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1
아마 그때는 2003년 초겨울 무렵이었다.
도서관에 꽂힌 계간지에서 처음 김애란 이라는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 그동안 책으로 묶인 작품은 거의 읽었지만 내게 김애란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그 겨울 읽었던 '나는 편의점에 간다'를 꼽는다.
지금에 와서 무엇이 그렇게 주저없도록 만들었냐 하면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 단편을 읽으며 받은 와아 잘썼다 하는 몰입감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첫 소설집 앞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처럼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이는 앳된 표정처럼 당시 김애란의 작품은 그렇게 발랄하고 톡톡 튀는 느낌이 있었다.
삶의 애환마저 김애란 식 유머와 해학으로 바꿔놓는 솜씨에 많은 독자들이 애정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꽤나 오래전 홍대앞 어느 카페에서 작가의 육성을 확인하는 순간의 느낌 역시 그러했다. 딱 그럴 나이가 아니었냐 하는 건 게으른 짐작이다.
작가의 개인사를 잘 모르지만 또 그 개인사가 작품에 얼마나 반영되는지도 모르지만 또 그런 개인사가 아니더라도 작가 역시 나이를 먹고 세상과 삶에 지치기도 하므로 작품 역시 어느 정도의 나이듦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딱히 말 할 수는 없는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김애란 식의 유머랄까 해학이 사라졌다고 나는 언젠가 썼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런 느낌이 작품만 읽고 가질 수 있는 작가에 대한 오해였음이 이번 산문집의 다음 문단을 읽고 밝혀졌다. 2016년에 창비 50주년을 기념해 쓴 것으로 간주 되는 글이다.
그중 최근에 깨달은 한 가지는 유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데뷔 초, 저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너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고, 스스로 재치에 우쭐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역사를 공부하고 또 경험하며 때론 농담이 불가능한 시기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동시대인들의 죽음과 연결될 땐 더 그렇다는 것도요. 그러니 만일 언젠가 제 소설에 명랑한 세계가 가능했다면 그건 제가 특별히 건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밝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찧고 까불며 놀 수 있는 마당을 선배들이 다져줬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내 농담이 선배들의 진담에 빚지고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_136p
그랬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발랄한 김애란의 작품은 짐짓 안그런척 하느라 일부러 힘을 주고 썼던 것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본인이 특별히 건강하다거나 밝은 사람이 아니어서 깨닫게 된 이후 쓴 작품들에 나는 예전의 그 김애란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아쉬움을 가졌던가 보다. 이제 불필요한 오해가 걷혔으니 괜한 아쉬움 같은 것 없이 있는 그대로 김애란의 소설들을 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허구의 말들인 소설만 읽다가 그 허구를 떠받치고 있던 작가의 실재 삶과 이야기가 담긴 첫 산문집을 반갑게 펼쳤다.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책날개의 작가 사진을 보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그동안의 책들을 꺼내 프로필 사진들을 살펴 본다.
앳되고 발랄한 첫 사진부터 중년의 작가가 된 최근의 사진 사이에는 작가로써 몇 권의 책을 묶어냈고 더불어 그 역시 우리와 다를바 없는 지지고 볶는 생활인으로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한듯 했다.
2
소설가 김애란의 첫 산문집이다.
산문집을 위한 산문들이 아니라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하거나 써두었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보인다. 멀게는 2005년부터 가깝게는 2018년 사이의 글들이다.
나, 너, 우리로 나눈 각 장을 통해 작가의 유년기 같은 가정사와 친한 문인들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해외나 국내 여행 등을 통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동안 작품 외적으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던 독자라면 한번 읽어볼만 하다. 개인사가 녹아든 작품은 어떤 배경으로 역할을 했는지 등등 깨알같은 에피소드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를테면 국수가게를 했던 어머님 이야기나 그 국수가게의 어떤 장면이 녹아든 작품이야기라든지 또는 헌책방에서 원래 사려고 한 책도 아닌 책을 사들고 온 이야기와 그 책 안에 끼워져 있던 대출표 주인공들의 연애사를 확인해보고자 직접 전화까지 한 이야기라든가... 아니면 급전이 필요해 책에 그어놓은 밑줄을 밤새 지워 중고책으로 팔아야 했다는 우리와 다를바 없는 찌질한 이야기들도 자백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입담 좋은 작가답게 시시콜콜한 옛날 이야기를 친절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김애란이란 작가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론과 작품론을 따로 논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으니 한층 더 작가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좋은 읽을거리가 아닌가 싶다.
3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그것 이외에 에세이라고 하는 개인사적 글을 써 출간을 한다. 어떤 작가는 본업이랄수 있는 시/소설 보다 에세이가 더 좋은 경우도 있고 에세이가 본업을 못따라가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때론 너무 많은 에세이를 펴내는 바람에 본업인 시/소설까지 덩달아 평가절하 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의 에세이를 그리 달갑게 보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소설 이외에 달리 작가의 개인사적 면모를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차에 첫 산문집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겠다. 나같은 김애란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기꺼이 읽어볼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