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1
서머싯 몸 / 송무 / 민음사 / 518쪽
(2019. 8. 17. ~ 8. 31.)
그렇지 않아도 긴 소설인데 거기에 또 서문까지 붙여 더 길게 늘어뜨리게 되어 부끄럽다. 작가야말로 자기 작품에 대해서 말하기는 가장 부적합한 사람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저명 소설가인 로제 마르탱 뒤가릐가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고 있다. 프루스트는 프랑스의 한 잡지에 자신의 위대한 소설을 논하는 무게 있는 논문 한 편이 실리기를 원했다. 그런데 자기 소설에 대해서는 자기가 누구보다 잘 쓰리라 생각하고 자신이 직접 책상 머리에 앉아 논문을 썼던 것이다. 그런 다음 역시 문필가인 젊은 친구 하나에게 자기가 쓴 글을 그 젊은이가 쓴 것처럼 이름을 붙여 잡지 편집자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젊은이는 부탁대로 했는데 며칠 뒤에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 〈당신의 글을 실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작품에 대해 그처럼 피상적이고 둔감한 비평을 실었다가는 마르셀 프루스트 씨가 저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작가들은 보통 자신의 작품에 민감하여 호의적이 아닌 비평에 대해서는 화를 내는 경향이 있지 만, 그렇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들은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인 자신의 작품이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 점을 생각하면서, 더러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대목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쁘게 생각하기보다는 본래의 생각을 완전히 표현해 내지 못한 점을 훨씬 더 괴롭게 느끼는 법이다. 완벽함을 지향했으나 거기에 도달 하지 못했음을 참담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P.5)
극작의 경험을 통해 나는 간결성의 가치를 배웠다. 나는 두 해 동안 쉬지 않고 작업을 했다. 책의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도 몰랐다. 이것저것 한참 생각해 보고 난 뒤에야〈재속에서 나온 미인>이라는 「이사야서」에서 나오는 말을 생각해 냈는데 적절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 즈음에 이 제목을 누군가가 이미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제목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스피노자의 『윤리학』가운데 한 권의 제목을 골라 내 소설의 제목을 『인간의 굴레에서』라 붙이게 되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제목을 붙일 수 없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또 하나의 행운이었던 것 같다.
(P.9)
갓난아이는 자기 몸이 자신 의 일부임을 알지 못한다. 주변의 사물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 발가락을 가지고 놀면서도 그것이 옆에 있는 딸랑이가 아니고 제 몸의 일부임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점차 고통을 통해서 제 육체의 실재를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과정에도 같은 체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 육체를 독립적이고 완전한 유기체라고 의식하게 되는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같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자신을 완전하고 독립적인 개성으로서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대체로 사춘기에 오지만, 그렇다고 자기와 남들의 차이를 분명히 의식할 정도까지 발달한다고는 할 수 없다. 인생의 행운아는 오히려 벌통 속의 벌처럼 자신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행 복하게 살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다 같은 활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다 같은 즐거움을 누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성령강림절 다음 월요일에 햄프스테드 히스 공원에서 춤추는 사람, 축구 시합을 구경하며 소리 지르는 사람들, 팰 맬 가의 클 럽 창문에서 왕의 행렬을 구경하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러한 사람들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건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다.
필립은 제 불구의 발이 불러일으키는 조롱을 통해 순진한 유년을 거쳐 쓰라린 자의식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상황은 퍽 특이하여 일반적인 경우에는 잘 들어맞는 기성의 규준도 그의 상황에는 잘 들어맞지 않았다. 따라서 혼자 힘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 책을 많이 읽어 마음속에는 갖가지 생각이 가득 차 있었는데, 반쯤밖에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을 더 많이 발동시켰다.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 수줍은 성격 밑 저 안에서 무엇인가 자라고 있었다. 어렴풋이나마 필립은 그것이 자신의 개성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놀랄 때도 많았다. 어떤 일을 이유도 모르고 하고 나서 나중에 생각하게 될 때에야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P.80)
필립에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책 읽는 습관 때문에 홀로 될 수밖에 없었다. 독서를 안하고는 배길 수 없게 되어 친구들과 한동안 어울리고 나면 곧 피곤해지고 조바심이 났다. 책들을 섭렵하여 아는 것이 늘수록 우쭐한 기분이 들었고, 정신은 늘 긴장 상태에 있었으며, 친구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출 줄을 몰랐다. 친구들은 그가 잘난 척하는 게 못마땅했다. 별것 아닌 것들만 잔뜩 알면서 뭘 잘난 척하느냐고 비꼬았다. 필립에게는 유머 감각이 발달하고 있었다. 자기에게는 상대방 약점을 잡아내어 신랄하게 꼬집어주는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독설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 때문에 상대방이 그를 미워하면 몹시 기분 나빠하는 것이었다. 처음 입학 했을 때 당했던 굴욕 때문에 자연히 동료들을 멀리하게 되었고 그런 태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늘 남들의 공감을 못 사는 일만 하면 서도, 그 자신 인기가 있었으면 하고 내심으로 바랐다. 남들은 인기를 얼마나 쉽게 얻던가. 인기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인기 있는 애들에게는 더 빈정대기도 하고, 사소한 농담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지만, 처지가 바뀔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팔다리만 멀쩡하다면 학교에서 제일 미련한 애하고도 기꺼이 처지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필립은 기이한 버릇에 빠졌다. 아주 좋아하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남의 육체에 자신이 영혼을 집어넣고, 그의 목소리로 말하고 그의 웃음으로 웃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하는 모든 짓을 상상 속에서 해보았다. 어떤 때는 상상이 너무 생생해서 자기가 정말 딴사람이 된 것처럼 여겨 지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빈번하게 그는 환상의 행복을 즐겼다.
(P.118)
일행은 언덕 기슭을 따라 소나무 숲을 걸었다. 소나무의 향긋한 내음에 필립은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근한 날이었다. 이윽고 높은 곳에 도달하니 햇빛에 빛나는 라인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끝없이 뻗은 들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저 멀리에 도시들이 보였다. 들판 한가운데로 은빛 강물이 띠처럼 구비구비 흐르고 있었다. 필립이 알고 있는 켄트 지방에는 이처럼 넓은 공간이 드물어서-바다에서만 유일하게 수평선을 볼 수 있었다-지금 눈앞의 이 아득한 거리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뭉클한 감정이 갑자기 벅차올랐다.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때가 바로 딴 감정과 섞이지 않고, 순수한 심미감만을 느낀 최초의 순간이었다. 세 사람은 벤치에 앉고 다른 일행은 먼저 갔다. 두 여자가 독일어로 뭔가 정신없이 이야기하는 동안, 필립은 가까이 여자들이 있다는 것도 잊어 버리고,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즐겼다. 「아, 정말 행복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P.155)
인생에 좋은 게 두 가지가 있네. 생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가 그것이지. 프랑스에서는 행동의 자유가 가능해.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 다만 생각은 딴 사람들처럼 해야 하지. 독일에서는 행동은 딴 사람처럼 해야 하지만 생각은 마음대로 할 수 있네. 두 가지가 다 좋은 것들이지. 내 개인으로서는 생각의 자유를 더 중시하네. 한데 영국엔 둘 다 없지. 다들 인습에 짓눌려 살아.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없어. 민주주의 나라이기 때문이야. 하기야 미국은 더 심하겠지
(P.158)
그가 무엇보다 동경하였던 것은 세상 경험이었다. 그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소설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준 것을 즐겨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 자신이 바보같이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세상만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불행한 재능이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꿈꾸던 이상과는 전혀 달랐다.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것은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환상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비참 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주입되어 온 진실 없는 이상들만 가득 차 있어 현실에 접촉할 때마다 멍들고 상처 받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어떤 공모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선택해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이상적인 책들, 그리고 망각의 장밋빛 아지랑이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나이든 사람들의 대화, 이 두 가지가 공모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읽은 모든 것, 자기가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 그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은 인생의 십자가에 그들을 때려박는 못이 된다. 이상한 것은 쓰라린 환멸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저마다, 억제할 수 없 는 내부의 어떤 큰 힘에 의해 그 환멸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해이워드를 사권 것은 필립에게 최악의 일이었다. 헤이워드는 자신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만사를 문학적인 분위기를 통해서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실하다고 착각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관능을 당만적 감정이라고 잘못 알았고” 우유부단을 예술적 기질로 잘못 알았 으며, 게으름을 철학적인 초연함이라고 잘못 알았다. 그의 정신은 속물적으로 세련을 추구하였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감상(感f剔)의 금빛 안개 속에서 실물 크기보다 약간 크게, 흐릿한 윤곽으로 보았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누가 거짓말을 한다고 지적하면 거짓말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는 관념주의자였다.
(P.200)
「난, 내 시작품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네. 인생이란 쓰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있는 것이니까. 내 목표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그것이네. 삶의 순간순간에서 그 순간의 정서를 음미하면서 말야. 난 내 글쓰기를 말이지, 존재로부터 기쁨을 흡수한다기보다 거기에 기쁨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행위라고 보네. 후세의 문제는 말일세-후세 따원 상관없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니 자넨 재미있을 거네만, 아다시피 난 가난해서 조그만 다락에서 살고 있어. 미용사들하고 카페의 보이들이랑 짜고 나를 등쳐먹는 상스러운 여자하고 말이지 영국 독자를 위해 쓰레기 같은 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욕먹을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그림을 보고 논평을 쓰기도 하지. 하지만 자네,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뭩지 말할 수 있겠나?」
「글쎄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죠」
「아닐세. 자네 스스로 답을 발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라 필립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요컨대,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너도 남에게 하라는 것인가?」
「그런 셈이죠」
「기독교로구먼」
「아네요」 필립은 분개해서 말했다. 「그건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보편적인 도덕률일 뿐이죠」
「보편적인 도덕률 같은 건 없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께서 술에 취해 지갑을 여기에 놓고 갔는데 제가 집어갔다고요. 제가 왜 지갑을 선생님께 돌려드려야 할까요? 이건 경찰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 지옥이 무섭고, 착하게 살면 천당에 갈 테니까 그렇겠지」
「전 둘 다 믿지 않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칸트가 정언명령(定言命令)을 생각해 냈을 때도 그랬어. 자넨 신앙을 버렸지만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는 버리지 않았어. 어느 모로 봐도 자낸 아직 기독교인이야. 그러니 만약에 하늘에 신이 있다면 자넨 틀림없이 상을 받을 걸세. 전능하신 분이 교회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을 리 없어. 자네가 신의 법을 지킨다면, 내 생각엔, 자네가 믿든 믿지 않든 신은 상관하지 않을 거네」
(P.348)
「자네, 클뤼니 미술관에 가봤나?거기 가면 페르시아 양탄자들이 있네. 색조가 절묘하기 짝이 없고 무늬가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한지 보기만 해도 절로 즐거운 감탄이 나오지. 그걸 보면 자넨 동방의 신비와 관능미가 부인지 알 수 있고, 하피즈의 장미와 오마르의 술잔을 볼 수 있네. 하지만 거기에서 곧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지. 자넨 금방 인생의 의미가 무어냐고 묻지 않았나. 가서 페르시아의 양탄자를 보게, 그러면 조만간 답을 얻을수 있을 걸세」
「난해하군요」필립이 말했다.
「난 취했네」크론쇼가 말했다.
(P.357)
「저 말야. 와서 내 그림 좀 봐주지 않겠나? 의견 좀 듣고 싶네」
「아니, 그런 거 않겠네」
「왜 말인가?」필립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이런 부탁은 그들끼리 으레하는 것이었고 아무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클러튼은 어깨를 으쪽했다.
「사람들은 비평을 부탁하면서도, 듣고 싶어하는 건 칭찬뿐이야. 그뿐 아니고, 비평이 무슨 소용이 있나? 자네 그림이 좋든 나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겐 중요하네J
「아냐,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건,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이야. 그건 마치 우리 신체의 기능과 같아. 소수만이 그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네. 그리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생각해 보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캔버스에 뭔가를 담으려고 하면서 영혼의 땀을 쏟아붓는가? 그런데 결과는 뭐지? 십중팔구 살롱에 낙선하고 마네. 입선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저 지나치면서 고작 몇 초 동안 슬쩍 보고 말 뿐이지. 운이 좋으면 어느 바보가 그림을 사다 벽에 걸어놓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 작자는 별로 보지도 않네. 식당 방 식탁을 별로 보지 않듯이 말야. 비평이란 화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걸세. 비평이란 객관적인 판단인데, 객관이란 화가와는 상관없는 일이거든」
「화가는 자기가 보는 대상에서 독특한 감각적 인상을 받아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네. 그런데, 왠지는 몰라도, 화가는 선과 색채로서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거야. 음악가도 마찬가지지. 시의 한두 출을 읽으면 어떤 음들의 결합이 마음속에 떠오른단 말야. 왜 그 말이 왜 그러한 음들을 떠올리는지는 자기도 몰라. 어쨌든 그리 될 뿐이야. 그리고 말야, 비평이 왜 의미가 없는지 두번째 이유를 말해 주겠네. 위대한 화가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보는 방식으로 자연을 보도록 강요하네. 하지만 다음 세대에는 또 다른 화가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그 사람 자제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대 화가를 통해 평가하네. 바르비 종 화가들은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나무는 이러이러하게 본 다고 가르쳤지. 그런데 마네가 나타나서 다른 방식으로 그리니까 사람들은 나무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야. 어떤 화가가 나무를 그런 식으로 볼 뿐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단 말이네. 그린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네. 우리가 우리의 시각을 세상 사람들에게 강제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위대한 화가라고 부르지. 그러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무시해. 그러나 우리 자신은 마찬가지야. 위대하다든가 시시하다든가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니 까. 우리가 그리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아, 그리는 동안 우리는 그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었으 니까」
(P.404)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필립은 이런 느낌이 들었 다. 진정한 화가나 작가, 음악가에게는 자기의 일에 완전히 몰입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삶을 예술에 종속시키게 된다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어떤 힘에 굴복하여, 자 신을 사로잡고 있는 본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느라 그들의 인 생은 살아보지도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새나가 버리는 것이 아 닌가. 필립에게는, 인생이란 그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야 할 대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삶의 다양한 체험을 추구하괴 삶의 매 순간이 주는 모든 감동을 향유하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행동을 취하고 그 결과를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P.411)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상체계를 접할 때마다 그는 가벼운 흥분으로 떨면서 거기 에서 혹 행위의 지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곤 했다. 자기가 미지의 나라를 여행하는 나그네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 으로 나아가면서 그는 점점 모험의 매혹에 빠져들었다. 남들이 문학을 읽을 때처럼 그는 철학을 감정에 빠져 읽었다. 마음속에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누군가의 멋진 글귀에서 발견하면 가슴습이 뛰었다. 그의 정신은 구체성을 지향했기 때문에 추상 적인 영역에서는 좀처럼 감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적 추론 을 따라잡지 못할 때도 불가해한 영역의 언저리에서 제 갈길을 영리하게 찾아나가는 얽히고 설킨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야릇 한 기쁨이 느껴졌다. 위대한 철학자의 글에서도 도움될 만한 말 을 발견하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의 정신은 아주 편안한 공감을 주었다. 갑자기 광활한 고지에 올라선 중앙 아프리카의 탐험가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고 평원이 사방으로 쭉 펼쳐져 있다. 마치 영국의 어느 공원에 서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토마스 홉즈의 견실한 상식은 기쁨을 주었괴 스피노자는 외경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처럼 고결하괴 그처럼 가까이하기 어렵고 그처럼 준엄한 정신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스피노자의 정신은 그가 경탄해 마지않았던 로댕의 조각「청동시대」를 떠오르게 했다. 그 다음은 흄이었다. 이 매력적인 철학자의 회의론은 필립에게 친족의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복잡한 사상을 음악적이면서 균제되어 있는 쉬운 언어로 표현해 내고 마는 투명한 문체에 취해 그는 입가에 기쁨의 미소를 띠고 마치 소설책을 읽듯이 읽아 내려갔다. 하지만 그가 찾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다. 어디에서 읽었던가. 모든 사람은 플라톤주의자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 아니면 금욕주의자나 쾌락주의자로 태어난다고. 한편 조지 헨리 루이스의 이야기는 (철학이 헛소리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자의 사상이란 그 사람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점을 알면 그 사람이 쓴 철학을 대개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되어먹은 대로 생각하는 것 같기만 하다. 진리란 사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진리라는 것은 한하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철학자이며,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이 세워놓은 정교한 사상 체계라는 것도 그것을 쓴 본안 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요컨대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며, 그러고 나면 철학 체계는 저절로 형성되어 나왔던 것이다. 필립에게는 알아내야 할 것이 세 가지라고 여겨졌다. 사람과 그가 몸담고 사는 세계와의 관계, 사람과 그가 함께 어울려 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사람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그것이었다.
(P.429)
그는 이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만사는 목적에 순응할 뿐이었다. 그는『종의 기원』을 읽었다 이 책은 그 동안 그를 괴롭혔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듯했다. 이제 그는 자연 탐험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어느 곳, 어느 자리에 반드시 어떤 자연적 특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추론한다. 넓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니 과연 여기에 예상했던 지류가 있고, 저기에 생물들이 많이 사는 비옥한 초원이 나타나며, 더 나아가니 산맥이 보인다. 뭔가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지면 뒤에 세상사람들은 그 발견이 왜 그때 당장 인정받지 못했을까 하고 놀라게 ,되는데, 실은 그 발견을 인정한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 도 그 발견이 그들에게 미치는 결과는 미미하다.『종의 기원』을 맨 처음 읽은 사람들도 이성적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행동의 바탕이 되는 그들의 감정은 그 책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필립은 이 위대한 책이 나온 지 한 세대 뒤에 태어났다, 그래서 동시대요을 경악시켰던 많은 요소들이 이미 시대 감정 속으로 사라져버려 이제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 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생존경쟁의 장엄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이 암시하는 윤리적 규준은 그의 성향과 잘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힘이야말로 정의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P.432)
한편에는 성장과 자기 보존의 고유한 법칙을 가진 유기체인 사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개인이 있다. 사회는 자신에 이로운 행위를 미덕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덕이라 부른다. 선 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그 이상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죄란 자유인이 벗어나야 하는 편견이다. 사회는 개인과의 경쟁에서 세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법, 여론, 양심이다.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간지(奸智)로 대항할 수 있다. 꾀는 강자에 맞선 약자의 유일한 무기인 것이다. 들키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는 세상의 말은 이 현실을 잘 말해 준다. 하지만 양심은 내부의 반역자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회를 편들어 싸우며 개인으로 하여금 적의 번영을 위해 자신을 바치도록 만드는데 이것은 터무니없는 희생이다. 분명한 사실은 국가와 의식화된 개인, 이 양자는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개인을 이용할 뿐으로, 방해자는 짓밟아버리고, 충실하게 복종하는 자에게는 훈장, 연금, 명예 등의 상을 준다. 후자는 독립적인 사람의 경우에만 강할 뿐인데, 편의상 국가 안의 삶을 요령껏 살아나가면서 어떤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돈도 내고 봉사도 하지만 의무감은 전혀 갖지 않는다. 또한 상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간섭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는 홀로 세상을 사는 나그네와 같아,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쿠크의 티켓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인솔자를 따라다니는 관광단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본다. 자유인의 행동에 그릇된 행동이란 없다. 자유인은 마음이 내키면 무엇이든 한다. 그의 힘만이 자신의 도덕에 대한 유일한 척도이다. 국가의 법을 인정하며, 필요하면 위반도 하지만 죄의식은 갖지 않는다. 벌을 받게 될 때에는 벌을 받되 원한을 품지 않는다. 사회가 힘을 쥐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개인에게 옳고 그름에 관한 생각이 없다면, 양심이 힘을 잃게 되리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그는 양심이라는 악당을 가습에서 끄집어내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가 이전보다 인생의 의미에 한 걸음 이라도 더 가까이 간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까닭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크론쇼 의 페르시아 양탄자 비유를 생각했다. 크론쇼는 수수께끼의 해답으로 그것을 주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본인이 스스로 찾지 않는 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P.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