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안정효 / 열린책들 / 350쪽
(2013. 12. 07.)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다르다.
일생동안 그의 영혼의 여행과 고뇌에 대한 기록이다.
신, 종교, 크레타... 그의 영혼이 평생 거쳐 추구했던 삶의 지향점은 어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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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은 자서전이 아니다. 나 한 개인의 삶은 오직 나에게만 지극히 상대적인 약간의 가치를 지닌다. 그 삶에서 내가 인정하는 가치라고는 그것이 지닌 힘과 끈질긴 인내심에 의존하여, 내 나름대로 <크레타의 경지>라고 이름지은 가장 높은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독자여, 그대는 이 지면에서 내 핏방울들이 남긴 붉은 자취를, 인간과 정열과 사상을 찾아다닌 내 여로의 자취를 찾게 될 것이다.
(p. 7)
내 생애에 항상 나를 괴롭히고 채찍질을 한 단어는 언제나 <오름> 하나뿐이었다. 여기에서 진실과 환상을 섞어 가며 나는 산을 오르느라고 남긴 붉은 발자국과 함께 이 오름을 기록하고 싶다. 대지에서 내가 지나가며 남긴 자취는 그 핏자국뿐이므로, <검은 투구>를 쓰고 흙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나는 어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마음이 초조하다. 내가 글로 썼거나 실제로 한 행동들은 무엇이든 다 물에다 쓰고 행하였으므로 벌써 사라졌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내 기억력을 더듬었고, 허공에서 내 삶을 엮었으며, 장군 앞의 병사와 같은 자세로 그리스인에게 이 말을 한다. 그 까닭은 그리스인은 나와 같은 흙으로 빚어졌고, 과거나 현재의 어떤 투자자보다도 나를 더 잘 이해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위에 똑같은 붉은 자취를 남기지 않았던가?
(p. 8)
내 삶에서 가장 처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이렇다. 아직 일어설수도 없었던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문턱으로 갔고, 두려움과 갈망을 느끼며 마당의 바람 속으로 내 자그마한 머리를 매닐었다. 그때까지 나는 유리창을 통해서 바깥을 내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었다. 이제 나는 세상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던가! 우리 집 작은 마당이 가없어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마리의 벌이 붕붕거렸고, 취하게 만드는 향기에, 따스한 태양은 꿀처럼 짙었다. 공기는 칼날처럼 번득였고, 그 광채들 사이로 움직이지 않는 날개가 달린 천사 같은 온갖 빛갈의 곤충들이 나에게 거침없이 곧장 달려왔다. 나는 겁이 나서 소리를 질렀고, 눈물이 가득 고여 세계가 사라졌다.
(p. 48)
내 말은 거짓도 진실도 아니었으니, 논리와 윤리의 한계를 넘어 경쾌하고 자유로운 뜻을 지닌 말이었다. 혹시 거짓말이라고 누가 따졌더라면 나는 창피해서 울었으리라. 내 손에 든 깃털은 수탉에서 뽑은 것이 아니라, 천사가 준 깃털이 되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깃발을 든 그리스도가 우리 할아버지이며, 공포에 떠는 경비병들은 터키인들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주 훨씬 뒤에,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다음에는 나는 이런 비밀스러운 조작이 <창작>이라고 일컬어짐을 깨달았다.
(p. 92)
글을 쓰는 사람은 억압되고 불행한 숙명을 산다. 그것은 그가 맡은 일의 본질이 어휘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데, 다시 말하면 내적인 격렬한 흐름을 정체시켜야 함을 뜻한다. 모든 어휘는 위대한 폭발적인 힘을 내포하는 견고한 껍질이다. 그 의미를 찾아내려면 인간은 내면에서 폭탄처럼 그것이 터지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안에 갇힌 영혼이 해방된다.
(p. 113)
젊음은 눈멀고 사리를 분별치 못하는 야수이다. 젊음은 먹이를 탐하지만 먹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며, 발길에 채는 행복을 마음만 먹고 주우면 되는데도 줍지 않고, 샘터로 가서 시간이라는 물을 쓸데없이 흘러 말라 버리게 그냥 내버려 둔다. 스스로 야수인 줄을 모르는 야수 - 그것이 젊음이다.
(p. 174)
위대한 고전 시대의 작품을 보라.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삶의 진동으로 넘친다. 비행의 절정에서 머뭇거리는 수리가 날개를 쳐도 우리 눈에는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것처럼, 고대 조각품은 눈에 띄지 않지만 살아서 움직인다. 예술적 전통을 지속시키고 예술의 미래가 나아갈 길을 마련하는 어느 불멸의 순간에 그것은 시간의 세겹 분출을 고정시켜 완벽한 평정을 이룬다.
(p. 222)
절정이란 가장 어렵고 위험한 균형이며, 혼돈 위에 얹힌 순간적인 평정이다. 한쪽이 조금만 더 무거워도 기울어진다.
(p. 231)
지성인들이라고 해야 하찮은 시기심과, 시시한 언쟁과, 잡담과, 교만함뿐이었다. 나는 내면의 함성을 쏟아 내어 자신이 터져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덱사메니 광장에 있는 커다랗고 위험한 말벌 같은 문인들이 벌집으로 자주 올라가서 한쪽 구석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나는 잡담을 않고, 술집을 자주 드나들지 않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았으며 - 나는 역겨운 존재였다. 나의 처음 세 가지 비극은 마음속에서 고통스럽게 형태를 감추는 중이었다. 미래의 시구들은 아직 음악이었고, 단순한 음향을 초월하여 언어가 되기 위해 투쟁했다.
위대한 세 인물 오디세우스,니키포로스 포카스, 그리스도는 내 마음속에서 얼굴을 감추고 내 몸에서 분리되었고, 나 또한 자유가 되게끔 스스로 해방이 되려고 애를 썼다.
(p.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