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 이진우 / 책세상 / 172쪽
(2016. 03. 11.)



<왜 공산당 선언을 읽어야 하는가?>

*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이제는 아무도 되돌아 봐주지 않는 공산주의의 강령을 우리는 왜 지금 읽어야 하는 걸까?
* 우리들에게 북한=공산당=마르크스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 현재 대부분의 책들은 왜 마르크스를 혁명가로 보지 않고 철학자로 보고 있을까?
* <공산당 선언>은 위대한 <자본>이 나오기 이전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이념들로 뭉쳐져 있다.
*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당시 그가 처해있던 현실과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고 있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폐해들에 대한 현실의 냉철한 분석에는 성공했다. 자본주의의 몰락에 따른 새로운 혁명세력인 공산주의의 출현을 예언한 미래에 대해서는 틀리게 분석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현실의 자본주의의 모순속에서 좌절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이 모순을 판단하게 하는 냉철한 눈과 자본주의 바꿀 수 있다는 뜨거운 가슴(열정)을 심어 주었다.
* 그후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자본>의 근간이 되는 주요 이론들에 대한 젊은시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들을 엿볼수 있다.




  이제 마르크스 사상에 '절대적 진리'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공산당 엘리트들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했던 이데올로기의 딱딱한 껍질은 현존 사회주의가 붕괴함으로써 산산조각 났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이가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우리가 여전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문제 제기의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이 이데올로기적 가면을 벗어 던지고 우리에게 '철학자'로 나타나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P.8)



<공산당 선언>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이 연합하여 이 유령을 잡기 위한 성스러운 몰이 사냥에 나섰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들이.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 비판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에서 두 개의 결론이 나온다.
  공산주의는 모든 유럽 세력에게서 이미 하나의 권력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목적 그리고 의도를 공공연하게 전 세계에 밝히고 공산주의 유령이라는 동화에 당 자신의 선언으로 맞서야 할 적기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세습 귀족과 평민, 남작과 농노, 동업자 조합원과 직인, 요컨대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부단히 대립했으며,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투쟁을 벌여왔다. 이 투쟁은 항상 전체 사회의 혁명적인 개조로 끝나거나 투쟁 계급들의 공동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지난 시대를 돌아볼 때 우리는 거의 어느 시기에나 사회가 여러 계층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있으며 사회적 지위들은 다양한 등급으로 차등화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봉건사회가 몰락하면서 탄생한 현대 시민 사회는 이 계급 대립을 폐지하지 않았다. 이 사회는 다만 새로운 계급들, 새로운 억압 조건들, 새로운 투쟁 형태들로 낡은 것들을 대체했을 뿐이다.
(P.16)



  부르주아지의 발전 단계마다 이 단계와 일치하는 정치적 진보가 병행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에서는 억압받는 신분 계급이었고, 매뉴팩처의 시기에는 신분제 군주국이나 절대 군주국에서 귀족에 대한 평형추이면서 대군주국들의 주요한 토대였다. 그리고 마침내 현대적 대의제 국가에서 그들은 대규모 산업과 세계 시장이 갖추어진 이래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사업을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P.18)



부르주아지가 봉건주의를 타도할 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지 자신들을 겨누고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에게 죽음을 가져올 무기만을 만들어 낸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무기를 들게 될 사람들, 즉 현대의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를 낳은 것이다.
(P.24)



  지배를 쟁취했던 과거의 모든 계급은 자신들의영리를 얻기 위한 조건에 전체 사회를 예속시킴으로써 이미 획ㄷ그한 사회적 지위를 다지려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소유권 획득 방식 그리고 이와 함께 지금까지의 전체 소유권 획득 방식을 버림으로써 사회적 생산력을 획득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것으로 지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종래의 모든 사적인 안전과 사적인 보장을 파괴해야 한다.
(P.31)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도처에서 기존의사회적, 정치적 상태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했다.
  이 모든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소유 문제를, 그 발전 정도오 상관없이 운동의 근본 문제로 내세웠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모든 국가의 민주 정당들의 연합과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P.59)



<해제 - 철학자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공생주의로>



  현대인들이 노예라는 말을 죽도록 싫어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이 예언은 사실일 수도 있다. 노예라는 말을 혐오한다는 것이 노예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나의 실존 근거가 나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이 노예적 삶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은 과거의 노예들만큼이나 노예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보지 않기 위해 노예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희망과 파괴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본주의의 현실이 대부분인 노동자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는 혁명적 실천력을 배양하고 싶었을 것이다. 노예들이 자신의 실존을 통해 더 이상 훼손될 수 없는 인간성의 뿌리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모주가 자유롭고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역설적인 역사의 논리이고, 얼마나 아름다운 인류의 희망인가.
(P.115)



  이제는 아무도 공산주의를 유령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무서운 전염성을 가진 이데올로기적 병원균으로 여기지도 않으며, 제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 주체들로 파악되었던 노동자들조차 공산주의의 이념을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이념에 대한 동경마저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의 이념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예리하게 분석한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은 모두 해소된 것일까? 만약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현실적 문제를 은폐하는 수많은 기제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여전히 훼손하는 문제들을 함축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희망과 비판이 방향이 될 수 있는 이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 이념의 일상화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P.117)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연합'의 구성원이 되며,1847년에는 역사 및 사회이론의 토대 위에 당 강령을 서술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 강령은 파리와 유렵의 다른 주요 도시들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8년 2월에 '공산당선언'이라는 제목을 달고 팸플릿 형태로 출간된다. 그러나 당시 이 강령은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P.123)


  마르크스는, 그가 스스로를 그렇게 이해한것처럼. '혁명적' 사상가이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무엇보다 인간 해방의 문제를 '철저하게' 사유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하게 밝인 마르크스의 철학적 방향은 그의 전체 생애와 저서를 관류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는 것'이다.
(P.128)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적 실천을 찾아 나선 마르크스의 여정은 구체적 '인간'에서 출발하여 '민중'을 거쳐 '프롤레타리아'에 도착한다. 인간 해방의 과정에서 '철학'은 이 해방의 머리이며, '프롤레타리아'는 가슴이다. 철학과 프롤레타리아는 불가피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프롤레타리아를 지양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의 실현 없이는 지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적 실천의 주체로 설정한 <공산당선언>에 이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는 왜곡된 인간, 억압받는 인간, 온갖 불의를 당하는 인간, 즉 무의존재로 전락한 인간에 대한 상징이다. 마르크스의 '급진적' 사유는 이러한 소외의 문제를 뿌리부터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뿌리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 라는 마라크스의 통찰을 기억한다면, <공산당선언>이 노동자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강령이기에 앞서 인간 해방에 관한 철저한 성찰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P.135)



  공산주의는 '생산 수단의 공유'를 통해 지배 구조를 폐지하는 한편, 모든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산 수단을 공유하고 관리하고 독점하는 사회조직이 오히려 더욱 폐쇄적인 절대주의 국가를 산출한다는 역설은 공산주의 이념을 더욱 비현실적인 허구로 만들어놓았다.
(P.144)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다음의 명제로 요약된다. "인류에게는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만이 항상 설정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이미 존립하거나 또는 적어도 생성되는 과정에 있는 곳에서만 과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P.152)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공산주의 이념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하나의 허구로 폭로된 지금, 공산주의는 본래 자본주의의 전제 조건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인간 해방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정말 역설이다. 그것은 또한 피할 구멍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 현실에서도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판만이 희망을 잉태한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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