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1


아마 그때는 2003년 초겨울 무렵이었다.

도서관에 꽂힌 계간지에서 처음 김애란 이라는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 그동안 책으로 묶인 작품은 거의 읽었지만 내게 김애란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그 겨울 읽었던 '나는 편의점에 간다'를 꼽는다.

지금에 와서 무엇이 그렇게 주저없도록 만들었냐 하면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 단편을 읽으며 받은 와아 잘썼다 하는 몰입감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첫 소설집 앞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처럼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이는 앳된 표정처럼 당시 김애란의 작품은 그렇게 발랄하고 톡톡 튀는 느낌이 있었다.

삶의 애환마저 김애란 식 유머와 해학으로 바꿔놓는 솜씨에 많은 독자들이 애정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꽤나 오래전 홍대앞 어느 카페에서 작가의 육성을 확인하는 순간의 느낌 역시 그러했다. 딱 그럴 나이가 아니었냐 하는 건 게으른 짐작이다.


작가의 개인사를 잘 모르지만 또 그 개인사가 작품에 얼마나 반영되는지도 모르지만 또 그런 개인사가 아니더라도 작가 역시 나이를 먹고 세상과 삶에 지치기도 하므로 작품 역시 어느 정도의 나이듦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딱히 말 할 수는 없는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김애란 식의 유머랄까 해학이 사라졌다고 나는 언젠가 썼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런 느낌이 작품만 읽고 가질 수 있는 작가에 대한 오해였음이 이번 산문집의 다음 문단을 읽고 밝혀졌다. 2016년에 창비 50주년을 기념해 쓴 것으로 간주 되는 글이다.


그중 최근에 깨달은 한 가지는 유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데뷔 초, 저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너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고, 스스로 재치에 우쭐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역사를 공부하고 또 경험하며 때론 농담이 불가능한 시기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동시대인들의 죽음과 연결될 땐 더 그렇다는 것도요. 그러니 만일 언젠가 제 소설에 명랑한 세계가 가능했다면 그건 제가 특별히 건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밝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찧고 까불며 놀 수 있는 마당을 선배들이 다져줬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내 농담이 선배들의 진담에 빚지고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_136p


그랬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발랄한 김애란의 작품은 짐짓 안그런척 하느라 일부러 힘을 주고 썼던 것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본인이 특별히 건강하다거나 밝은 사람이 아니어서 깨닫게 된 이후 쓴 작품들에 나는 예전의 그 김애란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아쉬움을 가졌던가 보다. 이제 불필요한 오해가 걷혔으니 괜한 아쉬움 같은 것 없이 있는 그대로 김애란의 소설들을 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허구의 말들인 소설만 읽다가 그 허구를 떠받치고 있던 작가의 실재 삶과 이야기가 담긴 첫 산문집을 반갑게 펼쳤다.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책날개의 작가 사진을 보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그동안의 책들을 꺼내 프로필 사진들을 살펴 본다.

앳되고 발랄한 첫 사진부터 중년의 작가가 된 최근의 사진 사이에는 작가로써 몇 권의 책을 묶어냈고 더불어 그 역시 우리와 다를바 없는 지지고 볶는 생활인으로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한듯 했다.



2


소설가 김애란의 첫 산문집이다.

산문집을 위한 산문들이 아니라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하거나 써두었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보인다. 멀게는 2005년부터 가깝게는 2018년 사이의 글들이다.

, , 우리로 나눈 각 장을 통해 작가의 유년기 같은 가정사와 친한 문인들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해외나 국내 여행 등을 통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동안 작품 외적으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던 독자라면 한번 읽어볼만 하다. 개인사가 녹아든 작품은 어떤 배경으로 역할을 했는지 등등 깨알같은 에피소드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를테면 국수가게를 했던 어머님 이야기나 그 국수가게의 어떤 장면이 녹아든 작품이야기라든지 또는 헌책방에서 원래 사려고 한 책도 아닌 책을 사들고 온 이야기와 그 책 안에 끼워져 있던 대출표 주인공들의 연애사를 확인해보고자 직접 전화까지 한 이야기라든가... 아니면 급전이 필요해 책에 그어놓은 밑줄을 밤새 지워 중고책으로 팔아야 했다는 우리와 다를바 없는 찌질한 이야기들도 자백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입담 좋은 작가답게 시시콜콜한 옛날 이야기를 친절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김애란이란 작가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론과 작품론을 따로 논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으니 한층 더 작가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좋은 읽을거리가 아닌가 싶다.



3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그것 이외에 에세이라고 하는 개인사적 글을 써 출간을 한다. 어떤 작가는 본업이랄수 있는 시/소설 보다 에세이가 더 좋은 경우도 있고 에세이가 본업을 못따라가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때론 너무 많은 에세이를 펴내는 바람에 본업인 시/소설까지 덩달아 평가절하 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의 에세이를 그리 달갑게 보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소설 이외에 달리 작가의 개인사적 면모를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차에 첫 산문집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겠다. 나같은 김애란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기꺼이 읽어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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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2
사이토 마리코 지음 / 봄날의책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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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러니까 10여 년도 더 전에 도서관에서 낡은 시집을 만났다. 국내 시집

들이 잔득 꽂혀 있는 서가에서 책등을 건성으로 훑어보다가 낯선 저자 이름에

시선을 멈추었다. 낯설다기보다 분명 한국 현대시 시집들일 텐데 일본인 저자

시집이 있었다. 누가 잘못 꽂아 놓았나 했다. 시집을 빼 살펴봤다.

솔직히 시를 읽어보기 전엔 일본인이 한국시를 써봤자 뭐 얼마나 썼겠어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미열

 

나무에게서 사람에게로 옮는 병이 있다. 땅에다 깊이

뿌리박으면서 하늘을 날고 싶다는 병에 걸리는 이가 있

. 몸통을 쪼개 갖고 자기 나이테를 보고 싶어지는 병

이 있다. 자기 몸에다 많은 새들을 앉게 하고 싶어지는

. 잎사귀 수만큼의 눈빛들을 살랑거리며 서 있고 싶다

는 병. 거기에 서고 싶다는 병. 같은 데서 날마다 새롭게

기다리지 말고 늦지도 말고 서 있고 싶다는 병.


_부분


이 시뿐만 아니라 다른 몇몇 시들을 읽어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외국인이

사용하는 어휘가 맞나 싶을 뿐만 아니라 그 어휘의 사용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름만 지우고 보면 그냥 한국인이 쓴 꽤나 잘 쓴

한국시라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실린 시를 처음에 썼을 때는 먼저 일본어로 쓰고 나중에 한국어로 고쳤다. 그러다, 쓰면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 나오자 다른 말로 바꾸어 쓰고 또 한국어로 번역하기 쉬운 말을 골라서 쓰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처음부터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쓰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인의 말


손때를 꽤나 탄 듯한 낡은 시집을 빌려와 읽어보고 이 시집은 꼭 소장해야할

시집이구나 생각하며 여러 방면으로 중고시집을 구할 수 없을까 찾아봤지만

이미 절판된 시집이라 중고시집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출판사 측에 재출간

문의도 해보았으나 재발간 의사 없음이란 답변만 돌아왔다. 도서관에 가야 겨우

시집을 볼 수 있던 그 당시, 도서관에 앉아 시집을 뒤적일 때 드는 생각은 일단

빌려 가서 잃어버렸다고 하고 다른 방식으로 변상을 하면 어떨까 하기도 했다.

그후 어쩌다 한번씩 중고책 검색으로 찾아보았으나 시집의 종적은 찾을수 없어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한지가 또 몇 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던 중 20182월 어느 날은 살다 보니 이 시집을 이렇게 다시 보는 날도 다

있다니 했던 날로 기억된다. 한편으로는 그 옛날, 도서관에서 빌려 읽던 순간의

흥분은 어쩌면 재발간된 이 시집의 표지를 여는 순간 영원히 사라지겠구나 하는

묘한 감정이 흐르기도 했다.


단 하나의 눈송이라는 제목으로 재발간된 이 시집은 페소아의 불안의 서라는 멋진

책으로 알게 된 봄날의 책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는 "입국"에 수록되어있던 다신’, ‘하지날’, ‘여름’, ‘서울개’ ,‘서울의 야경

등 다섯 편이 빠졌고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 쓴 신작 시 세 편이 새로 추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시집에는 일부 시에 대한 기억을 더듬은 간단한 글이 후미에 첨부

되어 있어 "입국"을 능가하는 풍부한 시집이 되어 더욱 그 감회가 새롭다.

눈보라에 대한 글을 일부 옮겨와 본다.


일본어에는 눈송이에 해당하는 낱말(고유어)이 없다. 한자로 설편(雪片)”이라는 낱말이 있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이 시를 쓴 것은 다만 눈송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어서였다.

이 시를 썼을 때는 아마 실제로 눈이 내리는 계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나는 쓰고 싶은 낱말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계기로 술술 쓸 수가 있었다. 낱말 하나만 있으면 어디까지나 걸어갈 수 있었으며 또 어디에서 멈추면 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았던 것 같다.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와 만나 그것을 스스로 사용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_일부



앞서 말했지만 저자의 이름을 지우고 보면 과연 외국인이 한국어로 쓴 시가 맞나

싶을 만큼 그의 한국어 구사는 훌륭했었다. 그런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그동안

한국 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번역작업을 해왔다는 소식 또한 반가웠다. 그가

번역한 황정은이나 한강 그리고 조세희 박민규의 일본어 판 작품은 일본 독자

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을지 괜시리 궁금키도 했다.


이렇게 십여 년 그 이상 오매불망 구하던 시집이 아주 마음에 드는 새로운 장정

으로 도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랄까,라고

할 만큼 호들갑을 떨고 싶은 심정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동감할 것이다.

아울러 재발간을 수락해준 사이토우 마리코 님과 귀한 시집을 재발간 해준

<봄날의 책> 측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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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시인선 122
배영옥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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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부재하는 이의 책은 숱하게 차고 넘치지만 그 부재가 최근의 일이며 그

부재의 당사자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 듯한 느낌이라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건 인지상정의 일 아니겠나. 물론 일면식 없는 이를 단지 책으로

첫대면을 하는 일일 지라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우연히 신간 소식으로 저자가 이미 지병으로 고인이 되었음을, 그리하여 유고

시집임을, 그 가운데 훗날의 장례식같은 시가 눈에 띄어 그의 시집을 구해보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병을 이길수 없음을 직감하고 쓰지 않았을까 싶은 시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 심정은 참담이었을까 달관이었을까 아니면 나에게 올리는

애도였을까. 시집을 들고 오는 길 횡단보도 옆으로 지는 노을을 보는데 왜

갑자기 모두가 이별이예요 라는 가사의 노래가 날벼락처럼 입가에서 터지던지


시집 뒤편에 부쳐진 이영광 시인의 발문을 먼저 읽어봤다 뭔가 각별한 사연 같은게 있나 했다 그런게 있다면 한줌이라도 더 나눌수 있지나 않을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배영옥 (1966~2018)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뭇별이 총총2011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2019

여행 산문집 쿠바에 애인을 홀로 보내지 마라2014

20186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뒷표지에 촛불 하나 밝히고 있는 이 시집은 시인의 1주기 기일에 발간 되었다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 70편의 시가 있다

유고 시집의 목차를 시인이 손수 가지런히 나열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가장 훗날에 와야할 시를 첫 시로 앉혀놓았는데

그 시를 읽고 있자니 한없이 아득해지는건 뭔지


첫 시 훗날의 시집의 첫 연이다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시인은 단 두 행으로 생과 사, 유와 무를 표현하고 있다

짐작하듯이 시인은 없고 시만 남으리라는 전언이다

없는 시인을 기리며 남겨진 시집을 읽는 독자는 그저 헛헛한 마음만 한가득이다

이미 자신의 부재가 상정되어 있다

유고 시집을 가지게 되는 시인은 어쩔수 없는 불완전한 완결을 이루어 놓는다



훗날의 시집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또다른 시를 읽어본다



훗날의 장례식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벅찬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떠났으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검은 부재의 바람이 불고

태극기 휘날리고

잿빛 비둘기들만 구구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이제 진짜 안녕이라며

작별을 고할 것이다

새 없는 공중으로 검은 비가 내릴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인 나만 홀로

슬플 것이다



두 시의 공통점이랄수도 있는 점이 있는데 눈치 챘는지 모르겠다. 훗날의

시집과 훗날의 장례식 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자신이 부재하고

맞을 훗날에 대한 생각이 많았나 보다. 우리도 그런 생각 살다보면 하지

않는가. 내가 없는 세상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 특히나 자신의

장례식장엔 누가 올까 같은 어찌보면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부질없는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게 사실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그러게 내 돌잔치에 내가 있었고 내 졸업식장에도 내가 있었는데

왜 내 장례식장이라고 주인공인 내가 없을까

절을 꿉벅꿉벅 두 번 씩이나 하고 일어나는 저 사람들은 누굴 위해 우는걸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끌어안고 병마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장례식장 풍경을

그려봤을 것이다. 나도 없는데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을 꼽아봤을 것이다.


시인을 알았던 이들에게나 뒤늦게 검은 시집을 집어든 나같은 독자들에게나

이제 시인은 추억만이 가능하다 그러라고 쓴듯한 시를 소개해본다


또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나는 끝내

의자 아래 묻힌 신전을 모를 것이고

의자 또한 나를 모를 것이고

의자 위의 사과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데

나는 오늘도 의자를 기다리는 사람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애써 소환하는 사람

의자를 관()처럼 떠받드는 사람

오래도록 동행해야 할 목숨과

매일매일 불화하는 사람

짙어지는 어둠과

푸르른 이끼를 끌어다 덮는 사람

그러니 나날이 봉분을 쌓는 어지럼증이여

의자를 경배하라

나는 오늘도

또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뿌리 깊은 의자에 묻히노니,

아무도 나를 찾지 마라


1년전 611일 시인은 영면에 깊게 들었다 그리고 1년 후 611

그의 유고 시집이 세상에 나와 그를 알던 모르던 뭇사람들에 의해 그의 이름이 다시

호명되고 있다 그런 이름 부름을 깊고 깊은 뿌리 내린 어딘가에서 듣고는 있을까

아니면 단호한 일갈처럼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가 있을지

살아 있는 우리야 알 수 없지만 시인의 사정에 아랑곳 없이 우리는 이렇게 시인을 찾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 말하지 않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발설하였으므로,

 

내가 끝내 영원으로 돌아간다 한들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으리라

 

2018611

 

배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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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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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다고 그 책에 대해 모두 리뷰를 하고 싶다거나 리뷰를 하는건 아니다. 어떤 책은 단 한 줄 평을 남기는 것으로 읽기를 마칠 때도 있고 또 어떤 책은 그 단 한 줄의 평도 남겨지지 않고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또 어떤 책은 읽는 내내 뭔가 불편한데 그 불편한 뭔가를 찾기 위해 리뷰를 할 때도 있다. 쓰고 말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뭔가가 툭 하고 튀어나오기도 하니까.




https://youtu.be/JTbXlkj1evU


테드 창의 작품집 숨에 실린 여러 작품 가운데 한 편에 대한 리뷰 영상을 올린 것으로 테드 창의 이번 소설집 리뷰를 더는 하지 않을 것이라 내심 생각하며 읽지 않은 작품들을 마저 읽어 나갔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읽는 내내 뭔가 좀 불편해서 그 불편과 그 외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이렇게 두 번째 리뷰 영상에 대한 원고를 쓰고 영상을 만들고 만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라는 작품은 작품 내외부적으로 참 이야기 할 게 많은 작품이다. 2010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그 이듬해 테드 창에게 휴고상과 로커스상을 안겨 준 작품으로 지금까지 발표된 작품 가운데 가장 긴 중편에 속한다. 이번 작품집에 포함되기 전에 단행본으로 국내 출간이 되기도 했다.


무엇이 불편했던지 이야기해 보기 전에 줄거리를 간략하게 후려쳐보자면


디지언트digient 라고 불리는 디지털 생명체가 있다.

유전적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생성되는 생물학적 계산 지능 이라고 옮긴이는 설명 하고 있다. 이 디지언트를 키워나가며 벌어지는 일들과 주인공의 디지언트에 대한 감정선들이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편했나?


첫째, 잭슨이라는 디지언트를 키워가는 주인공 애나의 애정을 넘어 집착에 가까워보이는 감정상태가 솔직히 오버스러워 보였다. 나는 반려동물이나 식물 또는 자식을 키워본적 없고 심지어 다마고치 같은 게임 캐릭터도 키워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가상의 프로그램이라고 봐도 무방한 잭슨에게 마치 자식을 대하는 애착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게 나는 도저히 이해불가였다.

영화 허를 보진 않았지만 그런 예처럼 인간 아닌 가상의 프로그램에게 감정이 생길수 있을까. 아이폰에 탑재된 시리가 지금보다 더욱 발달하여 거의 인간과 동등한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인간을 대하는 감정처럼 느낄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는 로봇외피라는 하드웨어에 디지언트라는 소프트웨어를 탑재시켜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질수 있는 존재로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개개의 디지언트를 법인화 시켜 독립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려 한다. 그것도 모자라 인공지능 존재에

여성이나 남성의 성역할까지 부여하려 한다. 언젠가 닥칠 현실이긴 할텐데 과연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사이는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까.


둘째, 이 소설에 등장하는 디지언트들의 지능 발달 상태가 뭔가 앞뒤가 안맞는게 아닌가 할만큼 어떤 면에선 인간과 동등하거나 뛰어넘은 지능을 보이는 반면 어떤 면에선 아이같기만 해서 어거지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소설의 시간 흐름을 살펴보니 다음처럼 여러차례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일 년 후, 일 년 후, 다음 해, 다음 해, 일 년 후, 일 년 후, 한 달 후, 일 년 후, 일 년 후, 이 년 후, 두 달 후, 한 달 후


대략 104개월 동안의 시간 흐름이다. 10년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인간이 10살 짜리 아이의 지능을 가지게 될동안 인공지능은 얼마나 발전할까를 상상해 본다. 물론 인공지능이라고 무조건 인간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지능 개발이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해도 10년의 시간을 생각해보자면 디지언트인 잭슨은 뭔가 좀 모자라보이는 것 같은 반면, 10년 동안 과연 인공지능이 자의식을 갖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 수 있을까 싶다. 물론 이런 의구심이 작품에 대한 의구심으로 합당하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중편에 가까운 분량을 할애했음에도 자연스런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f소설에 리얼한 뭔가를 바라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겠지만 마블 히어로 영화를 봐도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이니까.


또 하나 생각해볼 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상대에 대한 감정에 대해서다. 인간이 창조하는 피조물인 인공지능에게 과연 인간은 어느 영역까지 능력을 부여할 것이며 애착을 느낀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의 애착일까.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은 창조주인데 그 창조주 입장에서 바라보는 인공지능이란 존재는 어떻게 보여질까 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인간을 창조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의 시각을 짐작해볼수도 있을 것같다. 물론 전지전능한 신의 생각을 어찌 알까만은. 나는 무신론자라서 그런건 없다는 생각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지금 이야기한 내용은 이 소설의 일부일 뿐이다. 이게 전부인냥 착각해서는 안된다.


정리를 해보자면 작품속의 모든 상상력에 대해 이게 가능하냐 아니냐 시비를 가리는건 무의미 하다. 이런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는 도래하기 전의 미래에 대해 미리 한번쯤 상상해보고 이야기 해보는데 있다.

기발한 착상과 그럴듯하게 전개되는 테드 창의 여러 중단편들을 읽어봤는데 짧으면 짧을수록 더 인상에 남은 작품들이었고 반대로 길면 길수록 내겐 다소 지루한 작품으로 읽혔다.

이것으로 테드 창의 리뷰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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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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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독자라면 모를리 없는 테드 창의 소설집이 최근 출간 되었다는 것도 모를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표제작 숨을 포함한 9편의 단편 소설 가운데 6번째 작품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이 한 편을 콕 찝어 이야기 하고 싶은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영상을 통해 말하게 하는 유튜브 때문이다.

이 리뷰는 다음과 같은 키워드의 내용이 전달될 것이다.

#기록 #기억 #망각 #병렬적구성 #기억의전달방식 #유튜브



 

왜 유튜브 이야길 하냐면 먼저 소설의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그리 먼 미래는 아닐것으로 보이는 소설 속의 세계는 몸에 장착된 개인카메라로 자기 삶 전체를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라이프로그가 사용되고 있다. 그 저장된 기록에서 사소한 장면까지 검색 가능한 시스템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내가 친구 아무개와 서점에 간 날 이라고 검색하면 과거 아무개와 서점 간 날의 녹화 영상이 모두 시야의 좌측 하단에 영상으로 뜬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개인의 생체적 기억, 그러니까 인간이 뇌로 하는 기억이라는게 무용한 세계라는 것이다. 기억이 기록되고 그 기록은 디지털 기억으로 저장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모든 것들이 기록되어 기억되는 세계여서 더 이상의 망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연 축복이고 망각은 저주일까? 이 지점에서 저자는 한 사례로 러시아의 솔로몬 셰레셰브스키(Solomon Shereshevskii)를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허구의 인물인지 실재 인물인지 궁금해 찾아봤다.

솔로몬 셰레셰브스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보자면

192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기자로 일한 실재 인물로 그는 기자회견장에서 연설문을 따로 메모하지 않고도 나중에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 주위 사람들을 놀래켰다고 한다. 그러나 흔히 특이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듯 셰레셰브스키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력이 낮았고 자신의 인생사에 대해서는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망각하는 능력이 없어 과거의 현실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던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남자를 연구한 러시아의 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루리아(Aleksandr Luria) 박사의 책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세계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 진단을 받은 미국의 질 프라이스의 자서전적 기록물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라는 책으로도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유튜브와 무슨 상관이냐 할 것이다

유튜브가 지금은 구독자 1000명 시청시간 4000시간이라는 수익창출 플랫폼을 기본으로 많은 사용자들이 유입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일상을 촬영하고 업로드 하는 vlog 채널이 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이라면 자연히 이런 연관성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의 vlog채널들은 초기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모르긴해도 가까운 시기에 소설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일상이 업로드 가능할 날이 올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들은 더 이상 넌 어려서 모르겠지만 이라거나 또는 유소년기나 청소년기의 기억나지 않거나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망각이라는 서랍 속에 감출수 없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정황을 작가는 아주 그럴듯하게 상상하는데 그 내용들이 과연 축복일지 저주일지.

 

이 작품은 병렬적 구성으로 기억의 전달 방식과 그 방식의 한계점 등을 대비해 이야기 하고 있다. 테드 창의 전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역시 병렬 구성이었는데 개인적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끊기고 또다른 이야기가 교차로 반복되다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져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다. 작가의 전략적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역량 부족인건지 이야기의 전달 방법에 있어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문자가 없던 시대의 구전 문화에서 기록 문화로 바뀌는 장면을 소설적으로 압축해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소설 속 현재의 세계를 대비하면서 기록이라는 기억의 전달과 디지털 기억으로 탈바꿈한 흐름을 집약적으로 소설화한 솜씨는 탁월하다고 본다. 괜히 유명상을 휩쓴 작가가 아님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 아닌가 했다.

 

정리 겸 이야기해 보자면

많은 sf소설은 정말이지 현재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의 이야기인데 이 작품이 그랬다. 특히나 유튜브라고하는 플랫폼이 전지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상을 피부로 느끼고 있고 이렇게 나 역시 내 생각이나 기억들을 유튜브에 담아놓고 있는걸 생각해보면 소설 속의 기억력을 잃어버린 인간사회에 살짝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우리는 어떤 지나간 기억을 그리워하고 아름다웠다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기억이 망각과 함께 어느 정도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고호가 그린 해바라기나 별빛 가득한 밤의 그림과 그 정물과 밤풍경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언제든 리플레이해보는 것 가운데 아름답다고 할만한 건 어느쪽일까? 소설 속 현실에 우리가 있게 된다면 아름다웠던 추억이라는 말은 더는 쓰이지도 않을뿐더러 그 의미를 아는 인간도 없을 것이다. 더는 기억의 필요가 없어진 미래, 망각의 염려가 사라진 미래. 궁금키도 하지만 거기에 가고 싶진 않을 것 같다.

 

이래저래 이야기해볼 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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