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Hopper)
롤프 귄터 레너 / 정재곤 / 마로니에북스 / 96쪽
(2017. 12. 01.) 


Edward Hopper
https://www.edwardhopper.net/



  대부분의 유럽인에게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말 독일과 유럽에서 있었던 대규모 호퍼 전시회는 그가 미국의 특정 예술 분파에 속하는 회화기법을 대변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호피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림의 주제 자체이고, 그의 그림에서 재현되는 '장면들'은 이중적 의미를 띤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에는 전형적인 미국의 분위기가 담겨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생활과 이로 인한 단절에 따르는 소외감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호퍼 작품이 보이는 모호성은 미학적 개방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가 미국 현대회화 절정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흔히 추상적 표현주의를 추구하는 잭슨 폴록과 에드워드 호퍼 두 사람을 신(新)리얼리즘의 추종자이면서, "미국 개인주의와 예술적 완성"이라는 양극을 함께 아우르는 예술가로 평가한다.
  이처럼 호퍼의 그림은 리얼리즘적 특성이 대단히 강조되는가 하면, 단순한 현실 복제 경향과 단절을 나타내고, 심지어 현실에 상상적 비전을 부여하는 회 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호퍼의 풍경회는 19세기 이후 나다니일 호손이나 허먼 멜빌, 에드가 앨런 포와 같은 문학가뿐 아니라, 토머스 골이나 '허드슨 강 파(派)'에 속하는 미국 풍경화기들이 즐겨 다루던 주제인 '경계선 경험', 즉 문명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라는 상상적 재현의
원형을 드러낸다.
(P.7)


  우리가 포나 멜빌의 글에서 보듯이 무한한 자연의 공간을 거침없이 누비고자 하는 신화적 차원은 이내 경화되고 방향감을 상실하고 마는 것처럼, 호퍼의 그림에서도 자연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변모한다. 자연은 문명의 상징물과 함께 재현되거나(그의 그림에는 길이나 육교, 등대가 집요하게 등장한다) 또는 문명의 상징물-들이 거대한 자연에 파묻혀 위협받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호퍼가 그린 거의 모든 집들은 바로 이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런 까닭에 호퍼의 풍경화는 전망보다는 경계의 표식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그의 풍경화는 자연 대신에 창문 너머의 실내 공간이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을 재현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도 집이나 다른 문명의 상징들에 의해 구획되곤 한다.
(P.7)

(Early Sunday Morning, 1930)

(Railroad Sunset)

  호퍼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 거리를 재현하면서도 그림 내부에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 그림이 취하는 전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림의 반대편, 즉  길 건너편에 줄지어 서 있으리라 집작되는 집들을 향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특히 이 그림의 집들은 <철길의 석양>에서 볼 수 있는 녹색과 적색, 황색톤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래서 이 두 그림은 서로 대칭이라도 이루듯,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는 오른쪽의 이발소 간판이 강렬한 색깔로 부각되어 있는가 하면, <철길의 석양>에서는 전철 탑이 시선을 왼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한편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는 풍경의 유기적 형태와는 거리가 먼 인위적이고 기하학적 형태가 지배적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은〈철길의 석양〉에 암시되이 있는 요소들의 변모를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공간과 생명이 없는 공간 사이의 긴장감을 빛과 그림자가 직각이나 뚜렷한 윤곽을 가진 형태 위에서 펼치는 조합으로 변환시기는 호퍼의 테크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게다가 이 그림은 문명의 지배 적인 면모를 전제로 하는 지각력을 화가가 의도적인 아이러니로써 연출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공간을 압도하는 거리의 재색된 전면은 그림의 바 깥으로까지 이어지는 건물 오른편의 어두운 부룬으로 쏠려 있다. 그림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거대한 건물군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그림처럼 호퍼의 다른 그 림들에서도 집이며 건널목, 탑 등은 건축물의 일부분인 경우가 많다.
(P.35)
​​​

  호퍼는 오브제를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회화적으로 변모할 때는 언제나 그 근거를 제시하곤 했다. 그는 앞에서 이미 소개했던 랠프 월도 에머슨과 괴테를 언급하는 글에서, 그림 그리는 행위를 기억과 직접 결부시카면서 에드가 드가 의 말을 옹호한다. “눈으로 보는 바를 그리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바를 그리는 것은 훨씬 더 훌륭한 일이다. 이는 상상의 힘 이 기억과 결합함으로써 변모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화가는 자신을 구속하 는 것. 즉 필연적인 것만을 다시 만들어낼 뿐이다. 기억과 창조성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자연이 부과하는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P.65)


  얼핏 리얼리즘에 충실한 듯이 보이는 호퍼의 회화는 복제가 가능한 현실을 단순히 재현해내지 않고, 언제나 순수 경험세계를 뛰어넘는 재구성을 지향한다. 호퍼가 자주 재현해내는 그림 속 그림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전반적 회화 작업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복제해내는 대신에 빈 공간을 창조해낸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지각이나 지각하는 능력 자체에서 드러나는 단절을 부각시킨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호퍼의 작품은 침묵의 메타포로 설명되곤 한다. 말이란 말해지지 않은 부분과 침묵의 지배를 받는 부분이 있다. 호퍼의 회화도 공개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부분이 은밀하게 구심점을 이룬다. 전반적으로 호퍼의 작품은, 분명한 의미로써 해석되는 회화적 상황을 측량할 길 없는 깊디깊은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 독특함을 보여준다.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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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 문학동네 / 212쪽
(2017. 11. 30.) 




  스티브 잡스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시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 들일 수 있다.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지킬 것인가.
(P.15)


​  그 여름 '헝거게임'의 승자는 개량한복을 입은 팀장이었겠지만 그녀라고 언제까지 승자였을까 싶다. 그녀 위에는 그녀보다 더 독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고, 그 위에는 또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때는 1987년 6월 항쟁 직후였지만 나와 내 대학생 동료들 누구도 이런 시스템을 바꿀 엄두도 내지않았고 바꿔 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 몫의 알량한 수당만 챙기고 달아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 같은 '큰 문제'만 바뀌면 다른 소소한 문제들은 저절로 바뀌리라 믿었던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대기업이 주도하는 우리 사회의 '헝거게임'은 슬금슬금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고, 어느새 우리 모두는 아레나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벌이면서도 이런 상황이 개선될기라는 희망 따위 는 감히 품지 않는 그런 시대에 살게 되었다.
(P.22)


  우리나라의 부자들도 이제는 집을 버리기 시작했다. 이 전세 귀족들은 고가의 주택에 거주하지만 소유하지는 않으며, 무소유의 이상에 걸맞게 대부분 차도 갖고 있지 않다. 리스회사에서 빌리면 된다. 재벌일가는 회사를 직집적으로 소유하는 대신 최소한의 지분으로 교묘하게 지배하면서 회사에서 제공하는 여러 재화와 용역을 무상으로 누리고 있다.
  부자들은 이제 빈자들의 마지막 위안까지 탐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선택의 여지 없이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선택 가능한 쿨한 옵션일 뿐인 세계. 세상의 불평등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P.30)


​  '혼자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냥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은 죽음이 아닌 '혼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까?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P.93)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리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P.115)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 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안나 카레니나 1』, 문학동네, 2010)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P.125)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회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가 된다. 대개 처음에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영화 속에 흠뻑 빠지고 만다. 두 시간 동안 매혹당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고 즐거워하다가 극장 밖으로 걸어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본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그때는 책 안의 세계가 우리들 자신의 인생인 듯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폴 오스터,『오기 렌의 크리스마스이야기』, 일린책들, 2001) (P.128)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입니다.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아 닙니다. 다만 힘이 들지요.”
(P.148)


  이런 질문은 어떨까? “당신은 쉽게 예측이 가능한 사람입니까?” 대부분은 0}니라고 답할 것이다. 나부터도 남에게 쉽게 예측되는 사람이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안타깝게도,『링크』와 『버스트』의 저자인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히는 것 이상으로 예측 가능한 인간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히는 행동의 93퍼센트가 예측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아직 진실의 순간과 맞닥뜨리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직정생활을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해낸다. 윗사람들만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이 읽히고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누군 가의 아랫사람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윗사람이기도 하다.
(P.178)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P.184)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 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님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P.208)


  한동안 니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다. 소설가가 원래 그런 직업이라고 믿었다. 국경 밖에서 가끔 전 피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 라고 생각했다. 2012년 가을에 이르러 내 생각은 미묘하게 변했다.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주 오랜만에 고정적으로 여러 매체에 동시에 기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해진 마감일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연하게 써내도록 스스로를 강제하게 된다. 그렇게 적은 것을 다시 보고 고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이 순환이야말로 한 사회와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이 아닐까. 이 년 가까이 쓴 글들을 추리고 묶으면 서 생각한 것이다.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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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최재천/효형출판 / 267쪽
(2017. 11. 25.) 



  제아무리 대원군이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더 이상 타 문명의 유입을 막을 길은 없다. 어떤 문명들은 서로 만났을 때 충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어떤 것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게 될 것이다. 결코 일반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스스로 아끼지 못한 문명은 외래 문명에 텃밭을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예측을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싶다. 내가 당당해야 남을 수용할 수 있다.​
(P.48)


  종교가 스스로 모래판에 내려와 과학을 붙들고 씨름을 하려 할 때 나는 참 서글프다. 과학은 이른바 형이하학이지만 종교는 형이상학 중에도 으뜸이
아니던가. 과학은 모든 걸 증명해야하는 멍에를 지고 있지만 종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믿음은 증명보다 훨씬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P.64)


  사실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망측한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한번쯤《삼국지》에 그려진 후한말과 삼국시대의 세태를 연상하게 된다. 어제의 적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 이불 속에서 뒹굴기를 밥 먹듯 하며 전 국민을 상대로 공언한 맹세를 한 점 부끄럼도 없이 순식간에 뒤집는 우리네 정치인들. 연인이나 친구에게는 불륜과 배반의 흔적만 보여도 가차없이 절교를 선언하지만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져야 할 정치 지도자들의 부도덕에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깨끗한 한 표를 건네는 우리 유권자들. 이 엄청난 모순 앞에서 나는 종종 동물들의 사회를 떠올린다.
(P.85)


  나는 “선(善)과 악(惡)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고 한 공자님 말씀을 늘 선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간혹 벌어지는 악도 선한 눈으로 바라보면 배울 것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그런데 악행이 선행보다 더 만연되어 있고 악을 행하더라도 성공만 하면 별 문제 없이 칭송받는 요즘 같은 세상에 악에서 선을 끌어내리는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사실 조금은 걱정스럽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삼국지》를 읽으며 마키아벨리식 권모술수를 자칫 삶의 지혜로 배울까 염려하는 이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P.88)


  요즘은 우리 음식이 세계 각국에 잘 소개되어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식사대접히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우리
음식을 거리낌없이 덥석덥석 집어 먹는다. 그런데 그들이 기겁을 하며 못 먹 는 게 두 가지 있다. 길모퉁이 수레에서 파는 번데기가 하나고 산 낙지가 다른
하나다. 분명히 살아 꿈틀거리는 낙지의 다리를 토막쳐 입 안에 넣으면 빨판이 입 천장에 들러붙어 살겠다고 온통 난리다.
(P.107)


  이런 점으로 보면 식물은 동물에 비해 성적으로 더 대담한 면이 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꽃을 찾아가 대신 잠자리 를 같이 해줄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그들은 온 천하에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놓고 산다 꽃이란 다름 아닌 식물의 성기다. 그걸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의 코 밑에 바친다. 원색적인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그리는 꽃을 보며 그 강렬한 성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없으리라.
(P.171)


  작은 규모의 집단에서는 세습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 꾸려야 하는 대기업들은 투명한 전문경영인이 아니고는 더 이상 이끌어갈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아마도 그래서 대부분의 국기들도 더 이상 군주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국왕을 모시고 사는 영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도 왕은 그저 상징적 존재일 뿐 실권을 쥐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훌륭한 군주가 나리를 통치하던 시절만큼 태평성대가 없었다 자비롭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리를 맡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군왕정치보다 더 좋은 정치체제가 없다는 사실은 정치학자가 아니라도 짐작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율적인 제도가 결코 아니다. 다만 가장 공평하고 합리적인 제도일 뿐이다.
(P.198)


  저는 어려서 반성문을 많이 썼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덕에 제가 글줄이라도 몇 줄 꿸 줄 알 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책에 담긴 많은 글들은 제가 자연에게 써 올린 반성문들입니다.
  제가 감히 인류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함께 무릎을 꿇게 해드렸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저 일부라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길 빕니다.
  그런데 반성문치곤 제 글의 대부분에 이렇다 할 결론이 없습니다. '동물농장'도 아닌데 동물들의 눈으로 감히 인간을 훈계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삶을 뒤집어보려 했을 뿐입니다.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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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드보통 / 정영목 / 143쪽
(2017. 11. 18.)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런 범주에 드는 다른 분야의 예술가로는 바흐나 레너드 코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호퍼 예술의 중심 주제는 외로움이다. 호퍼의 인물들은 집에서 멀리 떠니온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호텔 침대 가장자리에 서서 편지를 읽거나 바에서 술을 마신다. 창밖의 움직이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호텔 로비에서 책을 읽는다. 상처받은 듯 자기 내부를 응시하는 표정이다. 방금 누군가를 떠나왔거나 떠나보낸 것 같다. 그들은 일이나 벗을 찾으며 오래 머물지 않을 곳을 떠돌고 있다. 시간은 주로 밤이다. 창문으로는 어둠이 다가오고, 넓은 시골 또는 낯선 도시의 위협이 그 뒤에 도사리고 있다.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P.9)

​​
  위대한 화가와 만나서 얻을 수 있는 부수입은 그들의 그림 덕분에 이 세상에서 화가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을 만한 곳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호퍼 적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민감해진다. 이제는 호퍼 자신이 돌아다녔던 북미의 여러 곳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든 모텔과 휴게소, 도로변 식당과 공항, 버스 정류장과 심야 슈퍼마켓이 있는 데서는 호퍼적인 곳을 찾을 수 있다. 호퍼는 '주변적인' 장소들, 집과 사무실 너머에 있는 건물들, 특별한 종류의 소외된 시정詩情을 느끼며 지나치게 되는 곳들을 제재로 삼는 미술 유파의 아버지다. 우리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와 해너 스타키의 사진들, 빔 벤더스의 영화와 토머스 베른하르트의 책 이면에서 호퍼의 존재 를 느낄 수 있다.
(P.12)


  어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다다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 그림이 담긴 엽서를 사서 책상 위의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놓기도 한다(내가 호퍼의 그림들을 여러 번 그렇게 했듯이). 그 그림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 마음 깊은 곳에서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감정적 질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눈앞에 존재하는 견고한 상징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 그 림을 보면서 그 특질이 조금씩 벗겨져서 우리에게로 오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 그림에서 반기는 것은 제재라기보다는 분위기다. 색과 형태를 통하여 전달되는 감정적 태도다. 우리는 물론 그런 감정으로부터 곧 멀리 쓸려 내려 갈 것임을 안다. 그림이 전하는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여러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대담한 의견을 내기도 하고, 확신을 품기도 하고, 가벼운 재치를 보이기도 하고, 부모로서 권위를 세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망록으로서, 닻으로서 그 그림을 환영하는것이다.
(P.15)


  공항의 매력이 집중된 곳은 터미널 천장에 줄줄이 매 달려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텔레비전 화면들이다. 미학적 자의식이 전혀 없는 그 모습. 노동자 같은 상자와 보행자 같은 활자는 아무런 위장 없이 자신의 감정적 긴장 상태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을 드러낸다. 도쿄,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바르샤바, 시애틀, 리우. 이 화면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마지막 줄의 시적 울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마지막 줄은 소설을 쓴 곳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똑같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쓰는 행위의 바탕이 된 세계주의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 화면들에 쉬지 않고 나타나는 안내문, 가끔 커서의 초조한 박동을 수반하 기도하는 안내문은 일견 단단하게 굳어버린 듯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냥 복도를 따라 내려가 비행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착륙할 것이다. 오후 세 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 감정에 깊은 크레바스들이 파여 있을 때, 늘 어딘가로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P.32)

​​
  이런 이륙에는 심리적인 쾌감도 있다.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형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점視點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한다. 도로는 산을 피하느라 곡선을 그리고, 강은 호수로 항하는 길을 따르고, 고압선 철탑은 발전소에서
도시로 이어 지고, 땅에서 보면 제멋대로인 것 같은 도로들은 잘 짜인 격자로 드러난다.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일치시키려 한다. 익숙한 책을 새로운 언어로 판독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P.35)


  비행기에서 구름을 보면 고요가 찾아는다. 저 밑에는 적과 동료가 있고, 우리의 공포나 비애가 얽힌 장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지금은 이주 작다. 땅 위의 긁힌 자국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유서 깊은 원근법의 교훈은 전부터 잘 알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비행기 창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을 때만큼 이것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드물기에,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심오 한 철학을 가르치는 스승이라 부를 만하다.
(P.38)


  근대 작업장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컴퓨터, 자동화, 세계화 등괴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 특징은 우리의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디는 널리 퍼진 믿음이다. 어느 사회나 일을 그 중심에 두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처음으로 일이 벌이나 고행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처음으로 정신이 멀찡한 인간이 경제적 압박을 받지 않아도 일을 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 어떤 일을 선택하느냐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받는디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사람에게 묻는 핵심적인 질문은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가 아니라 하는 일이 무어냐다. 마치 오직 이 사실만이 인간 생활의 독특한 특징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P.71)
​​

  만일 일에서 행복을 얻기가 그렇게 힘들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내세우는 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일자리에서 프로이트나 루스벨트가 맛보았던 만족감의 일부라도 맛볼 수 있기 를 기대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기대하는 대신 마르 크스를 읽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마르크스는 더 나은 세상에 관한 처방에서는 들렸지만, 왜 일이 그렇게 괴로울 때가 많은지 진단할 때는 지금 보아도 상당히 날카롭다.
(P.78)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의 기초>(1785)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들을 부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로" 존중한니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칸트를 참조하여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새로운 과학인 경제학이 대규모로 “부도덕"을 자행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경제학은] 노동자를 일하는 동물로 밖에 알지 못한다-최소한의 육체적 요구만 남은 짐승으로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피고용인에게 주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돌아가도록 칠하는 윤활유와 같다. 일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
   마르크스가 역사가로서 능력이 떨어져 산업화 이전의 과거를 별나게 이상화하고 부르주아지를 지나치게 혹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을 포착하고 극화했다는 점에서 여전치 가치가 있다.
(P.79)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프루스트)
(P.122)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 더 많이 알 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세계는 어떠 한지 돌아보게 된다.
(P.126)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 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 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 는 것이다.
(P.126)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여지면 도덕적 의미를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는 방법,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 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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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 유영미 / 갈라파고스 / 201쪽
(2017. 11. 14.) 



  이 책은 전체적으로 지글러가 어린이 무덤에 바치는 참회록이라고 할수 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랑 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 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수 있는 전 세계적 식량 과잉의 시대에 수많은 어린이 무덤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제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지도자를 만나고, 그것을 참회록의 느낌으로 써 내려간 이 책은 현재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항을 제시하고 있다.
(P.16)


  1990년에는8억 2,200만 명, 그 후 1999년에는 8억 2,800만 명 (2005년에는8억 5,000만 명)이 기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어. 이런 수치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 첫 째는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가 특히 남반구에서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극심한 영양실조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수를 인구증가율과 비교하면 기아 인구의 비율이 약간 줄어들었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지 .​
  1990년에는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렸는데, 1999년에는 19퍼센트로 비율상으로는 줄어 들었단다.
(P.32)


  서구의 부자 나라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신화가 있어 그것은 바로 자연도태설이지. 이것은 정말 가혹한 신화가 아닐 수 없단다. 이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의 6분의 1 이 기아에 희생당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해. 하지만 일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장점도 있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니까 점점 높아지는 지구의 인구밀도를 기근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고 보는 거야. 너무 많은 인구가 살아가고 소비하고 활동하다 보면 지구는 점차 질식사의 길을 걷게 될텐데,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적당하게 조절되고 있다고 믿는 것 이지. 그런 사람들은 기아를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로 여긴단다. 산소부족과 과잉 인구에 따른 치명적인 영향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죽지 않도록 자연 스스로 주기적으로 과잉의 생물을 제거한디는 거야.
  이런 설명은 전형적인 유럽적,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 란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지. 지신들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거리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영양실조로 팔다리가 비쩍 마른 아이를 안고 있는 벵골이나 소말리아, 수단의 엄미들이 그 아이들의 죽음과의 싸움이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니?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은 엉터리 신화, 즉 기근이 지구의 과잉 인구를 조절하는 작용 을 한다고 믿고 있단다.
(P.38)


FAO는 원인에 따라 '경제적 기아' 와 '구조적 기아'로 구분하고 있어. 대략 설명하자면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를 말한단다. 이를 테면 가뭄이나 허리케인이 덮쳐 마을과 경작지, 도로, 수원지가 파괴되거나, 혹은 전쟁으로 집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상점들이 파괴되고, 다리가 폭파되기도 하지. 그러면 갑작스럽게 식량이 바닥나고 수백만의 인구가 다음 날이면 금세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거야. 국제적인 도움의 손길이 재빨리 미치지 않으면 많은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지.
  그리고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를 말해. 그 나라의 경제발전이 더딘데 따른 생산력 저조, 급수설비나 도로 같은 인프라의 미정비, 혹은 주민 다수의 극도의 빈곤 등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단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비타민 결핍이나 단백질 부족에 따른 소아 영양 실조 등의 다양한 질병을 앓으며 서서히 죽어가게되지.
  그러니까 구조적 기아 는 간단히 말해서 외부적인 재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 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란다.
(P.48)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약 20년 전부터 일종의 패러다임의 변회를 경험하고 있다. 1991년 8월 소련이 무너지기 전까지 3분의 1정도의 인류가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잘못 불렸던 부패한 국가자본주의체제 아래 있었다. 냉전체제가 국제 사회를 지배했다. 다국적성과 독점성에 대한 충동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 충동은 양극구도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다. 거기에 내재하는 논리에 따라 자본은 단기간에 지구를 정복했다.
  또 한 가지 패러다임의 변회는 바로 글로벌화한 자본주의 내부에서 한 가지 자본, 즉 금융자본이 산업, 무역, 서비스 등의 자본들을 제치고 주된 자본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금융자본의 이윤극대화법칙은 오늘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P.159)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이런 패러다임 변화-사회적 양극구도의 몰락과 숨막히는 기술혁신-는 금융자본의 거의 완전한 글로벌화로 이어졌다.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99년에 유통된 금융지본은 이 해에 전 세계적으로 생산된 재화와서비스의 가치보다 63배나더 많았다.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힘은 막강하다. 이제 사람들은 그 기동성을 꾸준히 강화하여 투자의 결정과정을 단축하는 한 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금융수단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금융자본은 결코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증시는 매일 24시간 돌아간다. 증시를 돌아가게 하는 엔진은 이윤극대화, 손실에 대한 공포, 파산 리스크에 따르는 신경전, 그리고 정신착란과 황홀경을 되풀이하는 무제한의 이윤추구 등이다.
  1919년에 막스 베버는 “부란 일하는 사람들이 산출한 가치가 이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오늘날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 즉 경제력은 다혈질적인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이다.
(P.160)

​​
  브레히트는 “분노하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했다. 제네바의 은행가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규범도 가라, 규제도 가라, 국민국가도 가라 장애만 될 뿐이다. 선거도 가라, 일치도 가라, 정권교체도 가라, 민족주체성도 가라. 자유! 자본을 위한 자유, 서비스를 위한 자유, 특허를 위한 자유만 남아라. 그것은 관료제나 모든 종류의 제한에 반대하는 것이다. 오직 '완전하게 리버럴 한 시장'을 추구하는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정의를 논할 것인가? 이제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 세계시장밖에는...... 신자유주의 원리는 자본의 흐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그 유동성이 완전하게 용인되면 이윤이 가장 많은 쪽으로 자본이 집중된다는 것, 즉 자유로운 세계시장에 맡기면 진정으로 공평한사회가 실현된디는
것이다. ​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그런 주장의 자세히 검토되지도 않은 채 세계에 침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 무엇이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따지지 않은 채, 그저 '경제 합리성' 이라는 구호만이 난무하고 있다.
(P.162)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존속할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 한세계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누리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기 전에는 지상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 이다. 서로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수는 없을 것이다!."​
​(P.171)


  산업혁명 이후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해진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런 방임적 '자유주의' 논리는 처음에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자유주의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지배담론이자 하나의 도그마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방임적 자유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런 자유주의는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자유를 빙자한 자본의 횡포와 독점이 발생하고 빈부격차가 커짐에 따라 서민의 구매력이 감소하여 경기가 침체하는 등 많은 부작용이 빚어진 것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와 역할에 회의를 느끼며 방임적 자유보다 정부의 적극적 관리와 개입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그런 흐름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수정되는 길을 걸었다.
(P.187)


1912년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선 월슨은 무분별한 부당 경쟁을 통해 경제의 독점현상이 나타나고 부작용이 만연하는 것을 억제하고자, 새로운 방식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 로운 자유' (New Freedom) 정책을 제시하며 당선되었다. 1930년대 세계경제공횡을 극복하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 정책'도 '새로운 자유'정책의 흐름으로 꼽힌다. 이때 이야기되는 '새로운 자유 정책'(New Freedom policy)을 가끔 '신자유주의'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오늘날 세계화 담론과 결부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앞에서 말하는 '새로운 자유' 정책은 정부가 나서서 경제문제를 챙기는 것이고, 뒤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정부는 가급적 나서지 말고 민간자본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와 후자를 구별하기 위해 전자를 '새로운 자유주의' (New Liberalism)라 부르고 후지를 요즘 부르는 용어 그대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부르면 좋을 듯하다.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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