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것
강수돌 글 / 박정섭 그림 / 너머학교 / 128쪽
(2014. 06. 18.)

 

 


 우리가 가진 말들, 우리가 가진 개념들이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세계입니다. 또 그것이 우리 삶과 세계의 한계이지요. 따라서 삶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일은 항상 우리 말과 개념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하고 또 그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깨우침과 우리의 배움이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서 나타납니다.
(P. 6)

 

 

 사람들이 잘 살려면 경제가 잘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흔히 하죠? 그런데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게 과연 어떤 뜻인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기업이 많은 이윤을 남기고 생산을 많이 하며, 주가가 오르는 것일까요? 가게마다 사람이 많고 장사가 잘 되는 것일까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소비나 저축을 많이 하는 것일까요?
(P. 23)

 

 

  "과거엔 유리잔이 흘러넘치면 가난한 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유리잔이 가득 차면 마술처럼 잔이 더 커져 버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신 말씀이에요. 정말 정확한 비판 아닌가요?
  '트리클다운 효과'와 대비해서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가 있어요. '펌핑업 효과'라고 하지요. 마치 시골 할머니 댁에서 샘물을 뽑아 올리던 펌프처럼 아래쪽 물을 위로 끌어올리는 것과 같아요. 2004년 이후 우리나라 부자의 생성 속도가 세계 1위를 달릴 때 가난한 사람이 가장 많이 늘어났다는 보고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 주지 않나요?
(P. 34)

 

 

  원래 경제란 말은 한자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예요. 중국 수나라 때 왕통이라는 사람이 쓴 <문중자>라는 책에 나오지요.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제한다. 즉 세상을 잘 경영해서 사람들이 잘 먹고살도록 만든다, 이런 뜻이랍니다. 더 쉽게 말하면 경제란 백성(국민)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일이에요. 아주 옛날부터 경국(나라를 다스리다), 제세(세상을 구제하다.), 제민(백성을 구제하다.)등의 말이 쓰였어요. 모두가 '세상의 평화로운 살림살이'를 뜻한 말이었어요.
(P. 57)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돈벌이만 중시하는 기업들이 경영 효율화를 위해 구조 조정을 한닶히고 사람들마저 마치 쓰레기처럼 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반복되면서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외적인 사람이 되고, 반면에 비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정상인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P. 92)

 

 

  나 자신과 세상의 참모습을 숨김없이 파악하려면 '진실에 대한 두려움'부터 없애야 해요. 사실, 진실을 알기가 두렵기도 해요. 왜냐하면, 진실을 알고 나면 나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거든요. 나 자신도 이미 잘못된 체제에 적응해 살고 있고 은연중에 이미 기득권층이 되어 버렸거나 그렇게 되고자 발버둥 치며 살고 있으니까요.
(P. 93)

 

 

  아, 세상살이는 왜 이렇게 복잡할까요?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탐욕이나 환상을 과감히 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동시에 우리 주변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꼬였던 문제가 하나씩 풀리거든요.
  이 모든 문제의 근본 뿌리는 우리가 본심을 잃고 '나 혼자'만 잘 살려고 탐욕에 빠져 인간적인 공동체의 그물망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 세상에 처음부터 쓰레기 같은 존재는 하나도 없지요. 모두 탐욕이 만들어 낸 부산물에 불과해요. 그러니 우리가 끈끈한 정이 흘러넘치는 인간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관계들, 우애와 환대, 연대와 협동, 소통과 공감 등을 회복하기만 하면 그렇게도 꼬였던 문제의 실타래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지 않겠어요?
(P. 95)

 

 

  소비로 돈을 많이 쓸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해요. 다시 말해, 소비 중독이 일중독을 조장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일중독과 소비 중독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맞물려 서로서로 부추기고 있어요. 그 사이에 자본가는 계속 돈을 벌 수 있지만, 노동자나 소비자는 갈수록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죠.
(P. 100)

 

 

  이제 '잘 산다는 것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관한 긴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었군요. 어때요? 잘 사는 것이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란 말,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나요? 굳이 이것을 부자라는 말로 표현하자면, 돈이나 권력이 많은 물질적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소박하고 따뜻하다는  뜻에서 내면의 부자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진정 잘 살기 위해서는 여태껏 사람들 대부분이 믿어 온 잘못된 가치관을 훌훌 털어 내고 우리 내면이 깊은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경청하고 제대로 느끼면서 거기에 충실하며 살아야겠죠.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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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 신재일(옮긴이) / 서해문집 / 264쪽
(2014. 06. 16.)

 

 

  인간의 기술은 자연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훌륭한 창작품인 인간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인간은 국가라 불리는 위대한 리바이어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리바이어던이란 인조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자연인보다 크고 강하며, 자연인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국가의 통치권은 몸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인공적인 '혼'이며, 행정부와 사법부의 관리들은 인공적인 '관절'이다. 그리고 보상이나 처벌은 '신경'이로, 모든 관절과 기관을 국가 통치자의 지위에 묶어서 각자의 의무를 수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모든 구성원의 부와 재산은 모여서 '힘(국력)'이 된다. 그리고 구성원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임무'가 된다 조언자들은 '기억'에 해당하는데 인조인간이 잘 알고 있어야 할 모든 일을 제안하는 역할을 한다. 형평과 법은 인공적인 '이성'이자 '의지'다. 평화는 '건강'이요, 선동은 '질병'이며, 내란은 '죽음'이다. 마지막으로, 이 정치공동체의 각 부분이 처음 만들어직 결합되고 하나가 되게 한 협정과 약속은,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말씀하신 "이제 사람을 창조하자."라는 명령과 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P. 18)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동반할 때 욕망은 '희망'이라 부르고,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동반하지 않을 때에는 '절망'이라 부른다. 어떤 대상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동반된 혐오는 '공포'라 부르며,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해로움이와도 저항을 통해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을 동반할 때 혐오는 '용기'라 부른다.'
  항상 변하지 않는 희망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이며, 항상 변하지 않는 절망은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이다.
(P. 54)

 

 

 자연은 인간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평등하게 창조했다. 비록 때때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신체적으로 더 강인하다거나 정신적으로 더 기민하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인간들 사이의 차이점은 그다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신체의 강인함이란 면에서 볼 때,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다름 사람들과 연대하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자를 죽이기에 충분함 힘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보기에 정신적 능력의 경우 육체의 힘보다 더 평등하다. 분별력이란 것은 경험과 다를 바 없고, 경험은(모두 다 똑같이 집중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P. 93)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국가로의이행을 사회계약으로 설명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이기적 욕망과 더불어 이성의 역할도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애 따라 자신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일으키지만, 인간의 이성은 평화를 이끌어 준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태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 하더라도, 각자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어렵다. 따라서 천부의 자연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연권으로 프기하고 사회계약을 체결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그 국가의 절대적 힘에 의존하는 방법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홉스의 사회계약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맺어진 것이다.
(P. 118)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을 대표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떤 사람 혹은 합의체에 주자고 의견을 모으고 계약을 맺었다면, 그 계약에 찬성했든 반대했든 모든 사람은 그 사람 혹은 그 합의체의 모든 행동과 판단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야만 한다.그래야만 그들이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고, 타인의 침약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국가를 설립함으로써,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통치권이 부여된 사람의 모든 권리와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P. 125)

 

 

  인간은 자유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현혹되기 쉽다. 그리고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적인 권리를 자신들의 개인적인 상속 재산과 천부적인 권리라고 오해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이 주제에 관한 저술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권위가 이와 같은 오류를 뒷받침하게 될 때, 그로 인해 반란이나 정치적 변혁이 초래된다 할지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P. 149)

 

 

  통치자에 대한 백성의 의무는 통치자의 힘이 지속적으로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만 유지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경우, 스스로를 보호할 선천적인 권리는 그 어떤 계약의 의해서도 폐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치권은 국가의 영혼이며, 백성이 통치권에 복종하는 이유는 보호를 받고자 함이다.
(P. 151)

 

 

  백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계층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재판을 행해야 한다. 상층계급 사람들에 대한 편파성은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초래하는데, 우선 죄의 면제는 오만을 낳고, 오만은 증오를 낳는다. 그리고 이 증오는 국가의 파멸을 초래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억압적이고 오만불손한 상층계급을 타도하려는 노력을 낳게 된다.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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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2)
몽테스키외 / 권미영 / 일신서적 / 390쪽
(2014. 06. 08.)

 

 


  기술을 단축시킬 것을 목적으로 개발된 기계라고 해서 항상 유익한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떤 공작품의 값이 알맞고 그것을 사는 사람에게나 제작한 노동자에게나 똑같이 적합한 것이라면 그 제조를 간단히 하는, 즉 노동자의 수를 줄이는 그러한 기계는 유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차가 도처에 설치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그것을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유익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차는 무수한 일손을 놀게 하는 결과가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서 물의 사용을 빼앗고 많은 토지에 풍요를 잃게 했기 때문이다.
(P. 114)

 

 

  종교나 시민법은 주로 인간을 좋은 시민이 되도록 하는데 노력해야 하므로, 양자의 어느 하나가 이 목적에서 벗어날 때에는 다른 하나는 더욱 이것을 지향해야 함은 명백하다. 종교가 억제적이 아니면 아닐수록 시민법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P. 147)

 

 

  인법으로써 규정해야 할 것을 신법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면 신법으로써 규정해야 할 것을 인법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이 두가지 종류의 법은 기원과 목적, 성질에 있어 서로 다르다.
  인법이 종교의 법과 성질을 달리 하는 것은 만인이 인정하는 바이며, 이것은 일대 원리이지만 이 원리 자체가 다른 약간의 원리를 좇는 것이다. 그것을 탐구해야 한다.
  인법의 본성은 모든 우발사에 의해 지배되며 인간의 의지가 바뀜에 따라 변화하는 데 있다. 이에 반하여 종교의 법은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 데있다. 인법은 선에 대하여 규정하고 종교의 법은 최선에 대해서 규정한다.
  종교의 주된 힘은 사람이 그것을 믿는 데에서 생긴다. 반면에 인법의 힘은 사람이 그것을 두려워하는 데에서 생긴다.
(P. 176)

 

 

  인간은 자연적 독립을 포기하고 정법 밑에서 생활하듯이 재산의 자연적 공유를 포기하고 시만법 밑에서 생활한다.
  정법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고 시민법은 소유권을 주었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자유의 법에 의하여, 소유권에 관한 법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할 일을 국가의 지배자가 결정해서는 안된다. 사익은 고익에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폭론이다.그것은 국가의 지배가 문제되는 경우 즉 시민의 자유가 문제되는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재산에 소유권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자가 시민법이 그에게 주는 소유권을 불변적으로 보지하는 것이 항상 공익이기 때문이다.
(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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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1)
몽테스키외 / 권미영 / 일신서적 / 388쪽
(2014. 06. 07.)

 

 


나는 나의 원리를 결코 나의 편견에서 끄집어내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사물의 본성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대부분은 그것과 서로를 연결짓고 있는 다른 진리와의 연쇄 관계를 이해한 뒤라야만 알게 될 것이다. 세부적인 것에 관하여 숙고하면 할수록 원리의 확실성이 느껴지게 될 것이다. 그 세부적인 것에 관해서 나는 모두를 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한심할 정도로 따분하지 않고서야 누구라도 그 모두를 이야기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 6)

 

 

백성들이 계몽되었는가 되지 못했는가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위정자가가 갖는 편견은 국민이 갖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무지 몽매한 시대에는 가장 큰 악을 행할 때에도 사람들은 아무런 의혹을 품지 않는다. 계몽된 시대에서는, 가장 큰 선을 행하는 마당에서조차 사람들은 겁을 먹는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폐해를 감시하며 그 교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위에 교정 자체의 폐해도 알아차린다. 최악을 두려워하여 악을 방치하고 최선을 의심하여 선을 방치한다. 오직 총체를 판단하기 위해서만 부분을 고찰하고, 결과의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서만 원인의 모두를 검토한다.
(P. 6)

 

 

  가장 넓은 뜻에서 법이란 사물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 뜻에서는 모든 존재가 그 법을 가진다. 신은 신의 법을 가지고, 물질계는 물질계의 법을 가지며,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 존재도 그 법을 가지고, 짐승은 짐승의 법을 가지며, 인간은 인간의 법을 가진다.
  맹목적인 운명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 사람들은 심한 부조리를 말했던 것이다. 지적 존재가 맹목적인 운명의 소산이라는 것보다 더 한 부조리가 또 있겠는가? 따라서 원초적 이성이 있는 것이며, 법이란 그것과 여러 가지 존재 사이에 있는 관계, 그리고 이들 여러 가지 존재 상호간의 관계이다.
(P. 12)

 

 

  인간은 사회 생활을 영위하게 되자 곧 열약함의 감각을 잃는다. 일찍이 상호간에 있었던 평등은 끝나고 전쟁상태가 시작된다. 각 개별 사회는 그 힘을 자각하기 시작하고, 그 사실은 민족 사이의 전쟁 상태를 조성한다. 각 사회에 있어서의 개인은 그 힘을 자각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그 사회의 주된 이익을 자기 개인에게 유리하도록 돌리고자 애쓴다. 그것은 그들 사이에 전쟁 상태를 조성한다.
(P. 16)

 

 

  이 두 가지 전쟁 상태가 인간들 사이에 법률을 제정케 한다. 이처럼 광대하고도 서로 다른 민족의 존재가 필연적인 듯한 이 유성의 주민으로서 고찰한다면, 인간은 그 민족들이 상호간 사이에서 가지는 관계이 있어서의 법률을 갖는다. 그것이 만민법이다. 하나의 유지되어야 할 사회에서 생활하는 것으로서 고찰한다면, 그들은 통치하는 자가 통치당하는 자와의 사이에서 갖는 관계에 있어서의 법률을 갖는다. 그것이 바로 정법이다. 그들은 또 모든 시민 상호간에 갖는 관계에 있어서도 법률을 갖는다. 그것이 시민법이다.
(P. 16)

 

 

  군주 정체나 전제 정체가 유지되고 지지받기 위해서는 청렴 독실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전자에서는 법의 힘이, 후자에서는 항상 쳐들고 있는 군주의 팔이 모든 것을 처리하고 억제한다. 그러나 민중 국가에는 다른하나의 태엽이 필요한데, 그것은 덕성이다.
(P. 32)

 

 

  타락하는 것은 탄생되어 가는 국민(젋은 세대)가 아니다. 그것이 망하는 것은 어른들이 이미 부패해 있을 때뿐이다.
(P. 49)

 

 

  공화 정체 속에 사치가 획립됨에 따라 사람의정신은 개인적 이익 쪽으로 향한다. 생활에 필요한 것 외엔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사람들은 조국의 영광과 자기 자신의 영광밖에 바랄 것이 없다. 그렇지만 사치에 의해 타락한 영혼은 다른 많은 요구를 가진다. 얼마 안 가 그것은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법의 적이 된다.
(P. 121)

 

 

  민주 정체에 있어서는 국민이 자기가 바라는 바를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란 바라는 바를 행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국가, 즉 법이 존재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자유란 바라는 것을 행할 수 있고 바라지 않는 것을 강제당하지 않는 데에 있다.
  독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유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명심해 두어야 한다.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시민이 법이 금하는 바를 행할 수 있다면 다른 시민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가능성을 가지게 될 터이므로 근 자유를 잃게 될 것이다.
(P. 185)

 

 

  입법부가 한 번 부패하면 병폐를 고칠 수단이 없다. 다른 입법부가 연달아 뒤를 이을 경우엔, 국민이 현재 있는 입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면 당연히 다음에 오는 입법부에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만약 항상 같은 입법부일 것 같으면, 국민은 한번 그것이 부패하였음을 알았을 때 그 제정되는 법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분노하든가 무관심에 빠지게 될 것이다.
(P. 193)

 

 

  군주는 조롱에 관해서는 극도로 삼가야 한다. 그것이 조심성 있게 행하여 질 때는 친밀해지는 수단을 주므로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러나 신랄한 조롱은 최하급의 신하에 대해서보다도 군주에 대해서 훨씬 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치명적으로 사람을 손상시키는 사람은 군주된 자이기 때문이다. 또 더욱이 군주는 노골적인 모욕을 신하의 한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된다. 군주는 용서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그 지위에 있는 것이지 결코 모욕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P. 247)

 

 

  국민의 정신이 정체의 원리에 어긋나 있지 않을 경우에, 입법자는 국민의 정신에 따라야 한다. 우리들은 자유로이 자연의 천분에 따라서 일을 할 때 바로 최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본래 쾌활한 국민에게 현학의 정신을 주어봤자, 국가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하등 얻을 바가 없다.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진지하게, 또 진지한 일도 쾌활하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P.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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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2)
헨리 필딩 / 김일영  문학과지성사 / 651쪽
(2014. 05. 10.)

 

 


  훌륭한 당신에게 어떤 등장인물이 완벽할 정도로 선량하지 않다고 해서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는 말라고 충고해야겠소. 당신이 그처럼 완벽한 인물을 좋아한다면, 당신의 취향을 충족시킬 책들은 많이 있소. 하지만 우리가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았던 것이오. 솔직히 말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그처럼 완벽한 미덕을 갖출 수 있을지 의심스럽소.
(P. 21)

 

 

  선량한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고 사랑할 정도로 선한 성품을 지닌 사람에게 "유약한 인간에겐 필연적인" 사소한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결점은 혐오감보다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갖고 있는 이와 같은 불완전함보다 도덕적으로 더 유용한 것은 없는데, 이는 이들의 불완전함이 악의적이고 사악한 사람들의 결점보다도 우리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치며 우리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기 때문이오. 좋은 면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의 약점과 결함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장점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 결국 그 추악함을 더욱 잘 드러내주는 법이오. 따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인물에게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어떤 결함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런 결함을 갖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결함이 미친 해약 때문이라도 그 결함을 증오하게 되는 것이오.
(P. 21)

 

 

  자기가 쓴 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만큼이나 절대적인 것이며, 이런 애정만큼 세속적인 이해관계와 잘 부합하는 것도 없을 것이오. 작가의 자식인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인 작가의 재산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 중 상당수는 진정한 효심을 발휘하여 노년의 부모들을 먹여 살릴 수도 있개 때뭄니오. 따라서 독설로 작가의 책을 때 이르게 파멸시키는 중상모략가는 작가의 감정을 상당히 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작가의 재정에도 상당한 손실을 입히는 셈이 되는 것이오.
  마지막 한마디 더 하자면, 책을 헐뜯는 것은 그 책의 저자를 헐뜯는 것이오. 누군가를 사생아라고 부르려면 그의 어머니를 창녀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듯이, 어떤 책을 졸작 혹은 끔찍한 난센스라고 부르면 그책의 저자를 바보라고 부르는 것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오.
(P. 77)

 

 

  의심에는 두 가지 등급이 있는 것 같소. 그중 첫번째 등급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상대방을 간파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데, 이는 그전에 이미 의심하고자 라는 내면적 충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오. 이런 의심 중 최고의 경지에 달한 것은 의심의 대상을 종종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기도 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게도 하는 의심이오.
(P. 138)

 

 

  의심의 두번째 등급은 머리에서 비롯되는 것이오. 이것은 정말이지 눈앞에 있는 것만을 보고, 오직 그것으로부터만 어떤 결론을 유추해해는 능력이오.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행위고, 본 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걸어내는 것은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오. 앞서 말한 의심이 아무 죄없는 사람들에게 철천지원수이듯이, 이번 의심은 조를 지은 사람들에게 철천지원수요. 인간인지라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의심을 나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소.
(P.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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