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성장소설 (교사가 말하는)
학교도서관저널 / 280쪽
(2015.11.19.)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현실을 잊거나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싶어서이고 글이나 화면을 좇으면서 다른 사람이 짊어진 짐을 뎔여다본다고한다. 그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내가 느낀 점이 있다면 누구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이야기야말로 각자의 인생이 유일무이하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작가가 그토록 골몰한 자신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숨겨진 역사와 사람들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며 먹먹한 감동을 전한다.
(P.30)

 

 

  책은 다양한 관계의 모습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스승이다. 관계를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종종 권하는 책이 <구덩이>다. <구덩이>는 한 사람이 얼마나 신비로운 관계 속에 존재하는지 잘 보여 준다. 마음이 상한 아이를 배시시 웃게 만드는 재미는 물론 말할 것도 없다.
(P.77)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통해 모델 학습을 한다. 그러다 자기 또래들과 학교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친구 관계, 학업 고민, 진로 문제 등으로 다양한 모양의 폭풍우를 만난다. 마지막 성인의 문턱을 넘어설 때까지 폭풍우는 지속된다. 이때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폭풍우에 휩쓸리고 만다. 아이의 가정환경이 불우하다면 가혹한 폭풍우 속에서 중심 잡기는 더 힘들어진다.
(P.138)

 


  진로는 평생을 두고 고민해야 한다. 인생 선배라면 진로 고민을 하는 청소년기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아니라 시작점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
(P.145)

 


  시대를 표현하는 문학작품은 음악과 영상만큼 느낌이 강렬하지도 파급효과가 대단하지도 않다. 글은 읽기도 힘들뿐더러 그 감동을 느기려면 생각해야 하는 수고도 해야 한다. 하지만 영상과 음악이 감동을 즉각적이라 여운이 빨라 사라진다면, 생각거리를 붙잡고 고민해야만 뭔가가 개달아지는 책 읽기는 그만의 특별함이 있다. 영화나 음악처럼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하지만 책 읽기와 그에 관한 생각은 마음의 키를 훌쩍 크게 한다. 몸이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마음의 키도 크게 하는 책 읽기를 해야 하는 이유다.
(P.152)

 


  부모들은 성장하면서 자신들의 품을 벗어나 또래 친구들에게 집착하고, 또래들과 무리 지어 있는 자신의 아이를 낯설어한다. 이제까지 자신이 돌보아 온 아이의 얼굴과 많이 달라서 놀란다. 때론 아이의 모습에서 잊고 싶었던, 이것만을 닮지 않았으면 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할 것이다. 학부모를 만나 보면 그 아이가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이해하고 기다려 주어야 하는데 그런 현명한 어른은 많지 않다. 그 어른들도 그들의 부모나 어른에게 세심한 배려를 받은 적이 없거나 두려움을 극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P.185)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사월의책)에서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과 자기에 대한 타인 혹은 소속 집단의 기대, 평가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타인의 평가와 기대에 자신을 맞추고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 하거나 개인이 원하는 것을 타인이 인정하게 하려고 한다. 즉,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인 '인정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끝없이 투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인정의 대척점에는 '무시'가 존재한다. 개인은 타인으로부터 항상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좌절되면 무시로 인한 수치심이 발생하는데 이는 개인에게 뼈아픈 상처가 되어 자존감에 영향을 미친다. 때때로 일원을 향한 무시는 그 주체가 다수 구성원일 경우 개인에게 '사회적 죽음'과 마찬가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인정'과 '무시'사이에서 개인이 흔들리는 순간, 집단 안에는 '권력'이 태동한다. 개인의 '인정 욕망'을 좌지우지하는 패러다임을 주도하는 자(혹은 집단)가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이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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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 민음사 / 204쪽
(2015.11.16.)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태극기 한 장 태우지 않아.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한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
(P.10)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 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하지만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 거야.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장이라도 떠?
(P.11)

 

 

  한국 애들은 제일 위에 호주인과 서양인이 있고, 그 다음에 일본인과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지. 그 아래는 중국인, 그리고 더 아래 남아시아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사실 호주인과 서양인 아래 계급은 그냥 동양인이야. 여기 사람들은 구별도 못해. 걔들 눈에는 그냥 영어 잘하는 아시안과 영어 못하는 아시안이 있을 뿐이야
(P.85)

 

 

  나더러 왜 조국을 살아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P.170)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으로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 거랑 똑같지 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남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해. 가게에서 진상 떠는 거, 며느리 괴롭히는 거, 부하 직원 못살게 구는 거, 그게 다 이 맥락 아닐까? 아주 사람 취급을 안 해 주잖아.
  난 그렇게 살지 못해.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정말 우스운 게, 사실 절음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수를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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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마이너스
손아람 / 자음과모음 / 528쪽
(2015. 11. 12.)

 

 



  기억은 버릴 수가 없다. 사진처럼 편리하게 구겨버리거나 도려낼 수도 없다. 기억은 스스로 사라진다. 파괴는 불가능하고 분실이 최선이다. 왜 잊으려 애쓰는가?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었음을 깨닫는가? 되찾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기억의 종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개와 같다.
(P.9)

 

 

  우리 시대에는 자백을 받기 위해서 피신문자를 고통으로 미쳐버리게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은 선과 악이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갈리던 때의 구식 전략이다. 새로운 고문은 피신문자에게 그저 세계의 어둡고 흉측한 그늘을 보여준다. 세계 전체가 아미 미쳐버렸다는 것을. 피신문자는 양심적으로 정신분열을 앓거나 양심을 팔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기로에 내몰린다.
  우리 시대 신문관들이 피신문자에게 원하고 또 얻어낸 것은 자백이 아니었다. 자폐였다.
(P.196)

 


  인간을 죽이는 건 깊은 물, 수면제, 면도칼 아니면 중력가속도지. 스스로 죽지 못하니까 그런 것들의힘을 빌려야 해. 전원을 끄거나 눈꺼풀을 닫듯이 죽음을 실행할 수는 없는 거야. 숨을 참아 죽으려 해도 마지막 순간에 불수의근이 작동해서 호흡을 되살려내거든. 인간은 스스로 죽을 수 없도록 설계됐어. 혹시 언젠가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이 들면 내가 지금 한 말을 꼭 떠올리도록 해. 그건 스스로 죽는 게 아니야. 절대로."
(P.199)

 

 

  인간은 불행이 따르면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고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는 법이다. 그리고 불행은 인간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즉 몸과 마음의 긴장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았을 때, 무장강도처럼 불쑥 찾아와 최악의 피해를 남긴다. 그래서 그것이 불행이라고 불린다.
(P.227)

 

 

  투쟁의 논리는 초(超)논리다. 논리학은 잠시 잊어라. 작정한 비논리에 경직된 논리로 대적하다가 패배한다면, 그것이 과연 논리적인 행동일까? 세상에 비논리가 횡행하는 것은, 그것이 논리보다 강력하기 대문이다. 논리에 입각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논리를 경유하는 수단을 염두에 두는 것. 그것이 바로 초논리다. 우리는 초논리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P.376)

 


  자유시장의 권리는 서로 다른 크기를 갖는다. 매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통용되는 자유의 개념에는 서로 다른 자유가 상충할 대 더 크고 강한 자유가 승리를 거둘 자유가 포함된다. 반면 민주적 권리는 모두 크기가 같다. 매매할 수가 없다. 불가침이다. 민주주의는 비키니를 입은 관광객과 비키니를 입은 성노동자에게 똑같은 만큼을 준다. 한 표식만을, 그것은 민주적인 동시에 반자유적이다. 여전히 인류가 풀지 못한 자유의 딜레마. 소수가 독점할 자유가 보장되는 곳을 자유 사회라 불러야 하는가? 모두에게 공평한 자유가 강제되는 곳은 반자유 사회라 불러야 하는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동전의 양면.
  수레의 양 바퀴.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당연한 결론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코 만날 수도 없는 것이다.
(P.383)

 


  살아 있는 대통령이었을 때, 그는 생존의 문제와 자존심의 문제에 순위를 뒀다. 그래서 그는 촛불을 거두어달라고 말했다.
  죽은 대통령이었을 때, 그를 기리는 촛불은 생존의 문제와 자존심의 문제에 순위를 두지 않았다. 그랬다면 바로 거두어들여야 했을 것이다.
(P.426)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왜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름다움을 좇는가?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고,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우주는 질적 대칭과 양적 비대칭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빛과 어둠. 질서와 무질서. 의미와 무의미. 아름다움과 추함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것들이 아름다워졌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구멍이 있다. 우리가 왜 무언가를 선호하게 되는지를 다시 설명해야만 한다. 그냥 이렇게 반대로 말하는 쪽이 훨씬 더 편하다.
  아름다움이 너무나도 드물기에 우리는 그것을 좇는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대번에 홀린다. 세상에 거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주를 부유하는 작은 원소들처럼 그저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플라톤에 한 표를 던진다. 지상에 완전한 아름다움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다 배운 게 아닌가? 부질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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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
더글러스 애덤스 / 공보경 / 이덴슬리벨 / 388쪽
(2015. 11. 10.)

 

 

 

  무언가를 확실히 이해하고 싶을 때 쓰면 제일 좋은 방법은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설명을 하려면 우선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정보를 분류하고 정리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학생이 우둔하고 머리가 나쁠수록 교수님은 지식을 더욱 간단한 개념으로 나누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컴퓨터 프로그램의 본질입니다. 복잡한 개념을 단계별로 나누어 멍청한 기계도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죠. 그 작업을 완성할 무렵에 교수님 스스로도 그 개념을 확실히 익히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교사가 학생보다 더 많이 배운다고들 하죠.
(P.37)

 

 

  더크는 자신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신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조사 작업을 최소화만 수행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게을렀고 사람들의 고지식한 믿음을 편한 쪽으로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략의 핵심은 바로 게으름이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언행을 일삼아야 하는데 정확한 조사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곧 의심을 사게 될 터였다. 예언이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을 예언에 투영하여 스스로 신빙성을 높여나갔다.
(P.68)

 

 

  뛰어난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옛것을 거꾸로 뒤즙은 데서 착안된다는 겁니다. 사용자가 적절한 명령을 내리고 관련 자료를 분석하면 올바른 결론에 이르게 해주는 프로그램들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죠. 문제는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결론이 (아무리 적절한 명령과 정보 분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해도) 사용자가 원하는 결론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P.91)

 

 

  나는 복잡한 자연 현상을 가장 실제에 가깝게 표현해내는 방식이 바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은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며 그 자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모든 악곡은 숫자로 나타낼 수가 있다. 전체 교향곡의 각 악장의 구성부터 가락과 화성을 이루는 음조와 리듬의 패턴, 연주 시 강약조절, 각 소절의 음질과 조화,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정해놓은 방식에 이르기까지 전부 숫자로 표현 가능하다.
(P.230)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관계의 복잡성과 미묘성에 관계없이 각 분류 체계 내에서 숫자 패턴들 간의 내적 관계가 긴밀할수록 그 숫자에서 비롯되는 음악은 점점 만족스럽고 듣기 좋아진다. 사실상 그 관계들이 미묘하고 복잡할수록, 의식할 수 있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 있으수록 여러분 마음의 본능적인 부분, 즉 여러분의 뇌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그 부분(공이 날아오는 순간 순식간에 미분학적 게산을 끝마쳐 여러분의 손이 적절한 위치로 올라가 공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부분)은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음악을 더욱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P.231)

 

 

  복잡한 음악을 들을 때 작용하는 것은 여러분의 의식이 아니라 여러분의 무의식 안에 머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수학 천재다. 모든 이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그 수학 천재는 음악을 들으면서 내밀한 구성요소들의 복잡성과 관계성, 조화를 해석하여 받아들인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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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교실
에리히 캐스트너 / 문성원 / 시공주니어 237쪽
(2015. 11. 7.)

 

 

 

  진정한 삶은 돈을 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되서 시작돼서 돈을 버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을 여러분 역시 잘 알고 있음을 자만하라고 이 얘기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여러분을 겁주려고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로. 여러분은 될 수 있는 한 행복해야 한다! 기쁨에 겨워 그 작은 배가 아플 정도로 웃으라!
(P.21)

 

 

  지혜 없는 용기는 어리석은 것이고, 용기 없는 지혜는 부질없는 것이다! 세계사에는 멍청한 사람이 겁없이 굴거나 영리한 사람이 비겁하게 굴었던 시대가 많이 있다. 그것은 옳은 게 아니었다.
  용감한 사람들이 영리해지고, 영리한 사람들이 용감해질 때에야 비로소 인류의 진보라는 것이 얼마나 자주 그릇되이 인식되어 왔는지 드러날 것이다.
(P.22)

 

 

  선생님이라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굉장한 책임과 의무가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은 일찌감치 침대에 드러누워 녹음기를 틀어 놓고 수업을 받아도 상관없지 않겠어? 아냐, 우리는 우리에게 선생님이 되어 주는 한 인간이 필요한 거지 다리만 두 개 달린 깡통이 필한게 아니라고! 우리를 발전시키려 한다면 자기 스스로가 먼저 발전하는 선생님이 필요한 거란 말이야.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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