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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눈송이 ㅣ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2
사이토 마리코 지음 / 봄날의책 / 2018년 2월
평점 :
예전에 그러니까 10여 년도 더 전에 도서관에서 낡은 시집을 만났다. 국내 시집
들이 잔득 꽂혀 있는 서가에서 책등을 건성으로 훑어보다가 낯선 저자 이름에
시선을 멈추었다. 낯설다기보다 분명 한국 현대시 시집들일 텐데 일본인 저자
시집이 있었다. 누가 잘못 꽂아 놓았나 했다. 시집을 빼 살펴봤다.
솔직히 시를 읽어보기 전엔 일본인이 한국시를 써봤자 뭐 얼마나 썼겠어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미열
나무에게서 사람에게로 옮는 병이 있다. 땅에다 깊이
뿌리박으면서 하늘을 날고 싶다는 병에 걸리는 이가 있
다. 몸통을 쪼개 갖고 자기 나이테를 보고 싶어지는 병
이 있다. 자기 몸에다 많은 새들을 앉게 하고 싶어지는
병. 잎사귀 수만큼의 눈빛들을 살랑거리며 서 있고 싶다
는 병. 거기에 서고 싶다는 병. 같은 데서 날마다 새롭게
기다리지 말고 늦지도 말고 서 있고 싶다는 병.
_부분
이 시뿐만 아니라 다른 몇몇 시들을 읽어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외국인이
사용하는 어휘가 맞나 싶을 뿐만 아니라 그 어휘의 사용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름만 지우고 보면 그냥 한국인이 쓴 꽤나 잘 쓴
한국시라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실린 시를 처음에 썼을 때는 먼저 일본어로 쓰고 나중에 한국어로 고쳤다. 그러다, 쓰면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 나오자 다른 말로 바꾸어 쓰고 또 한국어로 번역하기 쉬운 말을 골라서 쓰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처음부터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쓰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인의 말」
손때를 꽤나 탄 듯한 낡은 시집을 빌려와 읽어보고 이 시집은 꼭 소장해야할
시집이구나 생각하며 여러 방면으로 중고시집을 구할 수 없을까 찾아봤지만
이미 절판된 시집이라 중고시집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출판사 측에 재출간
문의도 해보았으나 재발간 의사 없음이란 답변만 돌아왔다. 도서관에 가야 겨우
시집을 볼 수 있던 그 당시, 도서관에 앉아 시집을 뒤적일 때 드는 생각은 일단
빌려 가서 잃어버렸다고 하고 다른 방식으로 변상을 하면 어떨까 하기도 했다.
그후 어쩌다 한번씩 중고책 검색으로 찾아보았으나 시집의 종적은 찾을수 없어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한지가 또 몇 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던 중 2018년 2월 어느 날은 살다 보니 이 시집을 이렇게 다시 보는 날도 다
있다니 했던 날로 기억된다. 한편으로는 그 옛날, 도서관에서 빌려 읽던 순간의
흥분은 어쩌면 재발간된 이 시집의 표지를 여는 순간 영원히 사라지겠구나 하는
묘한 감정이 흐르기도 했다.
단 하나의 눈송이라는 제목으로 재발간된 이 시집은 페소아의 불안의 서라는 멋진
책으로 알게 된 봄날의 책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는 "입국"에 수록되어있던 ‘다신’, ‘하지날’, ‘여름’, ‘서울개’ ,‘서울의 야경’
등 다섯 편이 빠졌고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 쓴 신작 시 세 편이 새로 추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시집에는 일부 시에 대한 기억을 더듬은 간단한 글이 후미에 첨부
되어 있어 "입국"을 능가하는 풍부한 시집이 되어 더욱 그 감회가 새롭다.
시 ‘눈보라’ 에 대한 글을 일부 옮겨와 본다.
일본어에는 “눈송이”에 해당하는 낱말(고유어)이 없다. 한자로 “설편(雪片)”이라는 낱말이 있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이 시를 쓴 것은 다만 눈송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어서였다.
이 시를 썼을 때는 아마 실제로 눈이 내리는 계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나는 쓰고 싶은 낱말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계기로 술술 쓸 수가 있었다. 낱말 하나만 있으면 어디까지나 걸어갈 수 있었으며 또 어디에서 멈추면 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았던 것 같다.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와 만나 그것을 스스로 사용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_일부
앞서 말했지만 저자의 이름을 지우고 보면 과연 외국인이 한국어로 쓴 시가 맞나
싶을 만큼 그의 한국어 구사는 훌륭했었다. 그런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그동안
한국 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번역작업을 해왔다는 소식 또한 반가웠다. 그가
번역한 황정은이나 한강 그리고 조세희 박민규의 일본어 판 작품은 일본 독자
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을지 괜시리 궁금키도 했다.
이렇게 십여 년 그 이상 오매불망 구하던 시집이 아주 마음에 드는 새로운 장정
으로 도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랄까,라고
할 만큼 호들갑을 떨고 싶은 심정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동감할 것이다.
아울러 재발간을 수락해준 사이토우 마리코 님과 귀한 시집을 재발간 해준
<봄날의 책> 측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