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마이너스
손아람 / 자음과모음 / 528쪽
(2015. 11. 12.)

 

 



  기억은 버릴 수가 없다. 사진처럼 편리하게 구겨버리거나 도려낼 수도 없다. 기억은 스스로 사라진다. 파괴는 불가능하고 분실이 최선이다. 왜 잊으려 애쓰는가?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었음을 깨닫는가? 되찾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기억의 종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개와 같다.
(P.9)

 

 

  우리 시대에는 자백을 받기 위해서 피신문자를 고통으로 미쳐버리게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은 선과 악이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갈리던 때의 구식 전략이다. 새로운 고문은 피신문자에게 그저 세계의 어둡고 흉측한 그늘을 보여준다. 세계 전체가 아미 미쳐버렸다는 것을. 피신문자는 양심적으로 정신분열을 앓거나 양심을 팔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기로에 내몰린다.
  우리 시대 신문관들이 피신문자에게 원하고 또 얻어낸 것은 자백이 아니었다. 자폐였다.
(P.196)

 


  인간을 죽이는 건 깊은 물, 수면제, 면도칼 아니면 중력가속도지. 스스로 죽지 못하니까 그런 것들의힘을 빌려야 해. 전원을 끄거나 눈꺼풀을 닫듯이 죽음을 실행할 수는 없는 거야. 숨을 참아 죽으려 해도 마지막 순간에 불수의근이 작동해서 호흡을 되살려내거든. 인간은 스스로 죽을 수 없도록 설계됐어. 혹시 언젠가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이 들면 내가 지금 한 말을 꼭 떠올리도록 해. 그건 스스로 죽는 게 아니야. 절대로."
(P.199)

 

 

  인간은 불행이 따르면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고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는 법이다. 그리고 불행은 인간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즉 몸과 마음의 긴장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았을 때, 무장강도처럼 불쑥 찾아와 최악의 피해를 남긴다. 그래서 그것이 불행이라고 불린다.
(P.227)

 

 

  투쟁의 논리는 초(超)논리다. 논리학은 잠시 잊어라. 작정한 비논리에 경직된 논리로 대적하다가 패배한다면, 그것이 과연 논리적인 행동일까? 세상에 비논리가 횡행하는 것은, 그것이 논리보다 강력하기 대문이다. 논리에 입각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논리를 경유하는 수단을 염두에 두는 것. 그것이 바로 초논리다. 우리는 초논리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P.376)

 


  자유시장의 권리는 서로 다른 크기를 갖는다. 매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통용되는 자유의 개념에는 서로 다른 자유가 상충할 대 더 크고 강한 자유가 승리를 거둘 자유가 포함된다. 반면 민주적 권리는 모두 크기가 같다. 매매할 수가 없다. 불가침이다. 민주주의는 비키니를 입은 관광객과 비키니를 입은 성노동자에게 똑같은 만큼을 준다. 한 표식만을, 그것은 민주적인 동시에 반자유적이다. 여전히 인류가 풀지 못한 자유의 딜레마. 소수가 독점할 자유가 보장되는 곳을 자유 사회라 불러야 하는가? 모두에게 공평한 자유가 강제되는 곳은 반자유 사회라 불러야 하는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동전의 양면.
  수레의 양 바퀴.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당연한 결론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코 만날 수도 없는 것이다.
(P.383)

 


  살아 있는 대통령이었을 때, 그는 생존의 문제와 자존심의 문제에 순위를 뒀다. 그래서 그는 촛불을 거두어달라고 말했다.
  죽은 대통령이었을 때, 그를 기리는 촛불은 생존의 문제와 자존심의 문제에 순위를 두지 않았다. 그랬다면 바로 거두어들여야 했을 것이다.
(P.426)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왜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름다움을 좇는가?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고,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우주는 질적 대칭과 양적 비대칭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빛과 어둠. 질서와 무질서. 의미와 무의미. 아름다움과 추함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것들이 아름다워졌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구멍이 있다. 우리가 왜 무언가를 선호하게 되는지를 다시 설명해야만 한다. 그냥 이렇게 반대로 말하는 쪽이 훨씬 더 편하다.
  아름다움이 너무나도 드물기에 우리는 그것을 좇는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대번에 홀린다. 세상에 거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주를 부유하는 작은 원소들처럼 그저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플라톤에 한 표를 던진다. 지상에 완전한 아름다움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다 배운 게 아닌가? 부질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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