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스마트
제임스 캔턴 / 박수성,이미숙,장진영 / 비지니스북스 / 576쪽
(2016. 11. 16.)



너무 진진하게 읽을 필요까지는 없는책으로
가볍게 각 챕터의 첫머리와 끝머리 주제와 미래에 새롭게 시작되는 사업들의 단어를
눈에 익히면 좋을듯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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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면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에 대한 통찰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당신이 사업을 운영하거나 커리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더욱 똑똑하고 빠르게 경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당신의 생각을 뒤흔들고 행동을 부추겨서 미래의 구체적인 트렌드뿐만 아니라 현재 나타나는 변화의 신호, 동인, 트렌드가 형성되기 전에 나타난 조기 징후를 알아보고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퓨처 스마트가 될 수 있다. 미래가 오기 전에 트렌드를 창조하고 미래를 바꿀 변화와 신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P.06)



  미래를 예측하기, 미래에 대비하기,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지식을 적용하여 대비하는 것이 '퓨처 스마트'의 세 가지 전략적 목표다. 이 책은 앞으로 무엇이 올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시화,사업,문화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지에 대한 전략적인 안내서다.
(P.11)



 이 책은 많은 트렌드가 실려 있지만, 당신이 수용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트렌드는 역시 모두가 연결된 세상이라는 점이다. 퓨처 스마트가 되기 위해 변화를 이해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은 다가오는 세계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연결될지 이해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빠르고 강하게 연결된 상태는 우리를 열린 대화와 활발한 상거래, 문화의 이해, 보다 풍요로운 세상으로 향하게 해줄 것이다.
  연결성은 모든 거래, 기술, 인간관계, 사업의 결속을 다지는 초강력 접착제 역할을 하며 앞으로 100년을 주도할 트렌드다.
(P.45)



 새로운 미래에는 사업 방식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타나난다. 똑똑한 예측, 빅데이터 분ㄴ석, 인지 컴퓨터 기술의 융합과 발전이 산업을 변형시킨다. 소비자가 곧 생산자이며 경쟁자이자 협업자이다. 크라우드소싱(군중crowd과 아웃소싱outsourcing을 합성한 말로 인터넷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기업 활동에 활용하는 방식, 즉 대숭을 제품이나 창작물의 생산 과정에 참여시키는 방식)이 마케팅을 주도한다.
(P.61)



 가깝고 먼 미래에 소비자와 직원의 가치는 기술적인 가치보다 더 많이 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소비자와 직원은 자신이 물건을 구매하고 일하는 기업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바라며, 또한 이 기업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중요한 변화는 이들은 기업이 더 높은 사회적 목적의식을 지니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기업은 반드시 지속가능해야 하고 모두를 미래에 대비시켜야 하며, 사회적으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실패한 국가나 어두운 곳에서는 수익 외에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조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서의 가치 변화는, 특히 X세대와 밀레니엄 세대의 가치 변화는 모든 기업이 사회적 기업이 되기를 요구한다.
(P.102) 



 언제 어디서든 직업이나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고,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꿀지 연구해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놀라운 혁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면 교육은 오늘날과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과연 어떤 교육 시스템이 마련되었을까? 지금과는 다른 이 새로운 교육 시스템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혁신을 받아들이고, 미래를 관리하고,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라. 당신의 상상, 발명 또는 리더십이 가가운 미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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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교야구 여자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
이와사키 나쓰미 / 권일영  동아일보사 / 264쪽
(2016.11.13)




일본 야구 망가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스토리인 허잡한 고교야구팀의 고시엔 도전기에

피터드러커의 매니지먼트라는 책이 결합되었을때 보여주는 시너지는 상상이상인것 같다

이 책이 출간된 해에 일본에서 하루키의 1Q84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아주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단고 한다.
이 책에서 피터드러커의 매니지먼트한 책은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고전 부터 전해져 오는 무림의 절대 비법서와 같은 역활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책 중간중간 나오는 매니지먼트에 문구들이 전혀 새롭거니 아주 대단한 비법들이 이니라는 거다.
직장 생활을 좀 해보고 마케팅 관련 서적이나 강의를 한 두 번 들어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주 들었던 내용이란 것이다.
이렇듯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당연한 매니지먼트의 방법론을 이제 갓 어느 허접한 고교야구 팀의 매니저를 시작한 한 여학생이 자기가 속한 야구팀에 하나 씩 적응시키며 한단계씩 성정해나가는 모습에서 독자들은 일본 여구 망가를 보며 느끼는 희열보다 더 큰 희열을 느끼는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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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나가는 조직에는 손을 잡고 도와주지도 않고, 인간관계도 좋지 않은 보스가 한 명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이런 조유릐 보스는 가까이하기 힘들고 깐깐하며 고집스럽긴 하지만 종종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인재를 키워낸다. 부하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보다 더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다. 늘 최고의 실적을 요구하고, 자신도 최고의 실적을 올린다. 기준을 높게 잡고 그걸 이루기를 기대한다. 무엇이 옿은가만 생각하지 누가 옳은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적인 능력보다는 진지함을 더 높게 평가한다.
  이런 자질이 없는 이는 아무리 붙임성 있고, 남을 잘 도와주고, 인간관계가 좋고, 유능하고, 총명하더라도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매니저뿐만 아니라 신사로서도 실격이다.
(P.19)



  "그래! '감동!' 고객이 야구부에 요구하는 것은 '감동!'이야! 그건 부모님이나 선생님, 학교, 도민들, 고교야구연맹, 전국의 고교야구팬들, 그리고 우리 부원들까지 모두 마찬가지야! 다들 야구부에 '감동'을 원하고 있는 거지!"
(P.54)



  성장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언제 기회가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다. 준비해두어야만 한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기회는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262쪽, 제9장 매니지먼트의 전략 - 43. 성장의 매니지먼트)
(P.117)



  사람들의 장점을 살린다!
  요즘은 이 말이 미나미의 입버릇이 되었다. 하루24시간, 어떻게 하면 사람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했다.
  사람을 황용한다는 것은 매니지먼트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P.118)



  마케팅만으로는 기업이 성공할 수 없다. 정적인 경계 안에서는 기업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수수료만 받아 챙기는 브로커나 아무런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투기꾼이다. 기업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성장하는 경제뿐이다. 아니면 적어도 변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경제여야 한다. 그리고 기업이야말로 그 성장과 변화를 위한 기관이다.
  따라서 기업의 두 번째 기능은 이노베이션, 즉 새로운 만족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저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더 나은, 더 경제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해야만 한다. 기업 자체는 더 커질 필요가 없지만 늘 보다 좋아져야만 한다. (17`-18쪽, 제1장 기업의 성과 - 2. 기업이란 무엇인가)
(P.140)



  어느 조직이나 무사안일주의의 유혹을 맏는다. 조직의 건전함이란 매우 수준 높은 요구다. 자기 목표를 관리하려면 고도의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먼 성과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성과는 백발백중이 아니다. 백발백중 성과를 올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성과란 장기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실수나 실패를 모르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무난한 일, 별 볼 일 없는 일만 해온 사람들이다. 성과란 야구의 타율 같은 것이다. 약점이 없을 수 없다. 약점만 지적당하면 사람들은 의욕도 잃고 사기도 떨어진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든다. (145-146쪽, 제5장 매니저 - 26. 조직의 정신)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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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르네 데카르트 / 양진호 / 책세상 / 208쪽 / 2011년
(2016.9.17)




  데카르트의 <성찰>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다소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다른 고전들을 접하다가 다시 <성찰>을 봤을 때는 이런 글도 고전으로, 그것도 철학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앞의 저자들에 비하면 데카르트는 어떤 주제에 관해 집필을 했다기보다는 이래저래 생각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었고, 각 성찰로 넘어갈 때마다 문체가 다를 뿐 아니라 내용도 어쩐지 이어지지 않는 듯했다.
  한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와 다시 <성찰>을 만났을 때 이전에 가졌던 느낌이 모두 나의 선입견과 집중력 부족에설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카르트는 <제1성찰>에서부터 선입견을 버리고 집중해서 따라오라고 수차례 부탁했건만, 나는 <성찰>을 읽는 내내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또한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P.7)



  <제1성찰>에서는, 어떤 근거가 제시된다. 이 근거에 따라 우리는 모든 것들, 특히 물질적인 것들에 대하여 의심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다른 어떤 학문의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을 때까지는 말이다. 이러한 의심의 장점은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모든 선입견에서 해방시키고 정신을 감각으로부터 떼어내는 지름길을 열어줄 때 극대화되며, 미지막으로 우리가 나중에 참된 것으로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든다.
(P.28)



  <제2성찰>에서는, 정신이 자기 고유의 자유를 사용하여 어떤 것의 실존을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을 경우 그러한 모든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나, 이와 동시에 바로 그 정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나, 이와 동시에 바로 그 정신이 실존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또한 더 없이 유용하다. 왜냐하면 정신은 이런 식으로 무엇이 자기 자신, 곧 지성적 본성에 속하는지, 또 무엇이 몸에 속하는지를 쉽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P.28)



  벌써 몇 해 전에 나는 깨달았다. 어린 시절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된 것들을 참되다 여겼던가, 그 뒤로 이것들 위에 사워올린 모든 것들을 또한 얼마나 의심스러운가. 그러니 내가 언젠가 학문에 확고부동한 무언가를 세우고자 열망한다면, 사는 동안 한번은 모든 것을 뿌리째 뒤집어 최초의 토대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리라, 그러나 이 일은 어마어마해 보여서 나는 내가 이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그만이다 싶을 만큼 성숙해질, 그 대를 기다렸다. 이 때문에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이 일을 미루었고, 하마터면 이 때를 재느라 실행하라고 남겨진 시간을 모두 흘려보낼 뻔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내내 죄책감 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이제는 때가 왔다. 오늘 나느 정신을 모든 걱정거리로부터 풀어놓고 나 자신과 차분한 한때를 약속한 뒤 홀로 들어앉아 있다. 이제부터 진지하면서도 자유롭게 내 의견들을 통재로 뒤집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P.35)



  해묵은 의견들은 마치 오래된 습관과 관습처럼 들러붙듯 돌아와서는, 본의 아니게 쉽사리 믿고 마는 내 마음을 점령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정말 있는 그대로라고 여기는 한, 즉 방금 말한 것처럼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나 적잖이 그럴듯하여 이것들을 부정하기보다는 믿는 편이 훨씬 더 합당하다고 여기는 한, 나는 결코 이것들에 동의하고 이것들을 신뢰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의지를 정반대로 돌려 나 자신을 속이고, 당분간 이것들이 모두 거짓되고 상상된 것이라고 꾸며내 보자. 양쪽 선입견이 평형을 이루었을 때처럼, 다시는 못된 습관이 내 판단이 사물을 올바르게 지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이 없을 때까지. 알다시피 이 때문에 당분간 어떠한 위험이나 오류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고, 내가 이 이상의 불신에 탐닉하는 일은 잇을 수도 없다. 지근 나는 행위의 문제가 오니라 오로지 인식의 문제에 열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P.40)



  누구인지는 몰라도 의도적으로 항상 나를 속이는, 대단한 능력 있고 아주 교활한 사기꾼이 있다. 이제는 그가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나는 무엇이다, 하고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을 대단히 충분히 숙고한 뒤 마침내 이러한 공리를 확립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는 내가 소리 내어 말하든 정신으로 파악하든 언제든지 피할 수 없이 참이다.
(P.46)



  내 관념들 가운데 나에게 나 자신을 보여주는 관념은 (아무런 난점이 없느니만큼) 일단 제외한다. 그러면 남은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신을, 어떤 것은 몸 있는 것과 무생물을 어떤 것은 천사를, 어떤 것은 동물을, 마지막으로 어떤 것은 나와 닮은 다른 인간을 표상한다.
(P.70)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한한 것을 부정함으로써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내가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 어둠을 빛의 부정으로 지각하듯이 말이다. 그렇기는 커녕 나는 무한 실체가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담고있다는 것, 이 때문에 무한한 것, 즉 신에 대한 지각이 유한한 것, 즉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면에서는 먼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만일 내게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없어서, 내 결함을 이것과 비교함으로써 깨닫지 못했다면, 내가 의심하고 욕구한다는 사실, 즉 내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내가 전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가 과연 어떻게 알았겠는가?
(P.74)



  나는 인간 정신에 대한 더없이 또렷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또 내가 나는 의심한다는 것, 즉 나는 불완전한 의존적 존재자라는 것에 주목하면, 나에게는 와전한 독립적 존재자, 곧 신에 대한 맑고 또렷한 관념이 떠오른다. 또 나는 그런 관념이 내게 있다. 곧 그런 관념을 지니고 있는 내가 실존한다는 바로 이 사실로부터 신이 실존한 나는 것과 내 실존 전체가 매 순간 그에게 달려 있다는 결론을 분명하게 이끌어낸다. 인간 지성에 이보다 더 명백하고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은 없다 싶을 만큼 분명하게 말이다.
(P.85)



  내가 골짜기 없는 산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산과 골짜기가 어디엔가 실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산과 골자기는 이것들이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실존하지 않는 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실존은 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신은 참으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내 생각이 만들어냈다거나 어떤 사물에 불가피성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바로 그 사물의 불가피성, 즉 신의 실존이 지닌 불가피성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결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이 날개가 있다고 상상하든 없다고 상상하든 그것은 내 자유이지만, 실존 없는 신(최고 완전성 없는 최고 완전한 존재자)을 생각하는 것은 내 자유가 아니다.
(P.102)



  나는 우선 상상력과 순수한 지성의 차이를 검토한다. 에컨대, 삼각형을 상상하면, 나는 이것이 세 변으로 둘러싸인 도형임을 인식할 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정신의 눈으로 이 세 변을 마치 눈앞에 놓여 있는 양 응시한다. 이 뒤의 경우를 일컬어 '상상하다'라 한다. 반면에 천각형을 생각하려 하면, 나는 물론 삼각형이 세 변으로 이루어진 도형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천각형이 천 개의 변으로 구성된 도형임을 잘 인식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천 개의 변을 상상하지는 못한다.
(P.111)



  정신은 인식하는 동안 일정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여 자신에 내재하는 어떤 관념들을 돌아본다. 반면에 상상하는 동안에는 몸을 마주하며, 거기서 자신으로부터 인식된 관념들, 아니면 감각으로써 지각된 관념들과 일치하는 무언가를 응시한다.
(P.113)



  오늘 우리가 <성찰>을 다시 읽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나열하는 것은 어쩌면 독자의 교양을 무시하거나 상상력을 제한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이 책을 지금 다시 독자 앞에 내놓는 이유에 대해 몇 마디 늘어놓는 것이 이 해제의 마무리로서 더 적절할 듯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크게 다른 점이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처음으로 세게적 규모의 분쟁이 발생한 시대를 살았다. 그는 이 분쟁이 소통의 단절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인간 내면의 성찰을 통해 발견하고자 했다. 그의 삶과 저술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소통의 방법으로서의 논리학이다. 그는 방법에 관한 저술들에서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논리적 형식들을 청산하고 쉽고 간편한 소통 방식을 고안했다. 이후로는 이 방법이 의존하고 있는 궁극적 기반이 무엇인지, 아니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자문했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코기토 명제를 제시했다.
(P.186)

  생각하는 나, 데카르트는 이 주제 개념을 통해 각 사람들이 종교, 정치, 신분과 인종 및 신체적 차이 등 각자의 개인적 조건들을 벗어던질 수 잇다고, 그럴 때에만 하나의 동등한 주제로서 만나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만남과 소통의 지침에서부터 다시 모든 사람들이 '정신으로써'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하나씩 쌓아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자 했다. 코기토는 그의 이상적 인간관인 동시에 공동체의 구성 원리였고, 정치관이자 종교관이자 학문론이었다. 이러한 제안, 과정, 결과 모두가 바로 이 책 <성찰>인 것이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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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콤 소렐 / 시공사 / 166쪽 / 1999
(2016. 08. 12.)




  데카르트가 자신의 방법이 새로운 논리학이라고 주장하면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만일 탐구를 수행하면서 오직 그의 준칙들이 허용하는 것만을 결론으로 이끌어 낸다면 이런 결로은 참으로 논증되었거나 증명된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 준칙들은 새로운 논리학을 구성하였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 이론과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추론 과정이 지닐 수 있는 완벽한 타당성을 전제와 결론의 형식들 사이의 관계 - 주어와 술어의 올바른 결합에서 오는 전제와 결론의 구성 - 에다 연결시키지 않고, 이들 명제가 매사에 지극히 세심할 뿐 아니라 늘 신중하게 판단할 만큼 충분히 숙달된 정신에 미치는 영향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P.73)



  데카르트가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찰>의 내용이 신앙심을 복돋워 준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그 저서에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귀의시키거나, 이승에서 착하게 살면 저승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카톨릭 교도들을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은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 사실 <성찰>의 신과 <성서>의 신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성찰>에서 영혼이라 불리는 것도 신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받거나 지상에서 그것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 처벌받을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데카르트의 영혼 이론은 감각적인 것들을 떠나 물질의 본성과 변화 방식을 일반화시켜 사유할 수 있는 일종의 정신에 관한 이론이었고, 데카르트의 신은 물질에 관한 일반적 사유의 진리성을 보장해 주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것은 물리학자들의 신,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해서 절대 확실한 물리학의 일반 법칙을 확립하고자 하는 반회의주의적이 자연 철학이 필요로 하는 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P.99)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명확하고 분명한 지각의 진리성을 보장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 먼저 신의 존재와 완정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이따금 데카르트의 이런 일반적인 전략은 데카르트를 순환적 논증에 말려들게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명확하고 분명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참인 것으로 판단되는 전제들을 사용해야 하는데, 명확하고 분명한 지각들을 참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신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난을 해소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설사 데카르트가 그에 대해 적절히 답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난점들은 여전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P.101)



  신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논증'으로 통하는 이런 방식의 추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삼각형이 없는데도 삼각형의 실재적 본성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둘째, 완전성이 존재를 함축한다는 주장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셋째, 존재론적 논증이 제3성찰의 첫째 논증의 결론 - 명확하고 분명하게 지각되는 것이 실재적이라는 - 을 이용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다시 이 첫재 논증을 확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자신의 논증들에서 제기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그의 논증들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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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전처럼 읽기
정희진 / 교양인 / 312쪽 / 2014
(2016. 08. 08.)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임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복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P.14)



  책은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무관해 보이는 책들 간의 관련성을 읽는 이가 어떠게 판단하느냐이다. 독자의생각에 다라 무관한 책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는 방법이 아는 내용을 결정한다. 별개로 존재하는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의 구분도 없고 개별 학문의 구별은 더더욱 없다.
(P.15)



  자기 전공보다 자기가 공부하는 학문이 생겨난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먼저다. 학문이 생겨난 이유와 문제의식에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전공의 전제와 맥락을 모르게 된다. 이때 지식의목적은 해결로 전락하고 앎이 아니라 정보만 소유하게 된다.
(P.16)



  좋은 글, 빼어난 글, 읽을 만한 글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논문(학문?)과 '잡문'의 구별을 지양한다. 그리고 이를 구분하는 사람이수록 그 지성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다. 글은 정치적 입장과 문장력으로 구별되는 것이지 학문, 잡문, 예술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트로트와 클래식에는 위계가 없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것은 수준이 아니라 기호의차이다. 이와 달리 글은 질적 차이, 수준의 차이가 크다. 좋은 글은 읽는 이의 정치적 입장이나 기호와 상관없이 합의된다.
(P.17)



  독서는 내 몸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다. 통과 전후 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고, 다치고 아프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P.19)



  어떤 책은 읽는 동안 그러저럭 시간이 잘 가지만 읽고 난 후 별 다른 변화가 없다. 이런 경우를 킬링 타임용이라고 한다. 반면, 다양한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는 통과 의례도 있다. 여운이 남고, 머리속을 떠나지 않으며, 괴롭고, 슬프고, 마침내 사고방식에 변화가 오거나 인생관이 바뀌는 책이 잇다. 즉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책이 있다. 이것이 자극적인 책이다. 그런 책은 여러 번 읽고 필사를 한다. 번역서인 경우에는 원서를 구해서 역시 필사한다. 필사를 하면, 최소 네번 정도 읽게 된다. 당연히, 읽을 때마다 다른 주제가 나타난다. 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내 몸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책을 쓴 작가보다 더 '내 것'이 된다.
(P.19)



  모든 책은 각각의 위치에 쓰인 것이지, 조감도는 없다. 따라서 책의 내용은 진리도 진실도 사실도 아니다. 아니, 사실이나 진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독자는 사용자가 되었다. 원래 지식은 쓰고 없어지는 소비재지, 간직해야 할 보물이 아니다. 사용자는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할 뿐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지식을 몸에 구조화하는 데 사용하면 된다.
(P.23)



  내가 습득한 책 읽기 습관을 요약해 본다.
  1. 눈을 감아야 보인다(in/sight)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판단 정지. epoche).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P.24)



  책 읽기는 책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입체화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가/어느 순간/어떤 내용과 접속하는가에 다라 다양한 사건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한 권을 읽어도 열 권을 읽는 사람이 있고, 열 권을 읽어도 한 권도 못 읽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P.27)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극중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도적인 시점이 있다. 대부분의 관객은 그러한 시선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작가가 비교적 집중하지 않는, 그러니까 그 자체가 아니라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인 주변인, 조연, 엑스트라에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환기하고 동일시하는 관객은 드물다. 그러나, 주인공만이 아니라 주인공을 주인공이게 하는 주인공과 타자(다른 인물, 동물, 사물, 자연)의 관계에 집중해서 텍스트를 읽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주제와 줄거리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근본적으로는 다른 정치적 세계(범주)가 만들어진다. 텍스트 자체도 감상문도 달라진다.
(P.298)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 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 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자기 변화가 없다면? 왜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도 좋은 독후감이 된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자기 탐구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더 좋은 독후감이 될 확률이 높다.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가치관, 감수성에 따라 여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독후감의수준은 여기서 결정된다.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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