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하)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안정효 / 열린책들 / 737쪽
(2013. 12. 15.)

 


 
 어느 날 생트주느비에브 도서관에서 독서에 몰두했던 나에게 한 소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어떤 남자의 사진이 실린 책을 손에 들었는데, 밑에 적힌 이름이 보이지 않게끔 손으로 가린 채였다. 허리를 굽히고 경이에 찬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녀는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이건 당신이에요 - 아주 똑같아요! 이마와 짙은 눈썹, 푹 들어간 눈을 봐요. 이 사람은 큼직한 콧수염이 축 늘어졌는데 당신은 수염이 없다는 점만 달라요."
 나는 깜짝 놀라서 사진을 보았다.
 "그럼, 이 사람이 누구죠?" 이름을 보려고 소녀의 손을 밀어내려 하며 내가 물었다.
 "보면 몰라요? 이 사람 처음 보세요? 니체예요!"
 니체라니! 얘기는 들었지만 나는 아직 그가 쓴 책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다.
 "『비극의 탄생』이나『차라투스트라』도 안 읽어 봤어요? 영원회귀나 초인에 대해서도요?"
 "하나도 못 읽었어요, 하나도." 나는 창피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차라투스트라』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 보세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두뇌가 있기나 한지, 그리고 그 두뇌가 굶주렸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당신의 두뇌를 위한 견실하고 용맹한 양식이에요!"
(p. 435)
 
 
 나의 젊은 시절 중 가장 중대하고, 가장 굶주린 순간에 니체는 나에게 견실하고 용맹한 자양분을 주었다. 나는 푸짐하게 기름을 발랐고, 인간이 스스로 몰락한 상태와 인간에 의해 몰락한 그리스도의 상태에 대해서 너무나 답답함을 느꼈다. 비겁한 자와, 노예가 된 자와, 서러움을 받는 자로 하여금 위안을 얻어 주인 앞에 참고 머리를 조아리며 (우리들이 유일하게 확신하는) 현세의 삶을 인내하게끔 만들기 위해 내세의 보상과 벌을 심어 놓은 종교는 얼마나 교활한가. 나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현재의 삶에서는 하찮은 것을 내놓으면서 내세에서의 불멸이라는 재산을 주도록 알량하게 계산하는 주님의 계획서 같은 종교는 얼마나 약삭빠른가! 얼마나 단순한고, 얼마나 간악하며, 얼마나 인색한가! 그렇다. 천국을 바라거나 지옥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유로울 리가 없다. 희망의 술집이나 공포의 지하 술 창고에서 취하는 우리들은 부끄러운 존재이다. 이것은 깨닫지 못하며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던가! 격렬한 선지자가 나타나 나로 하여금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은 필연이었다.!
(p. 455)
 
 
 인간의 마음은 어둡고 굴북할 줄 모르는 신비이다. 그것은 영원히 입을 벌리기만 하는 구멍 뚫린 독이니, 지상의 모든 강물을 부어 넣어도 그냥 비어 목이 마르다. 가장 큰 희망도 그것을 채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절망으로는 채워질 수 있을까?
(p. 474)

 


  끝없이 펼쳐진 러시아의 대지처럼 나의 작은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나도 역시 의식했다. 내 인생이 마침내 목적의 단일성을 위하게 되리라고, 수많은 형태의 노예 생활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키리라고, 두려움과 거짓과 싸워 이기리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과 거짓과 싸워 이기도록 내가 도와주리라고 나는 맹세했다. 인간은 너무나 오랫동안 불의를 저질러 왔으며,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대지의 모든 아이들에게는 깨끗한 공기와 장난감과 교육을, 여자들에게는 자유와 따뜻한 정을, 남자들에게는 친절과 예우를, 그리고 꼬리를 치는 쇠약한 말과 같은 인간의 마음에게는 한 알의 밀알을 우리들이 마련해 줘야 한다.
  이것이 러시아의 목소리라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으며, 나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p. 561)

 

 

  내 삶에 가장 큰 은혜를 배푼 요소는 여행과 꿈이었다. 죽었거나 살았건, 내 투쟁에 도움이 된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면 나는 아마 호메로스와, 붓다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를 꼽으리라. 첫 번째 인물은 - 내가 생각하기에는 - 기운을 되찾게 하는 광채로 우주 전체를 비추고 태양처럼 평화롭고 찬란하게 빛나는 눈이었으며,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빠졌다가 구원을 받는 한없이 깊은 새까만 눈이었다. 베르그송은 젊은 시절에 해답을 얻지 못했던 나를 괴롭히는 철학의 온갖 문제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며, 니체는 새로운 고뇌로 나를 살찌게 했고,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쳤으며,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힌두교에서는 이른바 구루라고 일컫고, 아토스 산의 수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주어졌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으리라. 그 까닭은 글쓰는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바가 그것을 그가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마치 만물을 항상 처음 보듯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 따위의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하게끔 해주며 아침미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신선한 마음과 분명한 행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라한 한 조각의 삶을 안전하게 더듬거리며 살아가기 위해 하찮은 겁쟁이 인간이 주변에 세워 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향 따위의 모든 울타리를 때려 부수려고 조르바의 나이 먹은 마음에서 회생의 힘을 분출해야 하던 결정적 순간마다 인간의 뱃속보다도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그가 지녔기 때문이었다.
(p. 619)

 

 

  글을 더 많이 쓰면 쓸수록 나는 작품에서 내가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투쟁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깨달았다. 진실한 작가와는 달리 나는 구원을 추구하며 고통스럽게 투쟁하는 인간이엇, 미사여구를 지어내거나 멋진 운을 맞추려는 데서는 기쁨을 얻지 못했으며, 나 자신의 내적인 암흑으러부터 해방되어 암흑을 빛으로 바꿔 놓고, 내면에서 고함치는 무서운 조상을 인간으로 바꿔 놓고 싶었다. 나는 모든 역경을 이겨 내는 인간 영혼의 능력을 보며 용기를 얻으려 했고, 그런 까닭에 가장 숭고하고 힘든 시련을 성공적으로 치러 낸 위대한 인물들을 소생시키기를 원했다. 어렸을 적에 내 눈앞에서 벌어졌던 바로 그런 싸움이 아직도 끊임없이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또한 쉴 새 없이 전 세계에서도 터져 나온다는 현실,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내 모든 작품에서는 두 명의 투쟁자가 항상 주인공이었다. 내가 글을 썼다면, 투쟁을 돕는 유일한 수단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크레타와 터키, 선과 악, 빛과 암흑은 내 아픔 속에서 한없이 싸웠고,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의식하게 된 내 글쓰기의 목적은 크레타와, 선과, 빛을 최선을 다해 도와서 이기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내 작품의 목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p. 628)

 

 

  나는 이곳 마을 학교의 교장입니다. 이곳에서 마그네시아 광산을 운영하던 알렉시스 조르바가 지난 일요일 저녁 6시에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편지를 씁니다. 그는 임종의 고통을 겪는 중에 나를 불러 말했습니다. "이리 와요. 선생님, 내 친구 한 사람이 그리스에서 살아요. 내가 죽은 다음에 그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죽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정신이 멀쩡했고, 끝까지 그를 생각했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한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고요. 그가 잘 지내기를 바라며, 이제는 정신 좀 차리라는 얘기도 하세요. 그리고 혹시 어느 신부가 와서 고해시키고 영성체를 주려고 하면, 저주나 내리고 꺼져 버리라고 해요! 나는 살아가며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사실은 별로 한 것이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죠. 안녕히 주무세요!
(p. 635)

 

 

  언젠가 올리브나무에서 유충을 떼어 손바닥에 놓았던 기억이 난다. 투명한 꺼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보였다. 그것이 움직였다. 비밀스러운 과정은 틀림없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서, 미래의 나비는 아직 갇힌 채로 껍질을 뚫고 햇빛으로 나올 성스러운 시간을 조용히 떨며 기다렸다. 그 나비는 서두르지 않았다. 신의 영원한 법칙과, 따스한 공기와, 빛을 자신 있게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조급했다. 어서 빨리 기적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기를 바랐고, 육체가 무덤에서 나와 어떻게 영혼이 되는지 보고 싶었다. 웅크리고 앉아서 나는 유충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 주기 시작했고...... 보라! 유충의 등이 저절로 찢어지더니 껍질 전체가 꼭대기에서 밑까지 서서히 갈라지고, 날개가 비틀리고 다리는 배에 달라붙어 한 덩어리로 뭉친 채 아직 덜 자란 연둣빛 나비가 나타났다. 그것은 얌전히 꼼지락거리며 따스하고 끊임없이 불어 주는 내 입김을 받아 점점 더 살아났다. 움트는 포플러 잎사귀처럼 파리한 한쪽 날개가 몸에서 저절로 떨어지더니, 길게 펼치려고 경련을 일으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날개는 반쯤 펼쳐진 채로 쭈그러졌다. 곧 다른 쪽 날개도 움직여서 펼쳐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반쯤만 펴진 채로 떨렸다. 인간의 뻔뻔스러움을 지닌 나는 모을 쭈그리고 계속해서 따스한 입김을 '찌그러진 날개에 불어 주었지만, 이제는 돌멩이처럼 뻣뻣하고 맥없이 축 늘어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속이 뒤집혀다.내가 서둘렀기 때문에, 영원한 법칙을 감히 어겼기 때문에, 나는 나비를 죽였다. 내 손에는 시체만 남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비의 시체는 그 후 줄곧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눌렀다.
  인간은 서두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작품은 북활실하고 불완전하지만, 신의 작품은 결점이 없고 확실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영원한 법칙을 다시는 어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나무처럼 나는 바람에 시달리고, 태양과 비를 마음 놓고 기다릴지니, 오랫동안 기다리던 꽃과 열매의 시간이 마침내 오리라.
(p.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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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안정효 / 열린책들 / 350쪽
(2013. 12. 07.)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다르다.
일생동안 그의 영혼의 여행과 고뇌에 대한 기록이다.
신, 종교, 크레타... 그의 영혼이 평생 거쳐 추구했던 삶의 지향점은 어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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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자서전』은 자서전이 아니다. 나 한 개인의 삶은 오직 나에게만 지극히 상대적인 약간의 가치를 지닌다. 그 삶에서 내가 인정하는 가치라고는 그것이 지닌 힘과 끈질긴 인내심에 의존하여, 내 나름대로 <크레타의 경지>라고 이름지은 가장 높은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독자여, 그대는 이 지면에서 내 핏방울들이 남긴 붉은 자취를, 인간과 정열과 사상을 찾아다닌 내 여로의 자취를 찾게 될 것이다.
(p. 7)

 

 

  내 생애에 항상 나를 괴롭히고 채찍질을 한 단어는 언제나 <오름> 하나뿐이었다. 여기에서 진실과 환상을 섞어 가며 나는 산을 오르느라고 남긴 붉은 발자국과 함께 이 오름을 기록하고 싶다. 대지에서 내가 지나가며 남긴 자취는 그 핏자국뿐이므로, <검은 투구>를 쓰고 흙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나는 어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마음이 초조하다. 내가 글로 썼거나 실제로 한 행동들은 무엇이든 다 물에다 쓰고 행하였으므로 벌써 사라졌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내 기억력을 더듬었고, 허공에서 내 삶을 엮었으며, 장군 앞의 병사와 같은 자세로 그리스인에게 이 말을 한다. 그 까닭은 그리스인은 나와 같은 흙으로 빚어졌고, 과거나 현재의 어떤 투자자보다도 나를 더 잘 이해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위에 똑같은 붉은 자취를 남기지 않았던가?
(p. 8)

 

 

  내 삶에서 가장 처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이렇다. 아직 일어설수도 없었던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문턱으로 갔고, 두려움과 갈망을 느끼며 마당의 바람 속으로 내 자그마한 머리를 매닐었다. 그때까지 나는 유리창을 통해서 바깥을 내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었다. 이제 나는 세상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던가! 우리 집 작은 마당이 가없어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마리의 벌이 붕붕거렸고, 취하게 만드는 향기에, 따스한 태양은 꿀처럼 짙었다. 공기는 칼날처럼 번득였고, 그 광채들 사이로 움직이지 않는 날개가 달린 천사 같은 온갖 빛갈의 곤충들이 나에게 거침없이 곧장 달려왔다. 나는 겁이 나서 소리를 질렀고, 눈물이 가득 고여 세계가 사라졌다.
(p. 48)
 
 
 내 말은 거짓도 진실도 아니었으니, 논리와 윤리의 한계를 넘어 경쾌하고 자유로운 뜻을 지닌 말이었다. 혹시 거짓말이라고 누가 따졌더라면 나는 창피해서 울었으리라. 내 손에 든 깃털은 수탉에서 뽑은 것이 아니라, 천사가 준 깃털이 되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깃발을 든 그리스도가 우리 할아버지이며, 공포에 떠는 경비병들은 터키인들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주 훨씬 뒤에,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다음에는 나는 이런 비밀스러운 조작이 <창작>이라고 일컬어짐을 깨달았다.
(p. 92)
 

 글을 쓰는 사람은 억압되고 불행한 숙명을 산다. 그것은 그가 맡은 일의 본질이 어휘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데, 다시 말하면 내적인 격렬한 흐름을 정체시켜야 함을 뜻한다. 모든 어휘는 위대한 폭발적인 힘을 내포하는 견고한 껍질이다. 그 의미를 찾아내려면 인간은 내면에서 폭탄처럼 그것이 터지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안에 갇힌 영혼이 해방된다.
(p. 113)

 
 젊음은 눈멀고 사리를 분별치 못하는 야수이다. 젊음은 먹이를 탐하지만 먹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며, 발길에 채는 행복을 마음만 먹고 주우면 되는데도 줍지 않고, 샘터로 가서 시간이라는 물을 쓸데없이 흘러 말라 버리게 그냥 내버려 둔다. 스스로 야수인 줄을 모르는 야수 - 그것이 젊음이다.
(p. 174) 

 
  위대한 고전 시대의 작품을 보라.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삶의 진동으로 넘친다. 비행의 절정에서 머뭇거리는 수리가 날개를 쳐도 우리 눈에는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것처럼, 고대 조각품은 눈에 띄지 않지만 살아서 움직인다. 예술적 전통을 지속시키고 예술의 미래가 나아갈 길을 마련하는 어느 불멸의 순간에 그것은 시간의 세겹 분출을 고정시켜 완벽한 평정을 이룬다.
(p. 222)

 

 

  절정이란 가장 어렵고 위험한 균형이며, 혼돈 위에 얹힌 순간적인 평정이다. 한쪽이 조금만 더 무거워도 기울어진다.
(p. 231)

 

 

  지성인들이라고 해야 하찮은 시기심과, 시시한 언쟁과, 잡담과, 교만함뿐이었다. 나는 내면의 함성을 쏟아 내어 자신이 터져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덱사메니 광장에 있는 커다랗고 위험한 말벌 같은 문인들이 벌집으로 자주 올라가서 한쪽 구석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나는 잡담을 않고, 술집을 자주 드나들지 않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았으며 - 나는 역겨운 존재였다. 나의 처음 세 가지 비극은 마음속에서 고통스럽게 형태를 감추는 중이었다. 미래의 시구들은 아직 음악이었고, 단순한 음향을 초월하여 언어가 되기 위해 투쟁했다.
  위대한 세 인물 오디세우스,니키포로스 포카스, 그리스도는 내 마음속에서 얼굴을 감추고 내 몸에서 분리되었고, 나 또한 자유가 되게끔 스스로 해방이 되려고 애를 썼다.
(p.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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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의 신화읽는 시간
구본형 / 와이즈베리 / 336쪽
(2013. 11. 28.)

 

 

 

  신화는 인간을 벗긴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원시를 보여 준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성장을 통해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신화를 읽을 때 우리는 그 독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신화라는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와 같다. 만일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전혀 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신화는 원시적 인간이 꾸며낸 어리석은 이야기를 지나지 기초적인 독법을 이해해야 한다. 이 독법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들고 , 어두운 내면의 탐사를 시작해보자.
(p. 11)
 
 
  신화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원시의 철학이다. 그때 그들은 이 사유의 틀로 사람을 이해했고 자연을 이해했고 우주를 이해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미신이라고 불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야만이라고 모멸했다. 그러나 신화는 이야기 속에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는 우주적 진리의 상징이다. 그것을 풀어내면 옷 속에 감춰진 인류의 은밀함에 접근해 갈 수 있다. 나에 체해 나를 보고 싶지 않을 때, 사람을 소화할 수 없어 구토가 일어날 때, 가까운 친구에 대한 염증으로 심장이 죄어올 때, 더 이상 사람의 육욕의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을 때, 인간의 내밀한 본질에 단박 다가가 그 찬란한 갈등을 보고 싶을 때 우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야생의 사유를 필요로 한다.
(p. 18)
 
 
  인간은 기존의 자아를 버리면 어떤 사람으로도 변신하여 살아볼 수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자기경영은 연출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알고 있는 자아를 버려 새로운 자아에 이르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약하여 자신이 그리는 새로운 인물이 되어볼 수 있다.
  우리는 늘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다. 재창조되어 다양하게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속에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의 현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우리의 이름과 가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가면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결국 가면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p. 58)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논란이 많은 책도 드물다. 인간의 속을 까뒤집어놓은 위대한 책이기도 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썼으나 성공하지 못한 쓰레기 아첨물에 불과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군주를 위해 썼지만 군주를 위한 조언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특별한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군주론』은 그래서 거꾸로 읽어야 한다. 다스리기 위해서 읽기보다는 나를 다스리려는 자들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 읽을 때 훨씬 재미있다. 세상에는 『군주론』속의 조언대로 머리를 굴리고 폭력과 잔혹을 통치의 도구와 연장으로 써대는 인물들이 제법 많다. 권력이 조금 있고, 돈이 제법 있는 사람들은 늘 무자비한 폭력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멱살을 거머쥐고 알아서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얄미운 자들의 입을 거세게 때려주는 쾌감을 근육 속에 감춰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쉽게 당하기만 하는 대중 속의 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p. 226)

 

 

  신화는 인류라는 집단이 꾼 꿈을 다룬다. 신화를 해석하면 인간의 꿈, 즉 집단의 무의식에 접근하게 된다. 경영이 인간의 꿈과 무의식을 이해하게 된다면 가장 근본적인 동기부여 방식을 찾아내게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영웅의 삶으로 창조해가는 변화의 여정에 개인들이 스스로 참여하게 할 수 있다. 진화된 동기부여 방식이 스스로를 발견해가는 두려운 모험에 뛰어들 수 있도록 유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p. 317)

 


  인간은 자기 안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는 동물이다. 자신의 인생으로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지 고뇌하는 동물이다. 짐승처럼 살 수도 있고 신처럼 살 수도 있다. 그래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개념 체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계에서 온다"라고 말한다. 즉 신화는 마음이 거처하는 곳, 체험이 있는 곳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신화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p. 325)

 

 

  우리 안에 신이 있다. 신은 우리 안에 자신을 숨겨두었다. 인간은 신이 선물한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담고 태어난 모순 덩어리지만, 영웅적인 내면 여정을 통해갈등과 충돌을 대통합하여 위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동물이다. 그 이야기는 삶이라는 잉크로 쓰여진다. 삶만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위대한 손이다.
(p.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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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2)
천명관 / 예담 / 412쪽 / 374쪽
(2013. 11. 21.)

 

 


  꿈은 깨어지게 마련이고 희망은 부서지게 마련이다. 빠르고 강한 주먹과 찰고무처럼 질긴 근육, 땅을 박차 오르며 찬연히 타오르는 싱싱한 육체, 절댁강자의 여유와 자신감! 그것은 불완전한 실존을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꿈이지만 초월의 욕망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중력의 절망과 육체의 좌절을 경험한다. 심장은 터질 듯 고통스럽고 숨은 턱까지 차오르며 두 다리는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의 육체는 두부보다 무르며 유리보다도 부서지기 쉽다는 것, 또한 그 안에 깃든 정신은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불안한 영혼은 더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숨어든다.
(p. 9)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소룡의 말이다. 그는 또 말했다. 삶의 의미는 그저 사는 것일 뿐이라고. 그의 말대로라면 그것이 어디가 됐든 부서지고 깨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인생일 터인데 삼촌의 경우도 바로 그랬다. 평생 주먹 한 번 시원하게 뻗어보지 못하고 끝내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생의 구석진 곳을 떠돌며 꾸역꾸역 살아남아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모두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비록 짝퉁으로 출발했으나 긴 세월을 거쳐 스스로 인생유전의 고유한 스토리를 완성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표절과 모방, 추종과 이미테이션, 나중에 태어난 자 에피고넨에 대한 이야기이며 끝내 저 높은 곳에 이르지 못했던 한 짝퉁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말이다.
(p. 10)

 

 

  70년대는 다들 뭔가에 매혹된 시대였다. 온 국민은 독재자와 슬레이트 지붕에 매혹되었고 독재자는 수출과 젊은 여자에게 매혹되었으며 우리는 팝송과 이소룡에 매혹되었다. 종태와 나는 홍콩에 간 삼촌을 생각하며 카세트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쿵푸 파이팅>을 자주 들었다. 그것은 이소룡이 죽은 이듬해 자메이카 출신의 남자가수 칼 더글라스가 발표한 노래로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차지할 만큼 세계적으로 히트한 곡이었다. 마치 늑대가 울부짖는 것처럼 오오오호~ 하며 목청을 돋우다 갑자기 폭포수가 쏟아져내리듯 '에브리바디 워스 쿵푸 파이팅'하며 노래가 흘려나오면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한 쾌감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p. 246)

 

 

  살다보면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다들 서로 아는 농담을 주고 받는데 나만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기분, 그래서 왠지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 다들 주변의 열화와 같은 응원을 등에 업고 홈경기를 치르는 데 나 홀로 야유와 적대감에 둘러싸여 어웨이경기를 치르는 기분, 다들 당구장 1번 다이에 모여서 짜장면을 시켜먹으며 신나게 죽빵을 치는데 나 혼자 구석자리에서 사구를 치다 쫑이 난 기분, 그런데 당구장 알바가 쌩 까고 커피도 안 갖다주는 기분, 개새끼! 분명히 눈도 마주쳤는데...... 하는 기분, 그래서 이 세상 전체가 나를 따돌리기 위해 음모를 꾸민게 아닐까 하는 그런 더러운 기분 말이다.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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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이 현실이 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야.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 꿈이 너무 간절하지만 막상 그것을 이루고 나면 별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거든. 그러니까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야. 정말 창피한 건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때 내가 원한 건 네가 계속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거였여. 그래서 너를 홍콩에 보내줬던 거야.
(p. 107)

 

 

  너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니?
  그때까지 삼촌은 정말 꿈을 꾸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삼촌은 그때까지도 이소룡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괴물 같은 현실에 부딪쳐 꿈은 산산조각 나고 싶은 회한에 발목이 잡혀 늘 바닥을 알 수 없는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삼촌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서자의 역할이든 중국집 배달부의 역할이든, 아니면 깡패 역할이든 단독 쇼트 하나 못 받는 단역 배우의 역할이든 삼촌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세상은 무협의 세계와는 달랐다. 세상은 너무나 교묘하고 복잡해 무엇이 정의이고 누가 악당인지 알 수 없었고 삼촌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언제나 서너 발자국 귀에서 허겁지겁 뒤따라가는 처지였다. 정처 없이 떠돌던 자신을 받아준 장 관장과 다른 액션배우들에게 진한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한때의 기분이었을 뿐, 현실은 서른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무명 배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마저도 몸을 다쳐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암울하기만 했다. 그날 밤, 삼촌은 마 사장의 말이 내내 귓가에 맴돌아 눈썹에 안개가 허옇게 내려앉을때까지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p. 112)

 

 

  당장 배가 고파 죽는한이 있더라도 강아지를 사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견센터 앞을 기웃거렸지만 강아지를 고르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내가 콕 짚어 어떤 종류의 개를 사오라고 정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강아지는 어디까지나 내가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니 내 손으로 직접 골라야 했다. 내가 주는 선물을 내가 직접 고를 수 없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알 만한 분들은 다들 알 것이다. 어쩌다 후한 인심을 쓰듯 넘겨주는 그런 선택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지를! 보나마가 개를 잘못 사왔느니,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니 없는 거니, 잔소리를 해댈 게 뻔했다. 게다가 애완견의 종류는 왜 그리 많은지!
(p.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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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는 걸까요? 나는 소설이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부서진 꿈과 좌절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 잡았다 놓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파탄 난 과제,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운명에 굴복하는 이야기,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이야기, 암과 치질, 설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이쓸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이들, 아직도 부자가 될 희망에 들떠 있는 이들은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구하고 왜 누군가는 그 구원없는 실패담을 읽는 걸까요? 그것은 불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가학취미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하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구원의 길이 보이든 안 보이든 말입니다. 만일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좋은 소설이라면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p.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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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
플라톤 / 천병희 / 숲 / 348쪽
(2013. 11. 18.)

 

 

 

  플라톤의 저술들이 2천 년 넘는 세월을 겪고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심오하고 체계적인 사상 덕분이겠지만, 이런 사상을 극적인 상황 설정, 등장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 소크라테스의 인간미 넘치는 아이러니 등으로 재미있고 생동감 넘치게 독자들에게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이 그리스 최고의 산문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플라톤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나는 난해한 직역과 지나친 의역은 피하고, 원전의 의미를 되도록 알기 쉽게 전달하려고 힘닿는 데까지 노력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난삽한 문장을 읽기 좋은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 나은 이해를 위해 플라톤의 번역을 끊임없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p. 9)

 

 

<소크라테스의 변론>

 

  이 작품은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자신에게 제기된 고발사건에 대해 법정에서 자기를 변호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자연현상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고 ‘사론’을 ‘정론’으로 만든다는 자신에 대한 초기의 고발과, 나라에서 섬기는 신들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며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후기의 고발을 구분한다.
  소크라테스는 초기의 고발에 대해 자기는 소피스트도 아니고 자연철학자도 아니며, 가지의 유일한 지식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그런 사람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 과정에서지혜롭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무지하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이들의 미움을 산 것이 화근이 되어 고발당했다는 것이다.
(p. 14)

 

 

  여러분, 죽음을 피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열함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죽음보다 비열함이 더 발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느리고 연로해서 둘 중 더 느린 죽음에 따라잡혔지만, 내 고소인들은 영리하고 민첩해서 둘 중 더 빠른 것, 즉 사악함에 따라잡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법정을 떠나지만, 내 고소인들은 진리에 의해 사악하고 불의한 자들이라는 판결을 받고 떠날 것입니다.
(p. 63)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도 자신감을 갖고 죽음을 맞아야 하며, 착한 사람에게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으며, 신들께서는 착한 사람의 일에 무관심하시지 않다는 이 한가지 진리만은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제 내가 죽어 노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께서 보내신 신호가 나를 어디에서도 말리지 않았던 것이며, 나도 내게 유죄 투표한 이들과 나를 고소한 사람들에게 전혀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p. 68)

 

 

<크리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만약 아테나이의 국법이 ‘우리는 너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교욱받게 헤주었거늘 네가 우리를 뒤엎으려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가 아닌가?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는 진작 이 나라를 떠났어야지, 누릴 것 다 누리고는 이제 와서 이 나라에서 허둥지둥 도주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며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네가 외국으로 망명해서 얻을 게 무엇인가? 우리는 네가 목숨과 자식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정당하게 행동하기를 요구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지 묻는다. 그러자 크리톤이 국벙이 그렇게 묻는다면 자기도 대답할 말이 궁색하다고 말한다.
(p. 69)

 

 

<파이돈>

 

엘리스 출신으로 아테나이에 노예로 팔려왔다가 해방되어 소크라테스의 헌신적인 제자가 된 파이돈이, 스승이 죽은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펠레폰네소스 반도 북동부 플레이우스 시에 살던 에케크라테스를 만나, 소크라테스가 생애의 마지막 몇 시간 동안 친구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다가 어떻게 독약을 마시고 죽었는지 들려준다. 몸은 필멸이지만 혼은 불멸이라는 혼불멸론,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특정 사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이라는 이데아론이 이 대화편의 핵심 내용을 이룬다. 이어서 몸에서 해방된 혼이 저승에 가서 어떻게 재판받고 어떻게 살아가는 지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믿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고상한 모험’이라는 것이다. 이 대화편은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고 침착하게 독배를 받아 마시고 죽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p. 102)

 

 

  냉기가 어느새 허리 있는 데까지 올라오자 그분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을 벗기고 - 그분께서는 얼굴이 가려져 있었으니까요 -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사실상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소. “클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그분께 빚진 것을 꼭 같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네” 하고 크리톤이 말했소.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있는지 살펴보게!”
  그분께서는 이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으나, 잠시 뒤 몸을 부르르 떠셨소. 그래서 그 사람이 그분을 가린 것을 벗기자 구분의 두 눈이 멈추어 있었소. 그래서 그것을 본 크리톤이 그분께서 입을 다물게 해주고는 두 눈을 감겨드렸소.
  에케크라테스, 우리 친구는 그렇게 최후를 맞으셨소. 그분께서는 우리가 겪어본 우리 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혜로우며 가장 정의로운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p. 234)

 

 

<향연>

 

  기원전 384년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대화편은 비극작가 아가톤이 기원전 416년 레나이아 제의 비극 경연에서 처음 우승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베푼 술잔치에서 여러 사람이 에로스에 관해 피력한 견해를 기록한 것이다. 이 대화편은 당시 너무 어려서 그 술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팔레론 출신 아폴로도로스가 술잔치에 참석했던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토데모스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하는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파이드로스는 신화적인 관점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소피스트의 관점에서, 에뤽시마코스는 의사의 관점에서, 아가톤은 시인의 관점에서 에로스를 짤막하게 찬미한다.
  소크라테스는 만티네이아 출신 예언녀 디오티마한테서 더 높은 경지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되었다면서, 성애로 표현되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혼이 시인이나 입법자처럼 아름다움이나 지혜를 낳고 싶어 하는 지적이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의해서는 하나의 아름다운 몸에서 아름다운 몸 전체로, 아름다운 몸에서 아름다움 자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 사랑을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한다.
(p.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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