활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다. 물론 사람은 자신의 위치마다 꺼내 쓰는 가면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부모님이 /.../ 아이를 키우는 법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크면서 깨달았다. 자식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분명 사랑하셨다. 내 말은 양육에 대해서 몰랐다는 뜻이다.

396p

 

 

주인공인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나이는 마흔여덟이었고 어머니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거기다 결과적으로 보면 내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어머니는 다섯이며 나는 여덟명의 형제 자매가 있다. 그리고 나의 친어머니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어머니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정식 결혼 관계가 아닌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식인 것이다. 모계 성을 따르고 있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앞서 올린 책보관함 영상에서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 같은 걸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때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언급하며 나름 이 소설에 대한 기대 또는 나름대로 짐작한 게 있었다면 그것과는 좀 다르게 전개가 되었다. 뭔가 극적이거나 반전이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주 냉소적으로 흐르거나 할 줄 알았다.

만약 이 소설이 완전한 픽션이었다면 그게 가능했을 것 같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나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부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점과 맞물릴 수도 있는 아쉽다고 해야할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점은 <<불안>>이라는 소설의 제목이다.

 

원제 Unquiet [형용사] 침착하지 못한, 불안해하는, 동요하는

 

불안이라고 번역한 제목이 틀렸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불안이라고 하면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적 느낌의 용어 같아서 소설 제목으로써의 맛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이라는 말은 너무 의미가 넓고 큰 말이 아닐까 한다.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직접 불안을 언급하는 몇 문장을 옮겨와 본다

 

왜냐하면 아침이 다가올수록 더 불안해지거든. 121p (아버지의 말)

아버지는 작별 인사를 하면 밤에 잠을 이룰 수 없고, 불안과 위통이 생긴다. 129p (어린 주인공의 말)

엄마는 곧 떠날 것이다. 캐더린은 공포의 의미를 모른다. 303p (어린 주인공의 말)

물론 엄마를 잃을까봐 두려운 마음은 그대로였다. /.../ 내게 이런 일들을 억지로 시키는건 내 망상이라는 걸 나도 알았다. 314 (어린 주인공의 말)

눈앞에 떠오르는 나는 너무 큰소리로 말하고 너무 빠르게 걸으며 상대해 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불안에 집어 먹힌 여자다. 389p (중년의 주인공의 말)

 

불안의 극단까지는 아니라도 좀 더 깊은 불안의 심리나 상황들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제목과 어울리는 소설이 아니냐는게 내 생각이지만 제목을 지우고 읽는다면 작품의 전체적인 균형은 잘 잡았다고 본다. 자극적 소재나 대단한 반전이 당연시 되는 세상의 유행에 젖어 이거 아니면 저거여야 한다는 식으로 편향된 내 성격 탓일 수도 있겠다.

 

소설의 제목을 소홀히 여기는 작가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린 울만 역시 아무렇게나 제목을 Unquiet 로 짓지는 않았을 것인데 솔직히 나는 이 소설이 불안에 대한 소설인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불안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선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제목 따로 내용 따로인 소설들도 많다는 것을 잘 안다. 책 보관함 영상에서 제목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듯이 만약 제목이 <<불안>>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눈여겨 보지도 읽지도 않았을게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제목에 대해 투덜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론 바로 그 제목 때문에 낯선 작가의 소설을 만났기도 했으니 잘 지은 제목인건가?(이 뭔 뜬금없는 소린지)

 

늙어가는 건 일이다. 늙어가는 육신이 뇌를 고분고분 따르도록 설득하고, 결과적으로 뇌가 그 자신에게 고분고분 따르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363p

 

총평

 

자전소설의 한계라느니 제목이 마음에 안든다고 떠들었지만 그런 점들은 괜한 트집일 수도 있을만큼 독서욕구를 끝까지 이끌고 가주었다. 독특한 소재는 아니지만 픽션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독특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자식이 그 부모에 대해 차분하게 써나갔다는 점이 장점이자 매력으로 읽혔다. 지독하게 깐깐하고 고집스럽던 아버지가 치매증상을 보이고 사망하기 까지 그 옆에서 지켜보는 자식의 심정을 잘 그려냈다. 그런 점에 끌리는 독자라면 충분히 읽어볼만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허구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로써의 두 유명 인사의 개인사나 가족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더욱 추천할 만하다 하겠다.

 

 

오자 몇 개

 

227~228p 묵는다 묶는다 혼용

268p 밑에서 첫 줄 딱 한 번 나는 프렌치 양'' ->

301p 위에서 첫 줄 전에 한 번 들''라고 -> 들르라고

411p 밑에서 첫 줄 엄마는 내가 파리'' 가기를 원치 -> 파리''

441p 밑에서 셋째줄 돌아''기를 -> 돌아''기를

490p 위에서 10행 스위치를 킨다 -> 켠다

14행 스위치를 켠다 -> O

15행 스위치를 키면 -> 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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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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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은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원본과 편집본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작품 내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편집 과정에서 일어난 작품의 분량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원본이라는 건 작가 자신이 탈고를 마쳐서 출간한 상태의 판본이고

편집본이라함은 카버의 전담 편집자 고든 리시에 의해 수정되어 출간된 판본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우리가 읽는 소설은 작가가 쓴 최종 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일반 독자인 우리는 그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기회는 없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한 책이 있다. 지금 살펴 볼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이 바로 그것이다. 원본과 편집본이 정식으로 출간되는 경우는 진짜 희귀한 경우가 아닐까 싶은데 완전 대박인거다.(나만 그런가?)





레이먼드 카버는 단편 소설로 유명한데 그의 단편을 읽다보면 짧아도 너무 짧아서 서너 페이지밖에 안되는 것을 읽고나면 이게 뭐지 스러울 때가 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작스레 끝난다든가 뭔가 상황 전개가 이상하다든가 등등 설마 작가가 이렇게밖에 안썼을까 싶을때가 있는데 편집자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판본을 읽어보면 좀 이해가 된다

어느 판본의 우열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궁금하다면 직접 비교 독서를 해보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술안주거리로 참 좋을 법하다.


참고로 여겨두어야 할 것은 원서가 아니라 번역된 판본에다가 역자 역시 다르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럼 한번 살살 털어보기로 하자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레이먼드 카버 전집 가운데

2005년 출간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들10년 후

2015년 출간된 풋내기들이 두 권을 비교해 볼 것이다.


카버에게서 원고를 받은 편집자는 원고의 거의 50%를 쳐내고 출간했다고 한다.

단순하게 책의 전체 페이지 수를 비교해봐도 알 수 있는데 각각 248p456p

거의 200여 페이지 차이가 나는데 만약 여러분이 작가라면 어떤 기분일까


다음 화면은 각 단편들마다 비교해 보고 정리해봤다

편집자본과 원본의 각 단편들의 변화된 페이지 수를 주시해보면 된다

빨간색 밑줄이 쳐진 것은 절반 이상의 차이가 나는 작품들이고

초록색 밑줄은 그보다는 차이가 적지만 무시할 수 없어서 표시해본 것이다



편집자본의 <목욕> 같은 경우는 15p인데 원본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48p 하고도 5줄이다. <목욕>의 이야기가 끝나는 부분 이후 약 25페이지 분량을 편집자가 삭제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당신이 만약 소설을 써보고 싶다면 어떤 부분이 군더더기 같은지 이런 비교를 통해 조금의 힌트를 얻을수 있지 않나 싶다. 고든 리시라는 내노라 하는 편집자가 거추장스런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했는데 삭제된 부분을 찾아봄으로써 늘어지는 정황과 표현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습작기의 소설들이 재미가 없거나 지루한 이유다. 소설을 썼지만 소설이 아니기도 한 것이다.


작품을 직접 쓰는 사람은 주관적으로 몰입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거리두기에 실패하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최초 독자는 작가들의 지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타인들에게 읽혀보거나 글쓰기 수업에서 합평을 거쳐 의견을 들어보는 과정을 통해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군더더기를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편집자본과 원본 가운데 편집자본이 항상 더 나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반드시 작품에 대한 조언이나 편집자의 의견대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두 가지를 비교해 가면서 읽어야 하느냐고 한다면 내 대답은 글쎄요 다

어느 쪽을 읽든 모두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이니까.


한가지 더 비교해 보자


<미스터 커피와 수리공 양반> <다들 어디 있지?>의 첫 문단을 비교해 본다

여섯 페이지와 스무 페이지, 이 작품도 거의 3배의 분량 차이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원서의 문장을 모르는 상태에서 역자도 다른 번역본으로 비교를 한다는게 적절한 비교는 아닐 듯 하지만 가볍게 한번 비교해 보자


번역 문장의 차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도 한번 비교해 봤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번역의 차이가 아니라 원서의 차이로 인해 다른 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금요일 정오에서 금요일 밤으로 바뀌었고

마흔넷이라는 나이가 쉰넷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는 오리지날 원고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오탈자를 고쳤다는 편집자 서문을 참고하면 될 문제 같다.


이런 식으로 원고의 분량을 기준으로 하는 기계적인 비교를 재미삼아 해봤다

축소 편집된 원고와 오리지날 원본과의 비교를 통해 작품 내적인 변화랄지 아니면 의미의 변화 같은

심층 분석까지 할 깜냥은 없는 사람이라 거기까진 살펴보지 못했다.

소설 읽기와 쓰기에 한층 더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비교를 통해

의외의 쏠쏠한 재미와 지식을 얻을수 있을 것 같다.

땡기는가?

땡기면 한번 땡기시라!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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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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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느날은 인생이 싫은 날도 있다

그럴 때 누군가는 쏘주를 마시기도 하겠고

또 어떤 누군가는 지독하게 싫은 인생에서 그만 퇴장해버리기도 한다

그 어떤 결정을 하든 인생의 주인은 각자이므로 각자의 결정이 있을 따름이다

개중에 어떤 이는 괜히 서점가를 서성이다가 시집 한 권을 들고 오기도 한다고 내게 얘기 했다


잔소리 그만 하고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라는 시를 일단 읽어 보자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턱이 내려와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잠시 머물게 된 이 바지 안에서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또 다른 세월이 기다린다니!’

우리 부모님들은 돌 밑에 묻히셨다.

부모님들의 서글픈 기지개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형제들나의 형제들은 온전한데,

조끼 입고 서 있는 나라는 존재.


나는 산다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삶에는 나의 사랑하는 죽음이 있어야 하고,

커피를 마시며 파리의 무성한 밤나무를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이거와 저거는 눈저것과 이것은 이마...’

그리고 이렇게 되풀이한다.

그렇게 많은 날을 살아왔건만 곡조는 똑같다.’

그렇게 많은 해를 지내왔건만항상언제나...’


아까 조끼라고 했지부분전신,

열망이라고도 했지. ‘울지 않으려고라는 말을 거의 할 뻔했지.

저 옆 병원에서 정말 많이 아파서 고생깨나 했지.

내 온몸을 아래에서 위까지 다 훑어본 것은

기분 나쁜 일이긴 하지만뭐 괜찮아.


엎드려서 사는 거라 해도 산다는 것은 어쨌든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그리고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언제나항상항시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2017년 가을 어느날, 더 정확히 말하자면 98일 그날의 날씨는 좀 흐렸거나 다소 쌀쌀했다. 시집의 제목만 보고 냅다 서점으로 달려가 시집을 구입하고 찾아간 카페에서 허기진 듯 여기저기 페이지를 훑어봤던 기억이 고스란히 sns에 남아 있다.


산다는 것이 항상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때론

자기를 향해 한 방 쏘고 싶을만큼 인생이 싫은 날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가하면

엎드려 사는 거라 해도 사는 건 기분 좋은 일이라고

어찌되었건 저 앞에서 세월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고도 하니까

이 시를 어떤 시선으로 읽을지는 독자의 마음에 따라 달렸다

이렇게 읽어도 되고 저렇게 읽어도 된다

살기 싫을 때 읽어도 되고 살아볼만하다 싶을 때 읽어도 된다


시인 세사르 바예호는 1892년 페루 광산촌 산티아고 데 추코 출생이다

첫 시집으로 검은 전령이 있고 대표작으로는 트릴세가 있다.

파블로 네루다와 동시대 시인이기에 두 사람은 곧잘 비교 되기도 했는데

네루다는 바예호에게 바치는 송가에서

하늘과 땅, 삶과 죽음에서 두 번이나 버림받은 내 형제라고 바예호를 추모했다.

193846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는데 어쩌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 했는지 모른다


흰 돌 위의 검은 돌이라는 시에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파리에서 죽겠다 /.../

어쩌면 오늘 같은 가을날 목요일일 거다 


라고 했는데

1938415일 목요일 파리에서 의식불명 상태가 되며 금요일에 사망했고 비가 내렸다고 한다.


지금 소개하고 있는 선집은 1998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시집의 개정증보판이다. 그당시 외환위기의 국내 사정을 생각해 그나마 밝은 제목으로 정했다고 하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역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나 이번 개정판에서는 스페인 내전을 가장 생생하게 그린 시집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의 전편을 번역하고 수록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한다.


다음은 첫 시집 검은 전령에 수록된 아가페라는 시를 소개해 본다


아가페


그 누구도 오늘 나에게 물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 오후에 그 아무것도 내게 청하지 않았습니다.


찬란한 빛의 행렬 아래에서

단 한 송이 묘지의 꽃마저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너무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음을 용서해주세요.


이 오후에, 모든 이들은

내게 묻지도, 청하지도 않은 채 지나갑니다.


저들이 잊은 것이 무언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손에서는 남의 것처럼 이상합니다.


밖으로 나갔습니다.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고 싶어서요.

여러분이 잊은 거, 여기 있어요!


이 인생의 오후에는 사람들이 왜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내 영혼은 남의 것이 됩니다.


그 누구도 오늘 제게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나는 너무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습니다



책 뒷표지에 체 게바라의 유품 녹색 노트에 가장 많이 필사된 시인이라는 카피가 눈길을 끌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띠지 카피 또한 와닿는다.

한편 미국 소설가이자 시인인 찰스 부코스키는 바예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우리는 대부분의 예술에 넌더리가 난다. 바예호는 예술가로써 쓰지 않는다.

그는 한 인간으로 쓴다.


다음은 사후에 출간된 유고 시집 인간의 노래에 수록된 시다



파리, 193610


이 모든 것에서 떠나는 유일한 존재는 나.

이 의자를 두고 떠나리. 바지도 두고,

나의 위대한 상태, 나의 일도 접어두고,

산산조각이 나서 갈라져버린 숫자도 두고.

이 모든 것에서 떠나는 유일한 존재는 나.


엘리제 궁전 앞의 거리, 달나라의

이상스러운 거리를 한바퀴 돌면서

내 주검은 떠난다, 내 요람도 떠난다.

사람들에 에워싸인 나처럼 생긴 인간은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한바퀴 돌면서

그림자를 하나씩 둘씩 떠나보낸다.


나만 모든 것에서 떠난다. 나머지 모두는

알리바이 때문에 남아야 한다.

내 구두, 구두의 입, 구두에 묻은 진흙,

단추가 채워진 내 셔츠의

접힌 소매까지도 그대로 남아야 한다.



가까운 지인이나 누군가의 죽음으로 우리는 부재라는 느낌을 알게 된다.

그 부재의 대상을 바로 자신으로 상정해보면 이 시에 한발짝이라도 더 다가가는 읽기가 될 것 같다. 특히나 마지막 연의 두 행


단추가 채워진 내 셔츠의

접힌 소매까지도 그대로 남아야 한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얇은 종이에 살을 베이는듯한 그런 서늘하면서도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걸치고 있는 옷가지에서 몸만 유령처럼 빠져나가고 남은 옷가지가

텅빈 벽에 걸려 있고 시인의 시선은 주인없이 접혀진 소매자락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해보자면 죽음이란 그리고 부재라는 상황을 이렇게 선명하게 쓸 수가 있나 싶다.


시 한 편이나 시집 한 권의 물질적 환산 가치가 얼마나 될까 하면

아무렇지 않게 사마시는 커피 한 잔보다 훨씬 못하다거나 그것도 양호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도 맞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곱만큼의 물질적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괜한 시간 낭비 인생 낭비라 해도 시를 읽는 사람은 읽는다. 제목처럼 인생이 뭣 같은 날 그 어떤 시집이 되었든 시집 한 권을 골라 들고 아무 쪽이나 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다고 뭣 같은 인생이 더 뭣 같아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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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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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말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 같다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제목으로나 연극 홍보 포스터를 통해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가 1952년에 쓴 희곡으로

베케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의 내용은 큰 줄거리랄 것도 없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라는 두 남자가 나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번씩 고도는 언제 오느냐고 하는 게 거의 다다.

사이사이에 이어지는 이야기에 독자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작가도 자신의 작품에 의미 없는 문장을 쓰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노벨상까지 타게 한 작품인데

허투로 쓰인 부분이 있을까 싶다.



초반에 나오는 한 장면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죄수에 관해 복음서에 그걸 기록한 이야기인데 그 어떤 이야기를 창작해 쓰거나 인용할 수도 있는데 왜 하필 그 이야기를 할까 짐작해 보는것도 고도를 기다리며가 가진 흥미로운 점 중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무엇인지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고도에 관한 큰 줄기만 있는 작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Godot의 어원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려 해보았는데 이를 두고 베케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품에서 신을 찾지 말라. (...) 여기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연극 관람이 아닐까 싶지만 희곡으로 만나보아도 그 의미망은 접할 수 있다.

 

나는 문학작품을 크게 나누어 볼 때 !(느낌표)를 주는 작품과 ?(물음표)를 주는 작품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물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주거나 아무것도 주지 않는 작품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물음표를 주는 작품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 가운데 고도를 기다리며는 결국 풀리지 않는 물음표를 던지는 작품이기에 오래 기억에 남은 작품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거나 연극을 보고난 후 고도의 정체에 대해 왈가왈부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흔히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고도의 정체보다 그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그 상태에 대해 생각을 골몰하곤 했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과 타자 그리고 세계를 의식하면서 시작되는 이성적인 기다림도 있겠고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기다림도 있다. 일단 먹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먹을 것이 입에 들어오기 까지의 기다림이 최초의 기다림에 관한 느낌이 아닐까 싶고 그것에서 시작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기다림과 동거하며 산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이 그 기다림이 되기도 한다.

고도라는 이름에 그 무엇을 대입하더라도 당사자에겐 모든 것이 고도가 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고도가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 각자는 고도라고 부를만한 무언가를 가져야 하는가. 또는 기다려야 할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다.

그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존재로써 다만 존재 그 자체로써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물음표을 새겨 본다.

 

누군가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라거나 자다가 봉창 두드리고 앉았네 하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고도가 오거나 말거나 고도란게 있거나 말거나 나는 씨나락이나 까면서 봉창이나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짧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작품이 가벼운게 아니다. 느낌표 가득했던 작품이라면 그 느낌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겠지만 커다란 물음표 앞에서 어줍잖은 말을 늘어놓아봤자 불필요한 말일 뿐이다.

 

책을 덮고 모든걸 잊어버린다해도 기다림이라는 화두와도 같은 생각 하나는 지워지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작품을 일컬어 불후의 작품이라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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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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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전에는 나 자신을 단검을 입에 물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과 맞서는 해적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 62p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이 삶을 떠나기 위한 긴 준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95p

 

나 역시도 당장에 떠나서는 본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릴 수 있다.

다만, 산다는 오랜 습관 때문에 죽기가 싫어질 뿐이다.

134p

 




 

2005년 맨부커상 수상 당시 "참사" 라거나 쓰레기통에나 들어가야

할 책이라는 독설을 퍼부은 이도 있었다고 한다. 책읽기의 진도가

느렸기에 하는 말도, 재미가 없어 하는 말도 아니지만 읽은 사람

입장에서 절반 동의. 나머지 절반은 어떤 찬사에 동조한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것 같다.

막연한 생각이지만 이대로 읽고 말 것은 아닌 한 번은 더 읽지 않을까

하는 예감, 물론 틀린 예감이겠지만. 어떤 책은 반납하거나 팔아버

리기가 조금은 아쉬운데 이 경우가 그렇다. 또 어떤 책은 그것을

읽음으로써 단 한번도 떠오른 적 없는 기억을 상기시키거나 전혀

상관없는 예감이나 충동을 불러온다면 충분히 읽은 가치를 한 것이다.

 

 

어쩌다 정영목 번역가의 번역물이 얻어걸리곤 하는데, 그가 이견이

없는 좋은 번역가라는 것도 알겠는데, 그의 번역물을 읽다보면 굳이

이런 단어를 써가며 번역을 해야하나 싶은 곳들이 있다. 그래서 나도

'굳이' 이런 걸 쓰게 된다.

2의 창작이라고 하나 번역자의 번역 문장들은 매끄러운 읽기가 첫째

조건이 아닐까 싶은데 남들이 안쓰는 단어나 특유의 표현들을 구사해

자기만의 냄새를 피워 자기를 드러내는건 번역가의 오지랖이 아닐까

나는 생각 한다. 물론 무시해도 될 문제라해도 무방하다.

실재로 국어사전을 씹어 삼켰다는 고 김소진 작가처럼 1차 창작자가

국어 고유의 결을 살려 자신만의 문체로 쓴다면 모를까 번역가라는 2

창작자는 자신의 스타일을 전달할 게 아니라 오역 없는 정직한 문장을

구사하고 자신은 그 뒤에 숨어야 한다고 본다.

오번역이 심심찮은 번역물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정영목 번역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정영목만의 특징도 아닐 것이며 제2 3의 또다른 번역가 역시

이런 번역을 하고 할 수도 있겠지. 그때마다 나는 불편을 불평하겠지.

 

참고로 이 책은 2007년에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랜덤하우스코리아)로 한번 출간된 적이 있었다. 절판된

작품이 다시 출간된 건 반가운 일이지만 아쉬운 점은

같은 번역자의 번역본이라는 점이다. 번역의 아쉬움을

토로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른 번역을 기대하는게

당연한 일이다. 같은 번역자가 과연 다른 번역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건 합리적인 의심이다. 이런 결정을 한

출판사 측에 실망하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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