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Hopper)
롤프 귄터 레너 / 정재곤 / 마로니에북스 / 96쪽
(2017. 12. 01.) 


Edward Hopper
https://www.edwardhopper.net/



  대부분의 유럽인에게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말 독일과 유럽에서 있었던 대규모 호퍼 전시회는 그가 미국의 특정 예술 분파에 속하는 회화기법을 대변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호피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림의 주제 자체이고, 그의 그림에서 재현되는 '장면들'은 이중적 의미를 띤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에는 전형적인 미국의 분위기가 담겨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생활과 이로 인한 단절에 따르는 소외감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호퍼 작품이 보이는 모호성은 미학적 개방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가 미국 현대회화 절정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흔히 추상적 표현주의를 추구하는 잭슨 폴록과 에드워드 호퍼 두 사람을 신(新)리얼리즘의 추종자이면서, "미국 개인주의와 예술적 완성"이라는 양극을 함께 아우르는 예술가로 평가한다.
  이처럼 호퍼의 그림은 리얼리즘적 특성이 대단히 강조되는가 하면, 단순한 현실 복제 경향과 단절을 나타내고, 심지어 현실에 상상적 비전을 부여하는 회 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호퍼의 풍경회는 19세기 이후 나다니일 호손이나 허먼 멜빌, 에드가 앨런 포와 같은 문학가뿐 아니라, 토머스 골이나 '허드슨 강 파(派)'에 속하는 미국 풍경화기들이 즐겨 다루던 주제인 '경계선 경험', 즉 문명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라는 상상적 재현의
원형을 드러낸다.
(P.7)


  우리가 포나 멜빌의 글에서 보듯이 무한한 자연의 공간을 거침없이 누비고자 하는 신화적 차원은 이내 경화되고 방향감을 상실하고 마는 것처럼, 호퍼의 그림에서도 자연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변모한다. 자연은 문명의 상징물과 함께 재현되거나(그의 그림에는 길이나 육교, 등대가 집요하게 등장한다) 또는 문명의 상징물-들이 거대한 자연에 파묻혀 위협받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호퍼가 그린 거의 모든 집들은 바로 이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런 까닭에 호퍼의 풍경화는 전망보다는 경계의 표식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그의 풍경화는 자연 대신에 창문 너머의 실내 공간이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을 재현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도 집이나 다른 문명의 상징들에 의해 구획되곤 한다.
(P.7)

(Early Sunday Morning, 1930)

(Railroad Sunset)

  호퍼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 거리를 재현하면서도 그림 내부에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 그림이 취하는 전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림의 반대편, 즉  길 건너편에 줄지어 서 있으리라 집작되는 집들을 향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특히 이 그림의 집들은 <철길의 석양>에서 볼 수 있는 녹색과 적색, 황색톤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래서 이 두 그림은 서로 대칭이라도 이루듯,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는 오른쪽의 이발소 간판이 강렬한 색깔로 부각되어 있는가 하면, <철길의 석양>에서는 전철 탑이 시선을 왼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한편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는 풍경의 유기적 형태와는 거리가 먼 인위적이고 기하학적 형태가 지배적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은〈철길의 석양〉에 암시되이 있는 요소들의 변모를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공간과 생명이 없는 공간 사이의 긴장감을 빛과 그림자가 직각이나 뚜렷한 윤곽을 가진 형태 위에서 펼치는 조합으로 변환시기는 호퍼의 테크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게다가 이 그림은 문명의 지배 적인 면모를 전제로 하는 지각력을 화가가 의도적인 아이러니로써 연출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공간을 압도하는 거리의 재색된 전면은 그림의 바 깥으로까지 이어지는 건물 오른편의 어두운 부룬으로 쏠려 있다. 그림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거대한 건물군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그림처럼 호퍼의 다른 그 림들에서도 집이며 건널목, 탑 등은 건축물의 일부분인 경우가 많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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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퍼는 오브제를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회화적으로 변모할 때는 언제나 그 근거를 제시하곤 했다. 그는 앞에서 이미 소개했던 랠프 월도 에머슨과 괴테를 언급하는 글에서, 그림 그리는 행위를 기억과 직접 결부시카면서 에드가 드가 의 말을 옹호한다. “눈으로 보는 바를 그리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바를 그리는 것은 훨씬 더 훌륭한 일이다. 이는 상상의 힘 이 기억과 결합함으로써 변모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화가는 자신을 구속하 는 것. 즉 필연적인 것만을 다시 만들어낼 뿐이다. 기억과 창조성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자연이 부과하는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P.65)


  얼핏 리얼리즘에 충실한 듯이 보이는 호퍼의 회화는 복제가 가능한 현실을 단순히 재현해내지 않고, 언제나 순수 경험세계를 뛰어넘는 재구성을 지향한다. 호퍼가 자주 재현해내는 그림 속 그림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전반적 회화 작업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복제해내는 대신에 빈 공간을 창조해낸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지각이나 지각하는 능력 자체에서 드러나는 단절을 부각시킨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호퍼의 작품은 침묵의 메타포로 설명되곤 한다. 말이란 말해지지 않은 부분과 침묵의 지배를 받는 부분이 있다. 호퍼의 회화도 공개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부분이 은밀하게 구심점을 이룬다. 전반적으로 호퍼의 작품은, 분명한 의미로써 해석되는 회화적 상황을 측량할 길 없는 깊디깊은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 독특함을 보여준다.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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