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인문학
김경집 / 꿈결 / 296쪽
(2015. 8. 10.)

 

 

 


  인문학은 그럴듯한 교양이나 적당한 지적 만족을 주는 학문이 아닙니다. 인문학의 기본 정신에는 모든 앎이 인간에서 출발하고 인간으로 귀결되며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인문학의 역할은 결코 과거의 지식을 답습하고 현재의 지식을 구축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문학은 미래의 삶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P.7)

 


  내가 먼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채 아이의 행복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강요된 행복이고 보상을 바라는 희생입니다. 우리 부모가 먼저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며 미래의 삶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추구해야합니다. 세상의 중심은 '나'입니다. 그리고 나는 '자유로운 개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 정의를 외치는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P.8)

 


  우리 대부분은 텍스트에 갇혀 그 안에 내재된 관계를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비단 성어나 속담, 고전뿐만이 아닙니다. 우라가 배우는 지식은 물론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P.17)

 

 

  인문학을 내 삶에 적용하려면 지금 내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현재와 미래는 창조와 혁신, 융합의 시대입니다. 융합이 다양한 학문이 서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창조와 혁신은 기존의 틀을 깨고 튀어나온 새로운 물음에 답을 찾아나서는 데서 비롯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P.37)

 


  사유의 길이는 글로 쓰는 문장의 길이에 비례합니다. 입말은 짧지요. 들숨과 날숨이 있는데, 말은 날숨이에요. 말의길이가 호흡의 길이만큼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글은 쉼표만 먾으면 얼마든지 길게 쓸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욕설을 입에 담을 때,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그 심정을 찬찬히 글로 풀어 보라고 권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P.102)

 

 

  저는 예술이건 고전이건 다음과 같은 사항을 항상 강조합니다. 첫번째는 당대 시점에서 보라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당대 시점에서 다른 것과 맥락을 맞춰 '다양하게' 봐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 시점에서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예술이 단순히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도구로 치부되어선 안 돼요. 그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래를 관측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술이 얼마나 실용적인지 몰라요. 특히 현대 예술은 더더욱 그래요. 그래서 현대 예술을 외면하면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놓치게 되는 셈입니다.
(P.110)



  미래는 늘 새롭게 시작합니다. 그중 가장 먼저 변화가 일어나는 분야가 예술입니다. 예술가는 언인과 결과를 통해 직관으로써 표현합니다. 예술은 언어나 대단한 지각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뭘 읽어 내려고 해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알지 못하면 불편해 합니다. 현대 미술은 막막하고 낯설지만, 낯섦에 계속 부딪혀야만 삶이 틀에 갇히지 않고 확장될 수 있습니다. 나의 삶 혹은 내 아이의 삶이 지금처럼 틀에 갇혀 있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 틀을 깨고 훨씬 더 넓은 세상과 호흡하며 살아가길 원하는지, 예술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P.132)

 

 

  소설에는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선과 방식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살면서 모든 걸 경함할 수 없잖아요. 작가의 시선을 통해 내가 꾸려야 할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이상'을 좇는 데 있습니다. 이상은 현실과 다르지요. 이상은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내 그것을 포기합니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하기 싫다고 하면서 말이지요.그러나 이상이 없으면 삶은 방향성을 잃어요. 우리는 북극성을 손에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방향을 잃지 않고 밤길을 걸어 수 있는 건 북극성 덕분이지요. 지구 축 위에 있어서 늘 제자리를지키고 있습니다.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내 삶의 북극성이 바로 '이상'입니다. 이상이 현실과 부딪히면 깨지고 상처를 입겠지요. 하지만 이상이 없으면 진보도 없습니다. 소설은 우리가 자꾸 잊으려고 하던 이상을 다시 깨우고 불러들입니다. 소설은 비극이건 희극이건, 수준이 높건 낮건 삶과 세상 그리고 인간을 새로운 친밀감으로 바라보게 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소설은 아주 훌륭한 삶의 조미료입니다.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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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히라노 게이치로 / 문학동네 / 217쪽
(2015. 7. 17.)

 

 



  보통 사람들은 책을 읽는 방법을 굳이 남에게서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글을 읽는 행위와, 책이 라는 형식으로 정리된 글을 읽는 행위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요리나 자동차 운전처럼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하며, 조금만 아이디어를 짜내도 독서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P.5)

 

 

  독서란,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으로 인간을 꾸며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그 사람을 바꾸어 사려 깊고 현명하게 만들며 인간성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독서는 즐거워진다.
(P.10)



  독서라는 행위는 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독서는 책을 다 읽었을 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페이지를 넘기며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앞으로 생활에서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
(P.35)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체험이 누구에게나 같은 것은 아니다. 독선에 빠지지 않고 우선 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한 다음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다면, 독서는 그 사람만의 개성적인 체험이 된다.
(P.36)

 

 

  지식을 심화하려면 귀찮아하지 말고 사전을 찾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나는 독서를 할 때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에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나중에 사전을 찾는다. 그때마다 대화를 중단하고 사전을 찾을 수는 없지만, 기억해두었다가 집에 돌아온 뒤에 확인하는 스보간을 들이면 굳이 어휘력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힐 수 있다.
(P.57)

 

 

  중요한 것은 읽는 것을 잠깐 멈추고 '왜?'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런 의문을 갖는 순간, 책은 그 사람에게만 자신의 비밀을 살짝 알려주기 시작한다. 의문이 생기면 대충 넘어가지 말고, 혹은 일방적으로 책의 결함이라고 단정짓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그 구절에 귀를 기울여보자. 설사 그때는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마음에 담아두면 책을 읽은 후에도 그 한 구절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몇 년 후에 '아, 계속 궁금했었는데, 그게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하고 이해될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오랜 시간에 걸쳐 작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난 목소리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P.65)

 

 

  모른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책을 계속 일어나가더라도 이해도는 반감된다. 기억이 아지 않는 부분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 다시 읽어나가는 게 좋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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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
안상헌 / 북포스 / 256쪽
(2015. 7. 16.)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를 하면 할수록 그 양은 늘어가지만 그보다 더욱더 강한 소유욕이 발생하여, 얻고 나서 만족감이 생기기보다는 더 큰 허무감과 더 큰 소유욕이 생긴다고 말한다.그리고 그 소유욕은 끝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기 위해 소유의 노예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충고한다.
(P.39)

 

 

  머릿속에 있는 것을 버려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지식과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쉽게 수용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신의 의견이 틀렸음을 판명되었음에도 다른 이유를 찾아내려 안달한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할 만큼 자존심이 성숙하지 않은 탓이다.
(P.52)

 


  책을 읽다 보면 '정말 그렇구나'라고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올 때가 있다. 그 후에는 완전히 글을 쓴 저자의 논리에 미쳐버려 도저히 그의 울타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질문이 필요하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질문을 하여 읽어야 하는 것이다. 질문은 새로운 답을 위한 최적의 방법이다.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다. 질문 없이 책을 읽으면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그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경우 새로운 것을 얻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를 잃을 것이다.
(P.53)

 


  태권도를 배울 때에도 단계가 있듯이 책읽기에도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많이 읽고 많이 기억하려는 단계이다. 이 단계를 투입과 산출의 비율로 이야기 하자면 산출보다는 투입이 월등한 비율을 차지하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적게 읽고 많이 생각하는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많이 읽고 느끼며 기억했던 것이 누적되었다면 이제는 첫 단계보다는 적게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단계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하는 단계라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내용을 이햐하고 그 논리를 확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 번째 단계는 적게 읽고 많이 쓰는 단계이다.
  글쓰기는 자체가 창조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머릿속에 있던 내용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분야로 확대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글쓰기는 우리의 두뇌를 자극하여 읽은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표출해낼 것인지를 고민하도록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고를 확장히고 지금의 것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글쓰기가 생활화되어야 한다. 
(P.62)

 


  책을 일으면서 사람은 변해간다. 그래서 많이, 꾸준히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손에서 책을 놓는 순간 우리의 변화는 방향을 잃고 허둥댄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삶 속에서 몰입의 즐거움과 창의성을 향한 열정의 나무가 성숙하게 자라는 것이다.
(P.66)

 

 

  책읽기가 지겨워지면 읽는 속도가 빨라진다. 속도가 빨라지면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많아지고 그럴수록 책은 재미가 없어진다. 결국 이 책은 '나와는 맞지 않는 책'이라며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책읽기가 지겨울수록 천천히 읽어야 한다. 차근차근 천천히 읽어야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지겨움이 사라진다.
(P.82)

 


  책을 읽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골머리 앓지 말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불가능한 것을 두고 미친 듯이 고민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일정한 시점이 되면 스스로 그 의미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P.91)

 

 

  책에서 우리가 접하는 문장들에는 집단사고가 포함된 것들이 많다. 어떤 책에서 주장하는 말들은 글쓴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들이라기보다는 그가 읽었던 책들과 들었던 이야기와 경험들이 조합된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 속에서는 집단사고가 개입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읽어야만 한다.
  이때 목적의식적인 태도는 집단사고의 틀 속에서 우리를 구해 낼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그래서 중요한 문장은 의문부호를 갖고 두 번, 세 번 읽어야 한다. 한번은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하고 다른 한번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생각하며 총체적인 관점에서 읽는 것이다. 그래야만 집단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P.108)

 

 

  우리는 아버지 세대들보다 훨씬 많은 돈과 물품을 소유하고 잇지만 우리는 그때만큼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길 때가 많다. 소유와 행복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소유에 목숨을 건다. 때문에 우리는 '행복'이 '소유'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이해하지 못한다.
(P.126)

 

 

  머릿속의 내용들이 정리되어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써야 머릿속의 내용들이 정리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와 반대로 생각해왔다. 이런 착각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한 것이다. 아니 글을 쓸 생각을 못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팬을 들고 아무 종이에나 한번 긁적여보는 것이다.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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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중)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 김연경 / 열린책들 / 385쪽
(2015. 7. 13.)

 

 

 

  내 벗이여, 진정한 진실은 언제나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법이 죠. 이걸 알고 계신가요? 진신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선 진실에다가 반드시 거짓말을 덧대댜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행동해 왔지요. 아마도 바로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여기에, 이 의기 양양한 외침 속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요? 나는 그랬으면 해요. 꼭 그랬으면 한다고요.
(P. 333)

 

 

  나는 언제나 말을 많이 하지만, 다시 말해서 많은 말을 하고 조급해 하지만, 늘 제대로 디질 않아요. 그런데 내가 말은 많이 하는데, 무엇 때문에 제대로 되지는 않는 것인가? 다름아니라, 바로 말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훌룽학 말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짧게 말합니다.
(P.341)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오직 그 때문이죠. 전부 다, 전부 다 그래요! 알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이 순간에 그 사람은 행복해질 겁니다.
(P.367)

 

 

  모든 것이 좋아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좋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거예요. 그들이 자신이 좋다는 걸 알기만 한다면 그들은 좋을 것이지만, 그들이 자신이 좋다는 걸 모르는 동안에는 그들은 좋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게 생각의 전부입니다. 전부, 더 이상은 어떤 것도 없어요!
(P.368)

 

 

  어떤 민족도 아직 과학과 이성을 기반으로 해서 건설된 적은 없었다. 그런 예는, 오직 어리석음 때문에 한순간 그렇게 된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회주의는 그 본질상 벌써 무신론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로 첫 줄부터 사회주의는 무신론적인 지반을 갖고 있으며 오직 과학과 이성의 뿌리 위에서 건설될 생각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성과 과학은 민족들의 삶에서 언제나, 지금도, 창세기에도 오로지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의무만을 수행해 왔다. 민족들은 명령하고 지배하는 어떤 힘에 의하여 대열을 정비해서 움직이지만, 그것의 기원은 알려지지도, 설명되지도 않았다.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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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터브리지의 시장
토마스 하디 / 김의락 / 글모아출판 /  476쪽
(2015. 6. 26.)

 


술김에 부인과 아이를 팔아버리곤 그 후 술은 입에도 안대고

자신의 실수는 후회하고 참회하고 살아가는 남자
하지만 그 술이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쩌면 이성으로 덮어 쓰고 있는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본질에 좀 더 접근 할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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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젊은이는 엘리자베스 제인과 같은 인생관과 삶에 대한 태도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요소가 많다는 생각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생활 가운데 항상 즐거운 삶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한 순간에 불과하며 슬픔과 기쁨은 삶의 한 부분들임을 깨달은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P.83)
  

  "지금 이 순간 그 애의 나에 대한 마음은 나의 그 애에 대한 것만큼 온정에 차 있어. 그 애는 내가 청하기만 하면 여기 이 보잘 것 없는 오두막에서 나와 함께 살거야! 하지만 저녁이 되기 전에 그는 틀림없이 오고 말거야. 그러면 그 애는 나를 멸시하겠지!"
  그의 기분은 반항적이고 빈정대고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의 그것이 이미 아니었다. 인생을 재미있게 혹은 보람 있게까지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완전히 상실해 버린 사람의 납덩어리 같은 무거운 침울함이었다. 그에게는 자랑스럽게 여겨질 그의 마음을 굳게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P.413)

 


  사람의 두뇌에는 용인되지 않는, 졸라대지 않은 유해한 생각들이 제 자리로 되돌아가기에는 앞서 잠시 동안 이리저리 방황하는 바깥방이 하나 있게 마련이다. 이런 생각중의 한 가지가 지금 헨처드의 뇌리 속에 떠올랐다.
(P.428)

 


  남자란 그 사람처럼 아내의 무덤 앞에 최상급의 대리석 비석을 세우고, 실컷 울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혼잣말을 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 여자가 나를 속였어. 나는 이 여자를 먼저 알았던 거야. 배우자로 재치 있는 여인이었어. 이보다 고상한 생활에 충실한 여인은 또 없어"라고 말이요. 그녀가 애정을 표시하는 데도 그녀를 붙들지 않는다면 그로서는 그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 없을 거요.
(P.430)

 


  그는 야심에 찾던 행로를 돌이켜 봄으로써 자기 감정상으로 희생했던 바가 물질적으로 얻었던 바에 못지않게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쓰라린 경험을 했을 뿐 아니라 취소하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는 쓰라림을 첨가했던 것이다. 그는 이 모두를 오래전에 마음 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심을 사랑으로 대체하려는 그의 시도들은 그의 야심 그 자체만큼 완전히 좌절돼 버렸던 것이다. 그의 학대 받았던 아내가 거의 미덕이 되다시피 한 대단히 단순한 기만으로 그것들을 모두 좌절시켜 버렸던 것이다.
(P.443)

 


  그녀가 감사함을 말로서 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의 경험은 그녀의 것과 같은 화사한 한 줄기 빛이 길을 어느 중간지점까지 갑자기 비춰주고 있는 때라 할지라도 유감스런 인간세상을 잠깐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의심쩍은 명예가 지나치게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올바르게 혹은 그릇되게 가르치는 식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자격은 적으면서 많이 부여받고 있다는 그녀의 강렬한 생각은, 훨씬 많이 부여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이 실로 적게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로 하여금 모르게 하지는 않았다.그리고 자신을 행복한 사람 축에 억지로 끼우면서 자기가 예측 할 수 없는 일의 계속성에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때면 그런 중단 없는 평온을 성년기에 계속 부여받는 사람은 그녀였다. 그런데 그녀의 젊은이, 행복은 고통이란 흔한 드라마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화에 지나기 않는다고 가르쳐 주는 듯했다.
(P.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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