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김연경 / 민음사 / 232쪽
(2015.5.4.)



  나는 아픈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 하긴 나는 내 병을 통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가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도 잘 모르겠다. 의학과 의사르 종경하긴 하지만 치료를 받고 있지 않으며 또 받은 적도 결코 없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극도로 미신적이다. 뭐, 의학을 존경할 정도로는 미신적이란 소리다.(미신적이지 않을 만큼은 교육도 충분히 받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미신적이다.) 아니, 나는 심술이 나서라도 치료 따위는 받기 싫다. 이런 심보를 여러분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뭐,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물론 이 경우 이렇게 심술을 부려 대체 누구를 골탕 먹이려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할 재간은 없다. 의사의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그네들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아주 잘 안다. 그런 짓을 해 봐야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 자신만 손해라는 걸 내가 제일 잘 안단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그건 심술이 나서이다. 간이 아프다면, 그 녀석 실컷 더 아파 버려라!
(P.9)

 


  정말이지 복수를 할 줄 아는, 대체로 자기 고집을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의 경우, 예컨대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 걸까? 정말이지 일단 복수심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그 시간 동안엔 그들이 전 존재 속에 그 잠정 외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런 양반은 곧장 황소처럼 뿔을 아래로 처박은 채 목표를 향해 곧장 돌진하는데, 벽이 그를 제지하지 않는 한 달리 수가 없다. 뭐 그러니까 나는 바로 이런 즉흥적인 인간이 진짜 인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상냥한 어머니인 자연이 자상한 마음으로 인간을 지상에 낳으면서 보고 싶어 했던 것도 이런 모습의 인간이었으리라. 나는 이런 인간이 배알아 꼴리도록 부럽다.
(P.19)

 


  나 같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진정시킬까? 내가 버팀목으로 삼을 만한 근본적인 원인들이 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근거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것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나는 사유하는 연습을 하고 있고, 따라서 내 경우엔 어떤 것이든 하나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장 다른 원인을, 더욱이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끌어내어,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게 바로 온갖 의식과 사유의 본질이다. 고로, 이게 이미 자연의 법치이기도 하다.
(P.31)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가 누구든 간에 절대 이성과 이익의 명령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길 좋아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할 수 있고 이따금씩은 꼭 그래야만 한다.(하여간 내 생각으론 그렇다.) 자기 자신의 의지적이고 자유로운 욕망, 아무리 거친 것일지라도 여하튼 자기 자신의 변덕, 이따금씩 미쳐 버릴 만큼 짜증스러운 것일지라도 여하튼 자기 자신의 환상, 이 모든 것이 바로 저 누락된 이익, 즉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고 모든 체계와 이론을 끊임없이 산산조각 내 버리는 가장 유리한 이익인 것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저 모든 현자들은 인간에겐 뭔가 정상적인 욕망이, 뭔가 선량한 욕망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일까? 무슨 근거로 인간에겐 반드시 합리적으로 따져 유리한 욕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상상했던 것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독립적인 욕망 하나뿐이다. 이 독립성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든,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간에. 거참, 대체 욕망이라는 게 뭔지......
(P.43)

 


  우리의 욕망이 오류투성이인 것은 대부분 우리의 이익에 대한 시각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오. 우리가 이따금씩 순전히 허튼 수작을 원하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탓에 그 허튼 수작 속에서 뭐든 미리 제안된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길을 보기 때문이오. 그래, 이 모든 것이 해석되어 종이 위에 계산된다면 그때는 물론 이른바 소망이라는 것도 없어질 거요. 실상 욕망이 언제든 이성과 완전히 맞아떨어진다면, 그때 우리는 욕망하는 대신 이성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인데, 이은 예컨대 이성을 간직한 채로 터무니없는 것을 욕망하고 그런 식으로 뻔히 다 알면서 이성에 역행하여 자기에게 해로운 일을 바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P.46)

 


  인간은 무서보다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동물로서 의식적으로 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공학에 종사할, 즉 어디를 가든 영원히 끊임없이 자기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는 이따금씩 갑자기 엉뚱한 쪽으로 빠지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즉흥적인 활동가란 원래 멍청한 족속이지만 그들조차도 이따금씩은, 길이란 어디로 나이든 거의 언제나 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길이 어디로 가 있느냐가 아니라 오직 길이 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행실이 올바른 아이가 공학을 무시한 채 모든 죄악의 어머니로 알려진 파괴적인 무위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P.55)

 


  리자, 즉, 인간이란 자기 괴로움을 세는 것만 좋아하지, 자기행복은 아예 세질 않아. 만약 제대로만 센다면 누구나 자기 몫이 있다는 걸 알게 될 텐데.
(P.149)

  "당신은 왼재...... 꼭 책을 따라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고 그녀의 음성에서는 갑자기 또 뭔가 냉소적인 것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지적에 나는 바늘에라도 찔린 듯 통증을 느꼈다. 이런걸 기대한 건 아니건만.
  나는 그녀가 일부러 냉소의 가면을 썼음을, 그것이 수줍음 많고 마음이 순결한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에 흔히 사용하는 간계임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런 자들은 누가 거칠고 집요하게 자기영혼을 파고들어도 워나 오만하기때문에 초후의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남 앞에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녀가 몇 번이나 뜸을 들이다가 냉소적으로 나오고 끝에 가서야 감정을 드러내 보일 결심을 할 만큼 소심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응당 눈치를 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눈치를 채기는커녕 못된 감정에 휩싸이고야 말았다.
  '그래, 두고 보자.'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P.153)

 


  여러분은 나한테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두 발을 쾅쾅 구를 것이다. 나도 잘 안다. "당신 자신의 얘기만, 당신의 비참한 지하 생활 얘기만 할 것이지, 감히 우리 모두라고 둘러대진 말라."라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 이 모두란 말로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말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생기로운' 셈이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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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바라 오코너 / 신선해 / 다산책방  / 원제 How to steal a dog (2007년) / 264쪽
(2014.04.19.)



  잠시 후 엄마가 한쪽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나는 엄마에게 가만히머리를 기댔다. 다시 아기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앵앵 울기만 하면 어른들이 다 알아서 돌봐주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버리던 때로.
  결국 나는 지금껏 수백만 번은 물었을 질문을 또 하고 말았다.
  "아빠는 왜 우릴 떠났을까요?"
  그 말을 내뱉자마자 엄마의 몸 전체에서 기운이 쑥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도 알고 싶구나."
(P.17)

 


  때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독이 되기도 한다. 나는 생각을 곱씹는 대신 뒷자석에 몸에 말고 누워서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고 온갖 방향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발로 차 문을 받치고 등을 뒤로 기댄 채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때 광고전단지 하나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떠올랐다. 차창 바로 밖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 누군가가 테이프로 붙여둔 것이었다. 희미하게 바랜 글씨는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사례금 500달러.' 그 밑에는 두 눈이 툭 튀어나온 강아지가 혓바닥을 쑤욱 내밀고 있는 사진이 박혀 있었다.
(P.19)

 


  무키 아저씨는 야구 모자를 벗고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말이야, 이 아저씨한테는 신조라는 게 있어. 그게 뭔지 얄려주랴?"
  나는 흥,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한 법이라는 거다."
(P.200)

 


  "아저씨한테 신조가 하나 더 있는데 듣고 싶냐?"
  그러고는 내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때로는 말이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이라고-,"
  나는 귓가에 울리는 아저씨의 말을 애써 흘려들으며 몸을 돌려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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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그림 읽기
현은자 외 / 마루벌 / 2004 / 222쪽
(2015.04.18.)

 

 


 현대 그림책의 특징 중에서 또 하나의 두드러진 점은 시각언어의 역할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림책의 글작가와 그림작가를 겸하면서 그림책의 글과 그림의 관계는 더욱 다양하고 복잡해지고 있다. 이러한 그림책은 때로는 독자에게 그전의 전통적인 그림책을 읽을 때와는 다른 읽기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그림책의 언어는 당황스러움과 애매모호함을 던져 주기도 하나, 바로 그 때문에 그림책 읽기는 더욱 매력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기도 하다.
(P.8)

 


  그림책에서는 그림이 없으면 글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거나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정의하는 진정한 그림책은 라디오를 통해서는 읽혀질 수 없다. 물론 그림이야기책은 대체로 글이 길고 그림이 적으며, 그림책은 글이 짧고 그림이 위주이다.  그러나 그림이야기책과 그림책의 차이가 반드시 글과 그림의 양의 차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상호보완작용을 하면서 통합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고유한 특성의 새로운 도서 장르이다.
(P.18)

 

 

 글을 말하는 이야기와 그림이 말하는 이야기 사이의 거리를 두는 것은 현대 그림책 작가들이 많이 쓰는 방법이다. 그림은 종종 텍스트와 다른 내용을 묘사하고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하는 글과 글미이 함께 어우리면서 글과 그림 각각이 전하는 이야기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독자는 글과 그림의 이야기를 함께 짜맞추어 전체 스토리를 추리해 나가므로 그림책 읽기가 하나의 게임이 된다. 이렇게 글과 그림의 이야기 사이의 거리를 인식하는 것은 그림책 보기의 즐거움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것이 랜돌프 칼데콧과 그후의 모리스 샌닥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서 계승되어 온 진정한 그림책의 개념이다.
(P.20)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이 합쳐져 새로운 하나의 기호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글과 그림이 합쳐질 때 각각이 가진 의미의 합 이상의 의미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미는 글과 그림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은 사슬처럼 연결되어 상호보완적으로 이야기를 함께 이끌어 간다. 따라서 그림책에서 그림을 가리고 글만을 읽어 보거나 반대로 글을 가리고 그림만을 본다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은 독립적이면서 서로에게 의존하며,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존재한다.
(P.38)

 

 

  그림언어의 문법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언어의 문법은 우리에게 언어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게 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림언어의 문법은 우리에게 그림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고, 그 의미를 읽을 있도록 해 준다. 이것은 글과 그림의 창작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글작가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그 상황에 맞는 단어를 고르고 정확한 문장으로 다듬는 것처럼, 그림작가는 그림의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 선, 색, 재질과 같은 기본 요소들을 선택하고, 하나의 그림 안에 그것들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심한다. 이때, 그림언어의 문법은 '창작'을 하기 위한 구성 지침이 되는 것이다.
(P.144)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하나의 완성된 세계이다. 글작가는 언어적인 묘사를 통하여 독자가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림작가는 다양한 미술재료와 기법을 사용하고 다양한 선, 모양, 색, 명암 등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창안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그림책의 글작가와 그림작가는 모두 문화적 예술가이다.
(P.172)

 

 

  현재 그림책들은 작가들이 선택한 다양한 매체로 더욱 풍부한 그림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많은 성인들은 어떤 매체로 그려진 그림책이 어린이들에게 가장 적절한지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가장 적절한 매체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자들이 그림책을 감상할 때 작가들이 사용한 매체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림책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갖게 되며 색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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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박형규 / 문학동네 / 2009 / 558쪽
(2015. 04. 09.)

 

 


  '그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예요. 그런데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이렇게 돼 주었으면 하는 것은 아녜요."
(P.128)

 


  가정생활에서 무엇인가를 꾀하기 위해서는 부부 사이에 완전한 분열이나 혹은 사랑의 일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부관계가 애매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에는 어떠한 계획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싫증이 난 생활을 그대로 몇 해째 계속하고 있는 부부가 꽤 있지만, 그것은 모두 완전한 분열도 일치도 없기 때문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P.369)



  "사람에게 이성이 주어져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예요."
(P.423)

 


  '만약 선이 원인을 갖는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다. 만약 선이 결과를, 보수를 갖는다면 그것도 역시 선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선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 밖에 있는 것이다.'
(P.481)

 


  '나는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사상은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의문과는 나란히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해답은 삶 자체로, 선악을 식별하는 나의 지식 속에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식을 무엇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과 함께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도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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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박형규 / 문학동네 / 2009 / 606쪽
(2015. 04. 06.)

 

 

 

 콘스탄틴 레빈은 형을 해박한 지식과 교육을 겸비한, 고결이라는 말의 가장 높은 의미에 들어맞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한 활동력이 부여된 훌륭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나이를 먹고 보다 가깝게 형을 알게 될수록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에게는 전혀 없다고 느껴왔던 이 만인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활동력이라는 것이 실은 특출한 면모가 아니라 거꾸로 어떤 결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그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를 비롯해서 사회적 복지를 위해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정'이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 하나로 얽매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층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고찰에서 더욱 레빈의 깨달음을 확고하게 한 것은 그의 형이 민중의 행복이니 영혼의 불멸이니 하는 문제를 사고하는 태도가 장기의 승부라든가 새로운 기계의 치밀한 구조를 연구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데 있었다.
(P.12)

 

 

  "그 사람은 옳다! 옳다!" 학 그녀는 중얼거렸다. '물론 그 사람은 언제나 옳다.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다. 그 사람은 관대하다! 그렇다.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난 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신앙심이 두텁고 도덕적이며 정직하고 총명하다고,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아는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 그 사람들은 그가 지난 팔 년 동안 얼마나 내 생명을 압박했는지, 내 안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얼마나 압박했는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살아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그가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가 매사에 날 모욕하고 자기 혼자서 만족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난 애쓰지 않았는가, 내 삶의 의의를 찾아내려고 온 힘을 다해 애쓰지 않았는가?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해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미 남편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됐을 때에는 아들을 사랑하려고 해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때가 왔다. 난 더이상은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P.112)

 


  "나도 성공이 없이는 살 가치가 없다는 둥 얘기하지는 않아. 그러나 지루할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어. 물론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난 스스로 선택한 활동권 안에서는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그것이 설혹 어떤 종류일지라도, 내 손아귀에 들어온 권력은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의 수중에 있는 것보다는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해." 이처럼 자신의 성공에 대한 의식을 뚜렷이 드러내며 세르푸호프스코이는 말했다. "그러니까 권력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도 한층 더 만족하는 거야."
(P.146)

 


  여자라고 하는 것은 남자들의 활동에서 크나큰 장애물이야. 여자를 사랑하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는 건 어려워. 그러나 그런 장애 없이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이 꼭 하나 있어. 바로 결혼이라고 하는거야. '무거운 짐'을 나르면서 두 손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졌을 때뿐이야. 그리고 이것이 결혼이야. 난 그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느꼈지. 말하자면 갑자기 손이 자유로워졌으니까.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고 이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있는 날에는 손이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P.150)

 


  그녀는 이제 전혀 그가 처음 보았을 무렵의 그녀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나쁜 쪽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온몸이 턱 퍼져버렸고, 장금 전 그 여배우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는 얼굴에 미모를 찌그러뜨리는 앙칼스러운 표정이 나타날 정도였다. 그는 아름다운 꽃을 사랑한 나머지 꺾어서 못쓰게 만들어놓고 나서야 겨우 그 아름다움을 깨닫고, 이제는 자기의 수중에서 시들어버린 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 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사랑이 훨씬 강렬했었고 국디 원한다면 자기의 심장에서 그 사랑을 뽑아내버릴 수도 있으리라고 느꼈던 예전보다도, 오히려 그녀에 대해 조금도 사랑을 느끼고 있지 않은 듯한 지금에 와서야 자기와 그녀와의 관계를 도저히 깨뜨릴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P.242)

 


  "너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옳은 말입니다만, 내가 미워하고 있는 자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P.313)

 


  한편 브론스키는 그가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완전히 실현됐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곧 그 욕구의 실현이라는 것이 자기가 기대했던 행복의 산에서 겨우 한 알의 모래를 자기에게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실현은 행복이란 희망의 실현이라느니 하며 사람들이 흔히 하고 있는 그 영원한 착오를 그에게 드러내 보였다.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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