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르네 데카르트 / 양진호 / 책세상 / 208쪽 / 2011년
(2016.9.17)
데카르트의 <성찰>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다소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다른 고전들을 접하다가 다시 <성찰>을 봤을 때는 이런 글도 고전으로, 그것도 철학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앞의 저자들에 비하면 데카르트는 어떤 주제에 관해 집필을 했다기보다는 이래저래 생각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었고, 각 성찰로 넘어갈 때마다 문체가 다를 뿐 아니라 내용도 어쩐지 이어지지 않는 듯했다.
한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와 다시 <성찰>을 만났을 때 이전에 가졌던 느낌이 모두 나의 선입견과 집중력 부족에설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카르트는 <제1성찰>에서부터 선입견을 버리고 집중해서 따라오라고 수차례 부탁했건만, 나는 <성찰>을 읽는 내내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또한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P.7)
<제1성찰>에서는, 어떤 근거가 제시된다. 이 근거에 따라 우리는 모든 것들, 특히 물질적인 것들에 대하여 의심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다른 어떤 학문의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을 때까지는 말이다. 이러한 의심의 장점은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모든 선입견에서 해방시키고 정신을 감각으로부터 떼어내는 지름길을 열어줄 때 극대화되며, 미지막으로 우리가 나중에 참된 것으로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든다.
(P.28)
<제2성찰>에서는, 정신이 자기 고유의 자유를 사용하여 어떤 것의 실존을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을 경우 그러한 모든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나, 이와 동시에 바로 그 정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나, 이와 동시에 바로 그 정신이 실존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또한 더 없이 유용하다. 왜냐하면 정신은 이런 식으로 무엇이 자기 자신, 곧 지성적 본성에 속하는지, 또 무엇이 몸에 속하는지를 쉽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P.28)
벌써 몇 해 전에 나는 깨달았다. 어린 시절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된 것들을 참되다 여겼던가, 그 뒤로 이것들 위에 사워올린 모든 것들을 또한 얼마나 의심스러운가. 그러니 내가 언젠가 학문에 확고부동한 무언가를 세우고자 열망한다면, 사는 동안 한번은 모든 것을 뿌리째 뒤집어 최초의 토대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리라, 그러나 이 일은 어마어마해 보여서 나는 내가 이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그만이다 싶을 만큼 성숙해질, 그 대를 기다렸다. 이 때문에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이 일을 미루었고, 하마터면 이 때를 재느라 실행하라고 남겨진 시간을 모두 흘려보낼 뻔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내내 죄책감 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이제는 때가 왔다. 오늘 나느 정신을 모든 걱정거리로부터 풀어놓고 나 자신과 차분한 한때를 약속한 뒤 홀로 들어앉아 있다. 이제부터 진지하면서도 자유롭게 내 의견들을 통재로 뒤집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P.35)
해묵은 의견들은 마치 오래된 습관과 관습처럼 들러붙듯 돌아와서는, 본의 아니게 쉽사리 믿고 마는 내 마음을 점령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정말 있는 그대로라고 여기는 한, 즉 방금 말한 것처럼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나 적잖이 그럴듯하여 이것들을 부정하기보다는 믿는 편이 훨씬 더 합당하다고 여기는 한, 나는 결코 이것들에 동의하고 이것들을 신뢰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의지를 정반대로 돌려 나 자신을 속이고, 당분간 이것들이 모두 거짓되고 상상된 것이라고 꾸며내 보자. 양쪽 선입견이 평형을 이루었을 때처럼, 다시는 못된 습관이 내 판단이 사물을 올바르게 지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이 없을 때까지. 알다시피 이 때문에 당분간 어떠한 위험이나 오류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고, 내가 이 이상의 불신에 탐닉하는 일은 잇을 수도 없다. 지근 나는 행위의 문제가 오니라 오로지 인식의 문제에 열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P.40)
누구인지는 몰라도 의도적으로 항상 나를 속이는, 대단한 능력 있고 아주 교활한 사기꾼이 있다. 이제는 그가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나는 무엇이다, 하고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을 대단히 충분히 숙고한 뒤 마침내 이러한 공리를 확립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는 내가 소리 내어 말하든 정신으로 파악하든 언제든지 피할 수 없이 참이다.
(P.46)
내 관념들 가운데 나에게 나 자신을 보여주는 관념은 (아무런 난점이 없느니만큼) 일단 제외한다. 그러면 남은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신을, 어떤 것은 몸 있는 것과 무생물을 어떤 것은 천사를, 어떤 것은 동물을, 마지막으로 어떤 것은 나와 닮은 다른 인간을 표상한다.
(P.70)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한한 것을 부정함으로써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내가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 어둠을 빛의 부정으로 지각하듯이 말이다. 그렇기는 커녕 나는 무한 실체가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담고있다는 것, 이 때문에 무한한 것, 즉 신에 대한 지각이 유한한 것, 즉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면에서는 먼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만일 내게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없어서, 내 결함을 이것과 비교함으로써 깨닫지 못했다면, 내가 의심하고 욕구한다는 사실, 즉 내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내가 전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가 과연 어떻게 알았겠는가?
(P.74)
나는 인간 정신에 대한 더없이 또렷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또 내가 나는 의심한다는 것, 즉 나는 불완전한 의존적 존재자라는 것에 주목하면, 나에게는 와전한 독립적 존재자, 곧 신에 대한 맑고 또렷한 관념이 떠오른다. 또 나는 그런 관념이 내게 있다. 곧 그런 관념을 지니고 있는 내가 실존한다는 바로 이 사실로부터 신이 실존한 나는 것과 내 실존 전체가 매 순간 그에게 달려 있다는 결론을 분명하게 이끌어낸다. 인간 지성에 이보다 더 명백하고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은 없다 싶을 만큼 분명하게 말이다.
(P.85)
내가 골짜기 없는 산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산과 골짜기가 어디엔가 실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산과 골자기는 이것들이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실존하지 않는 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실존은 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신은 참으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내 생각이 만들어냈다거나 어떤 사물에 불가피성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바로 그 사물의 불가피성, 즉 신의 실존이 지닌 불가피성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결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이 날개가 있다고 상상하든 없다고 상상하든 그것은 내 자유이지만, 실존 없는 신(최고 완전성 없는 최고 완전한 존재자)을 생각하는 것은 내 자유가 아니다.
(P.102)
나는 우선 상상력과 순수한 지성의 차이를 검토한다. 에컨대, 삼각형을 상상하면, 나는 이것이 세 변으로 둘러싸인 도형임을 인식할 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정신의 눈으로 이 세 변을 마치 눈앞에 놓여 있는 양 응시한다. 이 뒤의 경우를 일컬어 '상상하다'라 한다. 반면에 천각형을 생각하려 하면, 나는 물론 삼각형이 세 변으로 이루어진 도형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천각형이 천 개의 변으로 구성된 도형임을 잘 인식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천 개의 변을 상상하지는 못한다.
(P.111)
정신은 인식하는 동안 일정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여 자신에 내재하는 어떤 관념들을 돌아본다. 반면에 상상하는 동안에는 몸을 마주하며, 거기서 자신으로부터 인식된 관념들, 아니면 감각으로써 지각된 관념들과 일치하는 무언가를 응시한다.
(P.113)
오늘 우리가 <성찰>을 다시 읽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나열하는 것은 어쩌면 독자의 교양을 무시하거나 상상력을 제한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이 책을 지금 다시 독자 앞에 내놓는 이유에 대해 몇 마디 늘어놓는 것이 이 해제의 마무리로서 더 적절할 듯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크게 다른 점이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처음으로 세게적 규모의 분쟁이 발생한 시대를 살았다. 그는 이 분쟁이 소통의 단절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인간 내면의 성찰을 통해 발견하고자 했다. 그의 삶과 저술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소통의 방법으로서의 논리학이다. 그는 방법에 관한 저술들에서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논리적 형식들을 청산하고 쉽고 간편한 소통 방식을 고안했다. 이후로는 이 방법이 의존하고 있는 궁극적 기반이 무엇인지, 아니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자문했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코기토 명제를 제시했다.
(P.186)
생각하는 나, 데카르트는 이 주제 개념을 통해 각 사람들이 종교, 정치, 신분과 인종 및 신체적 차이 등 각자의 개인적 조건들을 벗어던질 수 잇다고, 그럴 때에만 하나의 동등한 주제로서 만나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만남과 소통의 지침에서부터 다시 모든 사람들이 '정신으로써'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하나씩 쌓아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자 했다. 코기토는 그의 이상적 인간관인 동시에 공동체의 구성 원리였고, 정치관이자 종교관이자 학문론이었다. 이러한 제안, 과정, 결과 모두가 바로 이 책 <성찰>인 것이다.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