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9PM 밤의 시간  
김이은 / 답 / 272쪽
(2018. 9.16.)
  “재는 누굴 닮아 저러는 거야? 말하는 게 어떻게 애 같지가 않고. 어떤 땐 섬뜩하다니까, 눈빛이."
  미주가 가리지도 않고 뇌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걸 또 문자가 거들었다.
  “지 에미 닮았지, 뭐. 계집에가 기가 세니까 진영이가 기를 못 펴고 제 누나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계집에처럼 놀잖아.”
​  문자가 대놓고 해선을 밟는데도 동식은 스테이크를 씹고 맥주를 마시면서 들은 척도 안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게 당연한 권리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더 해선의 부아를 돋웠다.
  해선은 포크로 고기 조각을 푹 찍었다.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 고기 조각에서 떨어진 핏국물이 해선의 옷자락. 정확히 심장이 있는 즈음에 물들어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번졌다. 미리 준비 시킨 생일 케이크를 직원이 들고 와 해선은 자신에게 새겨진 핏자국을 보지 못했다.
(P.27)
  교영은 어른들에게 화를 내거나 을지 않았다. 대신 낮게 내리 깐 눈으로 한 번 진영을 노려보았다. 그게 다였다. 교영은 여느 아이들처럼 미련하게 투정 부려서 이미 갖고 있는 것까지 빼앗길 위험을 피할 줄 아는 아이였다. 대신 교영은 시간을 들여 좀 더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식을 연구할 줄 이는 인내와 영특함을 지녔다.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는 대신 교영은 어른스럽게 분노를 안으로 쌓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나중에, 며칠쯤 뒤 교영은 어른들을 혼내줄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을 해선에게 제안해 올 것이다. 해선은 그게 뭔지 벌써부터 궁금해 졌다.
  해선은 전혀 다른 성품을 타고난 두 아이가 자신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 둘로 나눠가진 것 같다고 느꼈다. 두 아이는 평생 서로의 모자라거나 넘치는 부분들을 적절하게 주고받으며 삶의 균형을 이뤄나갈 것이다.
  만약 진영이 혼자라면 멍청하게 남의 말이나 들으면서 끝없는 굴욕에도 분노할 줄 모르고 이십사 평 아파트 따위에나 감사하며 살게 될지 모른다. 반대로 교영이 혼자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순간순간 교영의 삶이 어긋날 때, 그럴 때면 진영이 교영에게 올바른 도착지를 일깨워줄 것이다. 
(P.29)
  “저는 돼지 비계를 못 삼켜요."
​  뒤이어 다른 사람들에게 늘상 해왔던 것처럼 설명을 덧붙이려는데 동식이 빠른 젓가락질로 비계를 깔끔하게 떼어낸 돼지고기를 해선의 입에 넣어주었다.
  해선이 비계를 삼키지 못하는 건 비계 기름의 느물거리는 식감 때문인데 그래서 삼겹살도 먹지 않으며 마찬가지 이유로 곱이 들어 있는 곱창 따위도 먹지 못한다. 라는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던건 동식이 처음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언제부터 그랬느냐. 그러면 족발은 어떠나, 콜라겐이 피부에 얼마나 좋은데 그것도 못 먹느냐. 사람들하고 회식 같은 거 할 때 불편하겠다. 그럼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느냐. 부모님이 너무 떠받들어 키운 것은 아니냐, 등등을 캐묻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동식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해선은 이상하게 그 점에 마음이 움직였다. 의식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타고난 성품인 듯 자연스러웠다는 점에서 더욱 감동을 느꼈다. 중요한게 적힌 건 아니지만 짧은 메모를 적어놓은 종이쪽지를 잃어버리고 나서 결국 못 찾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쪽지가 툭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잃어버렸을 땐 몰랐는데 찾고 나니까 그 쪽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은. 쪽지에는 '이해하지 말라. 받아들여라.' 와 비슷한 경구가 적혀 있었을 것이다.
  '이 남자. 어디까지 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해선에게 믿음과 신뢰란 의심하지 않는 거였으니까. 살코기를 씹으면서 해선은 모처럼 식욕이 돋는다고 생각했 다.
(P.40)
  그 후로도 시간은 가고 봄은 또 왔다. 그런 게 아닌가. 슬픔이나 절망보다 삶이. 살아가는 게 훨씬 더 무겁고 엄중한 거 니까.
  술에 취해 기차 레일 조립이 맘처럼 되지 않자 동식은 냅다 베란다로 집어던졌다. 앙. 교영이 을-음을 터트렸다. 선 채 오줌을 쌌다.
  “너 나이가 몇 살인데 거기서 오줌을 싸는 거야? 그 더럽고 재수 없는 인형을 버리랬잖아. 너 아빠 말 안 들을 거야?” 
  해선은 교영이 뱃속에 있을 당시 혈서를 쓰듯 자신에게 했던 동식의 맹세를 잊지 않았다. 동식은 그들이 함께 보낸 모든 시간들의 근거였던 약속의 말을 저버린 것이다.
  동식이 작은 소리로 '씨발' 이라고 말함과 거의 동시에 해신이 동식의 빰을 쳤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어서 때려놓고 놀랐다. 놀란 눈으로 동식을 쳐다보았을 때, 동식은 수없이 돋아났던 칼날 들이 단번에 녹슬어 가루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게 고요한 표정으로 해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선아, 그런 게 아니라..."
  동식은 쉽 없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때 동식은 가련했고 순한 어린 영혼이었으며 시선의 마주침 같은 것만으로도 치유될 수 있는 준비된 상처만 남아 있었다.
  해선은 자신의 폭력에 보인 동식의 반응에 주목했다. 몸으로 그 반응을 느꼈고 그러자 기이한 흥분 때문에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초조하거나 불안할 때와 비슷한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얼마간 그 감정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의 뺨을 때린 것이 처음이며 그것이 죄책감보다 금지 된 일을 수행했을 때의 자랑스러음을 느끼게 했다는 점, 자신이 실제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며 경우에 따라 그것은 커다란 저항을 동반하지 않은 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냐면 지금 처럼 상대의 심신이 약해진 상태, 즉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력은 정당한 제어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51)
  해선은 또 한 번 죄송하다며 눈치 빠르게 튀김옷을 얇게 입힌 생닭을 한 마리 가마솥에 넣었다. 순간적으로 기름이 끓어올랐다. 보글보글 기름방울 터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가마솥 가득 들어찼다.
  목과 발이 잘리고 배가 열린 닭은 살과 뼈가 반질거리는 갈색으로 익어갔다. 사람들이 토막 낸 치킨 대신 통닭을 좋아하는 까닭은 스스로 닭의 몸을 찢어먹을 수 있어서일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사실 해선은 닭이나 오리처럼 날개 달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해선은 옆에 쌓인 생닭을 보았다. 아직 흰빛의 살결일 때, 비 린내 풍기는 닭은 혐오스러웠다. 매일같이 저런 것들을 수도 없이 만져야 한다는 건 징벌의 한 가지로 시켜도 될 종류의 일이라 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일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라 주장이다. 그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이 힘주어 길고 긴 설명을 덧붙이는 것만 봐도 그렇다. 사실 속으로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걸 아니까.
​​​(P.75)

  상현이 말하는 동안 해선은 상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맞닿는 끈 같은 게 있다면 이 남자와는 왠지 질감이 거칠고 순간적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강하며 그 팽팽함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끝내 툭, 끊어져 뒤로 나자빠지게 만드는 그런 끈을 나눠 쥐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120)
  '살아가는 모든 자들은 예외 없이 굴욕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엄마의 생각이었다. 나중에 보니 어느 책에서인가 따 온 구절인 것 같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맞는 말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단 며칠도 아무것도 없이는 살수 없으니까. 그러니 엄마의 이런 생각은 당연했다.
  “계속해서 원기를 채워 넣는 게 삶이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습관 같은 거야. 하루하루 죽어가는게 사는 거고 보면, 산다는 건 실은 소비하는 것이고 얼마나 잘 사는가는 소비의 질로 따져볼 수 있는 문제야.” 먹고. 입고. 자는 것. 그것이 엄마가 그중 으뜸으로 치던 거였다. 엄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디자인의 침구가 가득 들어있는 팸플릿을 받아보고는 매장으로 가서 신중하게 하나하나 품평한 다음. 그중 가장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가장 비싸지는 않으면서도 세련된 침구를 골라 집으로 배달시켰다. 엄마가 골라 준 침구는 언제나 깨끗한 새것이었고 그 안에서 해선은 밤마다꿈도 없이 깊이 잠들 수 있었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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