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21
가라타니 고진 / 윤인로, 조영일 / 비 / 238쪽
(2018.10.9.)
일본에서 연소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항상 등장하는 담론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모의 책임'이라는 담론입니다. 예를 들어 그 소년의 부모는 매스미디어의 공격을 받으며 계속해서 사죄하기를 요구당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죄를 합니다. 그런 추궁을 특히나 가혹하게 행하는 저널리즘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태도를 냉소할 뿐만 아니라 사죄에 적극적인 정치가들을 규탄합니다.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도대체 왜 자신이 입은 피해도 아닌데 그토록 열심히 부모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일까요 애당초 그들에게 '책임'이란 무엇일까요 전쟁책임과 같은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P.20)
자식이 행한 일에 왜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경우 누구에 대한 책임일까요. 그것은 바로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죄를 범한 아이는 나름대로 처벌을 받으며 부모도 그 일로 인해 충분히 괴로워하며 벌을 받습니다. 피해자의 부모가 분노를 금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왜 '세상'이 -현실에서는 저널리즘이-그 분노를 대변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 결과로 비난과 공격을 받은 부모가 자살하면, '세상'은 그에 대해 책임을 질까요. '세상'이란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분명 한 주체가 없지요. 누군가가 부모를 추궁한다면, 그 사람은 여하튼 '세상이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요. 흔히 서구에는 기독교적인 도덕이 있는데, 그것이 개인주의의 기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 유교권의 중국이나 한국에도 도덕적 기축(基軸)이 있어서 역설적으로 일종의 개인주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일본에는 그러한 것이 없지요. 그 대신에 '세상'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도덕이라는 것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옛 일본에는 그런 것이 없었고 또 있을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지적은 옳습니다. 일본인은 도덕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거북스러운 느낌을 받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후 아메리카화 과정에서 도덕관이 붕괴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도덕적 규범이 없다는 말이 완전히 자유롭고 공동체의 규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라는 것을 통해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상'의 규제는 매우 강하게 존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27)
병의 원인이란 실제 증세가 나타났을 때만 소급적으로 발견되는 것이지 일정한 원인이 있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원이을 알았다고 해서 그에 대한 인식을 언제나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찾으면 부모, 학교, 환경, 현대사회와 같은 것으로 소급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런 행동을 한 이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인이 어떻든 간에 그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요. 그 결과 여러 원인에 대한 해명은 잊히고 맙니다.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원인은 철저하게 추궁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문제와는 구별 되어야 합니다.
(P.43)
아이들은 결코 백지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아무리 자유롭고 평화주의적으로 키워도 공격성은 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물론 인식한다고 해서 사태가 바뀔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잘못된 대처나 환멸이나 좌절은 없어질 것입니다. 요컨대 책임이라는 것과 인식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P.54)
스피노자의 사고에 따르면 모든 것은 자연필연적으로 결정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인과성이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자유를 상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행위를 할 때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것이 어디까지 인과성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는 원인에 의한 결정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는 자유의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예컨대 여기 범죄자 한 사림이 있다고 칩시다. 그의 범죄에는 다양한 원인들 - 사회적인 것을 포함하여 - 이 있습니다. 그 원인들을 열거하면 그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것이 되며, 따라서 책임이 없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변호나 변명에 격분하고 그 범죄자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원인에 의한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적당히 섞어서 생각하는 것입 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자연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있지만 동시에 자유가 있다는 것입 니다. 이를 부정한 이가 스피노자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전부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자유 따위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자유란 실제로는 자기원인입니다. 그것은 원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순수한 자율성이기에 통상적인 의미의 자유와는 다릅니다. 우리들이 흔히 자유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자살도 그렇습니다. 스피노자는 다만 원인이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에 자유라고 상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원인이라고 하면 의미가 협소해지는데, 좀 더 넓혀서 생각하면 그것은 사회적 • 역사적 원인에도 해당됩니다. 우리들의 행동에는 모두 원인이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들이 자연(정념)에 의해 복잡하게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 원인을 알려고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인식만이 자유를 가져오고 그런 인식하려는 의지만이 자유라고 생각했습 니다. 말하자면 인식이야말로 '에티카'인 셈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인식 없이는 윤리가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 계열의 인물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P.59)
좋은 사원이 되라, 좋은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 세상의 도덕입 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에 반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도덕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오랜 시간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의무'에 반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미나마타병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이후부터 괴로워한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괴로움은 세상의 비난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의 도덕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행동은 어쩔 수 없었다"리고 변호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공격한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후로도 같은 케이스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로 칸트적인 '의무'에 따를 때 많은 경우 불행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종교적인 주장(신이나 영혼, 저세상)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며 논박하였습니다. 또 현실에 존재하는 종교를 미신이나 몽매로서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윤리적(실천적)으로 요청 되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였습니다. 만약 이 세상이 전부여서 죽으면 그것으로 모두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윤리적이기보다는 현실의 행복을 지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생명이나 심판이 있다는 신앙은 윤리성을 강화시킵니다. 칸트는 종교를 윤리적일 때만 인정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이면 저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로위지라”는 지상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러한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저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도 사후에 자신이 어떻게 평가될 지에 신경을 쓴다면, 어떤 의미에서 사후의 삶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P.102)
헤겔은 '몰랐다'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헤겔은 암묵적으로 그리고 엉뚱하게 칸트를 공격합니다. 칸트는 행위자가 무지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구별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덕법칙'을 알고 있어도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행할지 어떨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거기에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유의지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모르는 원인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위지라"는 도덕법칙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간주할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정말 '몰랐는가'와는 무관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원인들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헤겔처럼 실제로 있었던 일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P.118)
봉건제 국가나 절대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는 대폭 제한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어낸 것이 부르주아 혁명입니다. 하지만 독일(프러시아)에서는 아직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만년에 칸트의 종교론도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판의 자유'가 불가결하다고 썼습니다. 현재도 그와 같은 나라가 많이 존재하며, 그런 나라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자유가 당연시되는 선진국에서는 어떨까요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 곳에서 타율성-자율성은 분명하지만, 정치적 • 경제적 자유가 실현되면 자율성은 애매해집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자율적(자유) 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칸트의 '자유'론이 중요한 것은 오히려 행복주의를 당연시하는 나라에서 입니다. 예를 들어 전전戰前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읽히면, 칸트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영미 계열 윤리학에서 자유란 타인에게 위해만 끼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그것에 반대한 것은 전통적 규범을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특별히 '자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이는 것도 실은 내외적 여러 원인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타율적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물건을 너무나 갖고 싶어하고 그것을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헤겔이 말했지만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입니다. 저의 욕망은- 단순한 욕구와는 달라서 - 타자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 바꿔 말해 타자에게 승인받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욕망이 자발적(자유) 일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욕망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일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타율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전통적
규범으로 억압하는 것도 타율적입니다.
(P.123)
프로이트는 인간이 유아적 신경증 단계로서의 종교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성이 충동생활에 비해 무력하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하고, 또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지성의 연약함이란 일종의 독특함이다. 과연 지성의 목소리는 연약하다. 그렇지만 이 지성의 목소리는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게다가 여러 번 묵살당한 후 결국은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류의 장래에 대해 낙관적이 될 수 있는몇 가지 이유 중 하나인데. 이것 자체도 적잖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실마리로 삼아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지성의 우위는 멀고 먼 미래에 실현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위와 같은 사고는 분명 칸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프로이트 자신은 항상 칸트를 부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자체가 아무리 칸트를 조소한다고 해도 결국 그의 목소 리를 듣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