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 강유원 / 이론과실천 / 132쪽
(2016. 03. 11.)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Metternich)와 기조(Guizot),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관은 이 유령에 대항하는 신성한 몰이사냥을 위해 동맹하였다.
  정권을 잡고 있는 적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은 반정부당이 어디 있겠으며, 공산주의라고 낙인찍는 비난을 더 진보적인 반정부 분자들과 반동적인 적에게 도로 던져주지 않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에서 다음 두 가지가 이끌어져 나온다.
  공산주의는 이미 유럽의 모든 세력들에 의해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견해와 자신들의 목적 그리고 자신들의 경향을 전 세계에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소문에 당 자체의 선언으로 맞서야 할 때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발표될 다음과 같은 선언을 기초하였다.
(P.7)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인과 노예, 로마의 귀족과 평민, 중세의 남작과 농노, 동업조합회원과 직인, 간단히 말해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끊임없는 대립 속에서 맞섰으며, 더러는 은밀하게 그리고 더러는 공개적으로 투쟁했는데, 이 투쟁은 언제나 사회 전체의 혁명적 변형이나 투쟁하는 계급들이 공동으로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P.8)



  부르주아 시대는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상황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을 통해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된다. 견고하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래되고 존귀한 생각들 및 의견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것들도 모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신분과 관련된 것들과 정체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 신성한 것은 모두 모욕당하며 마침내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의 지위와 서로의 관계를 냉철하게 응시해야만 한다.
(P.13)



 자신의 처분을 사회에 맡긴 생산력은 더이상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촉진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반대로 생산력은 이 관계에 비해 강력해져 있으며, 이 관계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그리고 생산력이 이 방해를 극복하면 곧바로 부르주아사회 전체를 무질서로 끌고가며, 부르주아적 재산의 존재를 위협한다. 부르주아적 관계는 스스로 만들어낸 부를 포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것이 되어 버렸다. 부르주아 계급은 무엇으로 공황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생산력을 어쩔 수 없이 완전히 없애버림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획득하고 오래된 시장을 더 근본적으로 착취함으로써.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더 전면적이고더 강력한 공황을 준비하고 공황을 예방할 수단을 감소시킴으로써.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제를 쓰려뜨릴 때 사용한 무기들이 지금은 부르주아 계급 자신을 겨누고 있다.
(P.17)



  공산주의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소유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철폐이다.
그러나 현대의 부르주아적 사유 재산은 계급 대립, 즉 일부가 다른 일부를 착취하는 것에 의거하는, 생산물의 산출과 취득에 관한 최후의 가장 완성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하나의 표 현으로 집약할 수 있겠는데, 사유 재산의 폐지가 바로 그것이다.
(P.29)



  《공산당 선언》100주년이 10년 밖에 남지 않았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세계 문학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위대한 천재성을 보여주는 이 팸플릿은 그 신선함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경탄케 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치 어제 쓰여진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이 젊은 저자들(마르크스는 29세였고, 엥겔스는 27세였다)은 그들 이전의 누구보다도, 그리고 어쩌면 그들 이후의 어떤 이들보다도 더 심오하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P.105)



 마르크스에 의해 근래에야 발견되었고《선언》에서 놀라운 솜씨로 적용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은 현실의 검증과 적대적 비판의 공격들을 충분히 견디어냈다. 오늘날 이는 인간 사상의 가장 귀중한 수단들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역사 과정에 대한 다른 모든 해석들은 과학적 의미를 잃어버렸다. 우리 시대에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소화하지 않고서는 혁명 투사뿐만 아니라 박학한 정치 평론가조차도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P.106)



  사회의 경제적 발전의 특정한 단계인 자본주의에 대한 해부학은 마르크스에 의해《자본》에서 최종적 형태를 부여받았다. 그러나《선언》에도 장래 분석의 주요 방향들이 견고하게 그려져 있다.
(P.107)



  역사의 진행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범한 오류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미래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한 데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성숙도를 과대평가한 데에서 연유한다. 1848년의 혁명은《선언》이 짐작한 것과는 달리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되지 않았으며, 독일에게 장래의 거대한 자본주의적 상승의 잠재력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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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 이진우 / 책세상 / 172쪽
(2016. 03. 11.)



<왜 공산당 선언을 읽어야 하는가?>

*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이제는 아무도 되돌아 봐주지 않는 공산주의의 강령을 우리는 왜 지금 읽어야 하는 걸까?
* 우리들에게 북한=공산당=마르크스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 현재 대부분의 책들은 왜 마르크스를 혁명가로 보지 않고 철학자로 보고 있을까?
* <공산당 선언>은 위대한 <자본>이 나오기 이전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이념들로 뭉쳐져 있다.
*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당시 그가 처해있던 현실과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고 있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폐해들에 대한 현실의 냉철한 분석에는 성공했다. 자본주의의 몰락에 따른 새로운 혁명세력인 공산주의의 출현을 예언한 미래에 대해서는 틀리게 분석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현실의 자본주의의 모순속에서 좌절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이 모순을 판단하게 하는 냉철한 눈과 자본주의 바꿀 수 있다는 뜨거운 가슴(열정)을 심어 주었다.
* 그후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자본>의 근간이 되는 주요 이론들에 대한 젊은시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들을 엿볼수 있다.




  이제 마르크스 사상에 '절대적 진리'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공산당 엘리트들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했던 이데올로기의 딱딱한 껍질은 현존 사회주의가 붕괴함으로써 산산조각 났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이가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우리가 여전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문제 제기의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이 이데올로기적 가면을 벗어 던지고 우리에게 '철학자'로 나타나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P.8)



<공산당 선언>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이 연합하여 이 유령을 잡기 위한 성스러운 몰이 사냥에 나섰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들이.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 비판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에서 두 개의 결론이 나온다.
  공산주의는 모든 유럽 세력에게서 이미 하나의 권력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목적 그리고 의도를 공공연하게 전 세계에 밝히고 공산주의 유령이라는 동화에 당 자신의 선언으로 맞서야 할 적기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세습 귀족과 평민, 남작과 농노, 동업자 조합원과 직인, 요컨대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부단히 대립했으며,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투쟁을 벌여왔다. 이 투쟁은 항상 전체 사회의 혁명적인 개조로 끝나거나 투쟁 계급들의 공동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지난 시대를 돌아볼 때 우리는 거의 어느 시기에나 사회가 여러 계층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있으며 사회적 지위들은 다양한 등급으로 차등화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봉건사회가 몰락하면서 탄생한 현대 시민 사회는 이 계급 대립을 폐지하지 않았다. 이 사회는 다만 새로운 계급들, 새로운 억압 조건들, 새로운 투쟁 형태들로 낡은 것들을 대체했을 뿐이다.
(P.16)



  부르주아지의 발전 단계마다 이 단계와 일치하는 정치적 진보가 병행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에서는 억압받는 신분 계급이었고, 매뉴팩처의 시기에는 신분제 군주국이나 절대 군주국에서 귀족에 대한 평형추이면서 대군주국들의 주요한 토대였다. 그리고 마침내 현대적 대의제 국가에서 그들은 대규모 산업과 세계 시장이 갖추어진 이래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사업을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P.18)



부르주아지가 봉건주의를 타도할 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지 자신들을 겨누고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에게 죽음을 가져올 무기만을 만들어 낸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무기를 들게 될 사람들, 즉 현대의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를 낳은 것이다.
(P.24)



  지배를 쟁취했던 과거의 모든 계급은 자신들의영리를 얻기 위한 조건에 전체 사회를 예속시킴으로써 이미 획ㄷ그한 사회적 지위를 다지려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소유권 획득 방식 그리고 이와 함께 지금까지의 전체 소유권 획득 방식을 버림으로써 사회적 생산력을 획득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것으로 지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종래의 모든 사적인 안전과 사적인 보장을 파괴해야 한다.
(P.31)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도처에서 기존의사회적, 정치적 상태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했다.
  이 모든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소유 문제를, 그 발전 정도오 상관없이 운동의 근본 문제로 내세웠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모든 국가의 민주 정당들의 연합과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P.59)



<해제 - 철학자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공생주의로>



  현대인들이 노예라는 말을 죽도록 싫어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이 예언은 사실일 수도 있다. 노예라는 말을 혐오한다는 것이 노예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나의 실존 근거가 나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이 노예적 삶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은 과거의 노예들만큼이나 노예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보지 않기 위해 노예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희망과 파괴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본주의의 현실이 대부분인 노동자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는 혁명적 실천력을 배양하고 싶었을 것이다. 노예들이 자신의 실존을 통해 더 이상 훼손될 수 없는 인간성의 뿌리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모주가 자유롭고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역설적인 역사의 논리이고, 얼마나 아름다운 인류의 희망인가.
(P.115)



  이제는 아무도 공산주의를 유령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무서운 전염성을 가진 이데올로기적 병원균으로 여기지도 않으며, 제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 주체들로 파악되었던 노동자들조차 공산주의의 이념을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이념에 대한 동경마저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의 이념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예리하게 분석한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은 모두 해소된 것일까? 만약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현실적 문제를 은폐하는 수많은 기제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여전히 훼손하는 문제들을 함축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희망과 비판이 방향이 될 수 있는 이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 이념의 일상화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P.117)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연합'의 구성원이 되며,1847년에는 역사 및 사회이론의 토대 위에 당 강령을 서술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 강령은 파리와 유렵의 다른 주요 도시들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8년 2월에 '공산당선언'이라는 제목을 달고 팸플릿 형태로 출간된다. 그러나 당시 이 강령은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P.123)


  마르크스는, 그가 스스로를 그렇게 이해한것처럼. '혁명적' 사상가이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무엇보다 인간 해방의 문제를 '철저하게' 사유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하게 밝인 마르크스의 철학적 방향은 그의 전체 생애와 저서를 관류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는 것'이다.
(P.128)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적 실천을 찾아 나선 마르크스의 여정은 구체적 '인간'에서 출발하여 '민중'을 거쳐 '프롤레타리아'에 도착한다. 인간 해방의 과정에서 '철학'은 이 해방의 머리이며, '프롤레타리아'는 가슴이다. 철학과 프롤레타리아는 불가피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프롤레타리아를 지양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의 실현 없이는 지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적 실천의 주체로 설정한 <공산당선언>에 이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는 왜곡된 인간, 억압받는 인간, 온갖 불의를 당하는 인간, 즉 무의존재로 전락한 인간에 대한 상징이다. 마르크스의 '급진적' 사유는 이러한 소외의 문제를 뿌리부터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뿌리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 라는 마라크스의 통찰을 기억한다면, <공산당선언>이 노동자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강령이기에 앞서 인간 해방에 관한 철저한 성찰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P.135)



  공산주의는 '생산 수단의 공유'를 통해 지배 구조를 폐지하는 한편, 모든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산 수단을 공유하고 관리하고 독점하는 사회조직이 오히려 더욱 폐쇄적인 절대주의 국가를 산출한다는 역설은 공산주의 이념을 더욱 비현실적인 허구로 만들어놓았다.
(P.144)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다음의 명제로 요약된다. "인류에게는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만이 항상 설정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이미 존립하거나 또는 적어도 생성되는 과정에 있는 곳에서만 과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P.152)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공산주의 이념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하나의 허구로 폭로된 지금, 공산주의는 본래 자본주의의 전제 조건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인간 해방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정말 역설이다. 그것은 또한 피할 구멍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 현실에서도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판만이 희망을 잉태한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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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
권용선 / 너머학교 / 132쪽
(2016. 3. 8.)


 

너머학교 열린교실 시리즈 4번째 권용선 선생님의 책 읽기 이야기
2015년 성인 한 명이 1년 간 읽은 책은 9.1권 고등학생 8.9권, 중학생 19.4권 초등학생은 70.3권
초등학교 때 책을 읽던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 다 어디로들 사라진 걸까?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입시라는 지독한 환경에 휩싸여 점점 더 책을 읽는 수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입시에서 벗어난 성인들이 왜 책을 읽지 않는 것일까?
어린시절 부모와 학교의 강요에 의해서 시작한 독서활동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꾸준한 독서활동을 위해서는 당연히 아이들 스스로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먼저 깨닫게 해주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하며
그런 깨달음을 위해 아이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




  진심으로 귀 기울인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고? 아주 간단해. 일단 누군가가 내게 이야기를 하면 최대한 집중해서 열심히 듣는 거야. 그래야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이나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거든.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을 땐, 어떤 해답을 바라기도 하지만 그보다 공감이나 동의를 바라는 경우가 많으니까.
  상대방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건성으로 듣거나 딴 생각을 하게 되면, 적절하게 만응할 수 없겠지.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잘 듣는지 딴 생각을 하는지 금방 알아처리거든.
(P.22)


  생각해 보면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읽고 있는 셈이야. 그런데 '본다'는 것과 '읽는다'는 건 좀 다른 것 같지? 본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어떤 모습 자체를 그야말로 보는 것이라면, 읽는다는 것은 좀 더 주의를 기울여서 들여다보는 것, 그 안에 담긴 의미라든가 의도까지도 이해하는 것을 뜻해.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어떤 사물이나 모양, 글자의 의미나 그 속에 숨은 뜻을 이해하려고 애쓰면 더 많은 것들이 우리 눈에 보인단다. 그만큼 더 많이 알게 되는 거고, 무엇인가를 자꾸 읽어 나가다 보면, 말 못하는 사물이나 다른 생명들의 이야기도 들었던 모모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몰라.
(P.30)



  프랑스의 유명한 소서가인 다니엘 페나크는 이렇게 말했어.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
  시간을 훔치다니, 대체 어떻게? 친구들이 해야만 하는 모든 일과 사이사이에는 언제나 자투리 시간이 있기 마련이야. 그 시간을 훔치는 거지. 책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니까. 매일 하루에 10분씩만 책을 본다면 열흘이면 100분, 한 달이면 300분이라는 시간이 생기지. 300분이면 5시간! 웬만한 책 한 권은 뚝딱, 읽을 수 있는 시간이잖아?
  그러니 친구들, 오늘부터라도 숨어 있는 시간을 샅샅이 찾아내고 과감하게 훔쳐서 책 읽는 즐거움에 한번 흠뻑 빠져 보지 않을래?
(P.109)



  뭔가 잘 읽기 위해서는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을 사용해야 한다는 얘기는 꼭 기억해 줘.
  이 두 가지만 잊지 않는다면 친구들이 앞으로 세성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단다.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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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1
조지 엘리엇 / 이봉지, 한애경 / 민음사 / 448쪽
(2016. 3. 5.)


 

  톰과 매기에게 인생은 변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 전반부에 지녔던 생각과 사랑이 언제나 삶의 일부가 되리라 빋었던 그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유년 시절이 없다면,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을 그렇게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 혀 잛은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풀밭 위에 앉아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따던 꽃들이 매년 봄 똑같이 다시 싹트는 대지가 없다면, 가을 울타리에 똑같이 맺히는찔레나무 열매와 산사나무 열매가 없다면, 귀중한 곡식에 아무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새'라고 부르던 저 똑 같은 방울새가 없다면 말이다. 모든 것을 알고,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런 달콤한 단조로움처럼 가치 있는 신기함이 어디 있겠는가?
(P.70)



  "여자는 다 남자보다 까다로운 것 같아." 매기가 말했다. "글레그 이모는 이모부보다 훨씬 까다롭고, 엄마가 아빠보다 날 더 야단치시잖아."
  "글쎄, 너도 언젠가는 여자 어른이 되겠지. 그러니까 넌 그런 얘기 하면 안 돼." 톰이 말했다.
  "하지만 난 똑똑한 여자가 될 거야." 매기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오, 그렇겠지. 눈꼴시게 젠체하는 여자 말이야. 모두 널 싫어할 거야."
  "하지만 톰 오빤 날 미워하면 안 돼, 그럼 오빤 아주 나쁜 사람이 될 거야. 난 오빠 동생이니까."
  "그래, 하지만 네가 마음에 안 들게 굴면 미워할지도 몰ㄹ."
  "하지만 오빤 날 미워하지 않을 거야! 오바 마음에 안들게 하지 않을게. 오빠한테 잘할 거야. 누구에게나 잘할거야. 정말 나 미워하지 않을 거지, 그치, 오빠?"
(P.247)



  한번은 필립이 책에서 눈을 떼고 벽난로를 쳐다보았다. 그는 호기심 많은 두 눈을 자신에게서 떼지 못하는 매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필립은 털ㅇ리버의 여동생이 오빠와는 달리 아주 귀여고 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에게도 여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다. 그녀으 까만 논동자가 왜 동물로 변해 버린 공주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지 그는 궁금했다. 충족되지 못한 지식과 채워지지 않은 사랑을 바라는 갈망이 그녀의 눈에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P.300)



  어른과 아이들이 순간적인 감정의 불꽃 속에 같이 결합되려면, 합금이 되는 금속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반드시 산산조각으로 흩어질 것이다.
(P.312)



  내가 일자리를 구해 주었으면 하겠지. 그래, 그걸 탓하진 않겠어. 뭔가 널 위해 해봐야겠는데, 요즘 절은이들은 잘살면서 힘든 일은 하려고 하지도 않잖아. 걷기도 전에 뛸 생각은 금물이라고, 그러니까 네가 현제 어떠 사람인지 알아야 해. 나이는 열여섯 살 소년에, 뭐 하나 제대로 익힌 게 없어. 너 같은 일꾼은 얼마든지 있다고. 마치 슬데없이 쌓인 자갈처럼 말이야.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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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 박홍규 / 문예출판사 / 320쪽
(2016. 3. 3.)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대표작을 21세기 한국에서 삶을 버티어 내고 있는 우리들이 꼭 읽어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로 역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밀의《자유론》은 또한 소수 독재자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기보다도, 다수의 대중 지배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에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대중의 민심이라는 것이 지배하는 것에 대응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책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중민주주의나 포퓰리즘 등의 논의에 도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이다."(p.19)
또한 이 글을 쓴 밀의 이야기 중에서도 또 다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사회가 강제와 통제라는 방법으로 개인을 대하는 태도를 절대적으로 규제하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 사용 수단이 법적 형벌이라는 형태의 물질적 힘이거나 여론이라는 도덕적 강제여도 무방하다. 그 원리란 인류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으로 어떤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보장받는 유일한 근거는 자기보호Self-protection라는 것이다. 문명 사회의 어느 구성원에 대해, 그의 의사에 반해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란, 타인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는 경우 뿐이다.
(P.42)"
  현재 한국에 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가 무엇인지, 나 자신이 자유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책을 읽으며 나라탓, 정치탓, 남탓 보다는 우선 자기 자신을 먼저 돌이켜 볼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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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고전’이라고 하는 게 사실 읽히지 않을 정도로 재미 없는 것도 사실이고, 특히 지금 우리에게 그런 게 왜‘고전’으로 읽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책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런‘고전’중에서도 이 책《자유론》만큼은, 비록 소설처럼 재미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자유’를 체제와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삼아온 20~21세기 대한민국에서‘고전’으로서의 가치,‘ 원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남북한 대립을 비롯해 수많은 대립적인 의견이 상충하는 우리 현실에 그 모든 의견의 평화공존을 위한 최소 조건의 틀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미 수많은 자유국가에서는 그런 틀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라는 것이다.
(P.8)


  무엇이 참된 사상이냐, 무엇이 참된 진리냐 하는 물음에 밀은 확실하게 답하지 않는다. 아니 당연히 답이 있을 수 없다. 사실 그런 답을 자신 있게 주장한 사람들치고 엉터리 예언가에 그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참된 사상이나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자 수단이 완벽하게 자유여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자유가 있어야 독창적인 사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상이란 그것이 자유롭게 펼쳐져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정신 풍토는 아직도 근대 이전 사문난적의 시대이고 지적 노예 상태다. 밀은 모든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상의 자유가 없는 우리에게 다른 자유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돈의 자유뿐이다. 아니 돈의 노예뿐이다. 반공과 자본의 획일적인 노예뿐이다. 그 밖에 다른 자유는 없다. 지적 노예상태에서는 사상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이 책의 내용 전부다.
(P.12)


​  이 책에서 전개되는 모든 논의가 직접 지향하는 숭고한 기본 원리는,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 빌헬름 폰 훔볼트
《국가의 영역과 의무Sphere and Duties of Government》

  이 책 첫머리에 인용된 훔볼트의 말은《자유론》을 지배하는 원리인 인간의 다양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사상
의 자유가《자유론》의 주제다.《 자유론》은 5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 ‘서론’첫 문단에서 그가 말하는 자유란‘시민적·사회적 자유’이고,
그 책의 주제란“사회가 합법적으로 개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이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고 민주주의가 수립된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자유 문제는 민주주의라는‘다수의 폭정’하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이어받은 주장이다.
(P.26)



  1장에서 밀은 자유를 세 가지로 나누고 그 첫 번째를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고 했다. 이를 중심으로 다루는 2장에서 밀은 철학자답게 진리를 찾으려면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P.54)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의 특별한 해악은, 전 인류의 권리를 강탈한다는 것과 같다. 즉 현존 세대와 마찬가지로 미래 세대, 또 그러한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강탈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고 하면, 인류는 오류를 진리와 바꿀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반대로 그 의견이 그르다고 해도 인류는 마찬가지의 엄청난 이익, 즉 진리가 오류와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진리에 대한 더욱 명확한 이해와 더욱 생생한 인상을 상실하게 된다.
(P.59)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 고칠 수 있다. 단순히 경험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경험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를 밝히려면 반드시 토론이 필요하다. 잘못된 의견과 관행은 점차 사실과 논의에 복종하게 되지만, 사실과 논증이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려면 먼저 그것이 인간 정신 앞에 제시되어 판단되어야 한다.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낼 평가 없이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는 사실이란 거의 없다.
(P.65)

 

  진리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주장에 맹종할뿐인 사람들의 진실한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오로지, 또는 주로, 위대한 사상가들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한 높은 지적 수준에 이르게 하기 위해, 위대한 사상가를 만드는 경우와 같은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다.
(P.87)

  어떤 사실을 자기 관점에서만 보려는 사람은 그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고, 누구나 그에게 반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반대쪽에서 주장하는 이유를 논박할 수 없다면, 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느 의견을 택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 경우 합리적인 관점이란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고, 스스로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권위가 지도하는 바에 따르거나, 보통 사람들처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쪽에 기울게 된다.
(P.92)

 

 

  밀은 3장에서 행동의 자유에 대해 설명한다. 즉 사상 활동만이 아니라 모든 정신 활동에서 개인은 그 의견에 따라 개인 자신의 방식으로 행동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경우 특히 개인은‘그가 무엇을 하는가’라는점에서만이아니라,‘ 그가어떤특징을갖는사람인가’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므로, 개인의 개성이 다양하게 발전되어야 한다. 즉 무조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의 존중을 주장한다.
(P.126)

  인간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색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내면에 있는 개성적인 모든 것을 파멸시켜 획일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있지 않고,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하여 설정되는 범위 안에서 개성을 양성해 그 힘을 발휘하게 하는 데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것을 하는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동일한 과정에 의해 인간생활도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며 활기를 띠게 된다. 나아가 그것은 고상한 사상과 숭고한 감정에 더 많은 자양분을 공급하고, 모든 개인이 인류에 속하는 것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무한히 생각하게 만들어 인류와 결합하는 유대관계를 강화한다.
(P.141)

 


  전체적 국가 교육은 오직 국민을 틀에 집어넣어 서로 너무나 흡사하게 만들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국가가 국민을 정형화하는 틀은, 결국 국가권력을 장악한 우월한 세력 — 군주건, 승려계급이건, 귀족계급이건, 현재 대중의 다수파이건 — 이 좋아하는 것이기때문에, 그 교육이 효과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국민 정신에 대한 압제가 확립되며, 그 압제는 자연적 추세로서 국민의 육체에 대한 압제를 유발한다.
(P.225)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개인의 정신적 발달과 향상이라는 이익을 뒤로 돌리고, 세부의 사소한 사무를 처리하는 행정 기능, 또는 경험에서 얻게 되는 사이비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원하는 국가, 또한 국민을 위축시켜 국가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 (비록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국가는 머지않아 다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국민이 위축되면 어떤 위대한 일도 실제로 성취할 수 없고, 또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전한 기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기구를 더욱 원활하게 운영하려고 한 나머지, 스스로 배제한 바로 그 구성원의 활력의 결여로 인해, 결국은 그러한 기구가 쓸모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241)

 

 

  연고와 물질의 사회에서 개인의 정신적 자유란 있을 수 있는가? 연고로 숨 막힐 듯이 철저히 짜이고, 오로지 물질 추구를 향해 역시 숨 막힐 듯이 치열하게 짜인 경쟁사회에서 개인의 자유, 그것도 의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이 문제가 될 여지나 있는가? 밀이《자유론》1~2장에서 묻는 그런개인의 정신적 자유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자유란 재산의 자유, 기업의 자유, 그리고 교육의 자유라는 이름과 하나처럼 주장되는 학교 경영의 자유 따위가 아닌가? 그게 우리가 언제나 말하는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자유 아닌가? 내 재산, 내 회사, 내 학교를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자유론》에 덧붙여 밖에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정당? 그것은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한 사적 족벌당이지 정강이나 정책의 조직이 아니다. 따라서 언제나 이합집산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회에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개성이고 다양성이다. 따라서 밀이《자유론》3장에서 말하는 정신적 자유의 기본인 개성과 다양성이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이고, 오로지 인간성의 획일화, 평준화, 기계화만이 존재한다. 아니다. 물질의 경우는 다르다. 적어도 지위와 재산과 학력의 우열화가 있다. 어쩌면 용모도 다르다. 얼짱과 몸짱의 우열화가 있다. 억대 스타와 몇십만 원대 엑스트라의 우열화가 있다. 사회 전반의 양극화가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으로는 유사하다. 모두 연고와 물질의 노예라는 점에 다르지 않다.
(P.255)

 

 

  밀이《자유론》첫 부분에 인용한“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훔볼트의 말은《자유론》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다. 훔볼트는 19세기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유기적이고 인간적인 언어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목표를 인간의 개성에 따른 다양한 발전으로 보았다.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면 흔히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훔볼트는 그것을 국가와 정치의 목표로 주장한 것이다. 사실 훔볼트나 밀에게는 교육과 정치가 일치한다.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P.283)

 

 

  밀《자유론》의 핵심 원리는‘다양성’이다. 획일이나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배격한다. 문제는 그 다양성이 대립하는 경우의 조정 원리인데, 이를 밀은‘타자 피해의 원리’로 설명한다. 즉 어떤 개인의 행동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관련되는 경우 그것은 절대적인 자유여야 하고, 그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만 제한될 수 있다는 원리다. 타인에게 손해를 가하지 않는 한 누구나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게 자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이 아무리 위험한 사상을 가져도 자유고, 어떤 악취미를 가져도 자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도, 동성애자도 자유다. 그것이 설령 개인에게 정신적·육체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그 개인이 성인이고 그 자신에게만 고통을 준다면 자유라는 것이다. 가령 그것이 음주라든가, 끽연과 같은 기호인 경우는 물론이고 동성애나 변태애라고 해도 그것을 법이나 여론으로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타인의 이익이나 행복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경우에는 당연히 사회의 권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권력의 근원인 다수자의 의지가 소수자의 이익이나 행복을 억압할 수도 있다. 특히 여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다수자의 폭정은 인간의 마음을 노예화하는 것이므로 단연코 배격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상과 언론의 완전한 자유가 특히 요구된다. 밀의 주장은 바로 그러한 사상의 자유를 완벽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P.284)

 

  앞에서 지적했듯이 밀의《자유론》에는 문제도 많다. 우선 각 장의‘해설’에서 지적한 것들을 다시 요약해보자. 밀은 개인만이 관련된 행동에 대해서는 권력이나 사회가 어떤 간섭도 할 수 없고, 그런 간섭은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순수하게 개인만 관련된 행동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과연 그렇게 확연히 구분되는 행동이 있을 수 있는가? 나아가 그런 구분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인가? 타인에게 끼치는 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고 그런 해가 생기는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는 경우에 자유의 범위는 대단히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특히 밀이 그런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 미성숙자나 미개사회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밀이 미개사회라고 한 당대의 식민지에서는 자유가 아니라 전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한 것은 제국주의자로서 식민지의 전제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었다.
(P.292)

 

 

  밀은 흔히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낭만주의)를 결합시켰고, 그런 점에서 선배인 훔볼트나 괴테와 같이 풍부하고 자발적이며 다면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합리적인 자율적 인간을 추구했다. 그리고 사상과 의견의 자유에서 관용, 다양성, 인간성이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한 밀《자유론》의 핵심은 20세기에도 살아남았고, 21세기에도 살아남으리라.
(P.299)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대두된 자유주의의 변태와는 관계없이 자유 자체는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문제다. 밀이《자유론》에서 언급한 사상의 자유를 비롯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자유가 문제다. 특히 사상의 자유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의해 제한되고 있고, 언론의 자유도 독점적인 대언론사의 경영 자유로 오해되고 있고, 그런 언론에 의해 밀이 가장 우려한 자유의 적대적 상태인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또한 다양성을 민주국가의 원리로 삼아야 하거늘 우리의 현실, 특히 교육 현실은 다양성을 죽이는 획일성으로 치닫는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모두 개성과 다양성을 잃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밀의《자유론》에서 배워야 할 논점이 확실해졌다.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밀이 말하는 자유의 길이다.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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