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콤 소렐 / 시공사 / 166쪽 / 1999
(2016. 08. 12.)




  데카르트가 자신의 방법이 새로운 논리학이라고 주장하면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만일 탐구를 수행하면서 오직 그의 준칙들이 허용하는 것만을 결론으로 이끌어 낸다면 이런 결로은 참으로 논증되었거나 증명된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 준칙들은 새로운 논리학을 구성하였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 이론과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추론 과정이 지닐 수 있는 완벽한 타당성을 전제와 결론의 형식들 사이의 관계 - 주어와 술어의 올바른 결합에서 오는 전제와 결론의 구성 - 에다 연결시키지 않고, 이들 명제가 매사에 지극히 세심할 뿐 아니라 늘 신중하게 판단할 만큼 충분히 숙달된 정신에 미치는 영향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P.73)



  데카르트가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찰>의 내용이 신앙심을 복돋워 준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그 저서에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귀의시키거나, 이승에서 착하게 살면 저승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카톨릭 교도들을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은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 사실 <성찰>의 신과 <성서>의 신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성찰>에서 영혼이라 불리는 것도 신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받거나 지상에서 그것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 처벌받을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데카르트의 영혼 이론은 감각적인 것들을 떠나 물질의 본성과 변화 방식을 일반화시켜 사유할 수 있는 일종의 정신에 관한 이론이었고, 데카르트의 신은 물질에 관한 일반적 사유의 진리성을 보장해 주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것은 물리학자들의 신,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해서 절대 확실한 물리학의 일반 법칙을 확립하고자 하는 반회의주의적이 자연 철학이 필요로 하는 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P.99)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명확하고 분명한 지각의 진리성을 보장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 먼저 신의 존재와 완정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이따금 데카르트의 이런 일반적인 전략은 데카르트를 순환적 논증에 말려들게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명확하고 분명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참인 것으로 판단되는 전제들을 사용해야 하는데, 명확하고 분명한 지각들을 참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신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난을 해소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설사 데카르트가 그에 대해 적절히 답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난점들은 여전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P.101)



  신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논증'으로 통하는 이런 방식의 추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삼각형이 없는데도 삼각형의 실재적 본성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둘째, 완전성이 존재를 함축한다는 주장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셋째, 존재론적 논증이 제3성찰의 첫째 논증의 결론 - 명확하고 분명하게 지각되는 것이 실재적이라는 - 을 이용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다시 이 첫재 논증을 확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자신의 논증들에서 제기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그의 논증들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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