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최재천/효형출판 / 267쪽
(2017. 11. 25.) 



  제아무리 대원군이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더 이상 타 문명의 유입을 막을 길은 없다. 어떤 문명들은 서로 만났을 때 충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어떤 것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게 될 것이다. 결코 일반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스스로 아끼지 못한 문명은 외래 문명에 텃밭을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예측을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싶다. 내가 당당해야 남을 수용할 수 있다.​
(P.48)


  종교가 스스로 모래판에 내려와 과학을 붙들고 씨름을 하려 할 때 나는 참 서글프다. 과학은 이른바 형이하학이지만 종교는 형이상학 중에도 으뜸이
아니던가. 과학은 모든 걸 증명해야하는 멍에를 지고 있지만 종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믿음은 증명보다 훨씬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P.64)


  사실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망측한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한번쯤《삼국지》에 그려진 후한말과 삼국시대의 세태를 연상하게 된다. 어제의 적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 이불 속에서 뒹굴기를 밥 먹듯 하며 전 국민을 상대로 공언한 맹세를 한 점 부끄럼도 없이 순식간에 뒤집는 우리네 정치인들. 연인이나 친구에게는 불륜과 배반의 흔적만 보여도 가차없이 절교를 선언하지만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져야 할 정치 지도자들의 부도덕에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깨끗한 한 표를 건네는 우리 유권자들. 이 엄청난 모순 앞에서 나는 종종 동물들의 사회를 떠올린다.
(P.85)


  나는 “선(善)과 악(惡)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고 한 공자님 말씀을 늘 선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간혹 벌어지는 악도 선한 눈으로 바라보면 배울 것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그런데 악행이 선행보다 더 만연되어 있고 악을 행하더라도 성공만 하면 별 문제 없이 칭송받는 요즘 같은 세상에 악에서 선을 끌어내리는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사실 조금은 걱정스럽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삼국지》를 읽으며 마키아벨리식 권모술수를 자칫 삶의 지혜로 배울까 염려하는 이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P.88)


  요즘은 우리 음식이 세계 각국에 잘 소개되어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식사대접히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우리
음식을 거리낌없이 덥석덥석 집어 먹는다. 그런데 그들이 기겁을 하며 못 먹 는 게 두 가지 있다. 길모퉁이 수레에서 파는 번데기가 하나고 산 낙지가 다른
하나다. 분명히 살아 꿈틀거리는 낙지의 다리를 토막쳐 입 안에 넣으면 빨판이 입 천장에 들러붙어 살겠다고 온통 난리다.
(P.107)


  이런 점으로 보면 식물은 동물에 비해 성적으로 더 대담한 면이 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꽃을 찾아가 대신 잠자리 를 같이 해줄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그들은 온 천하에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놓고 산다 꽃이란 다름 아닌 식물의 성기다. 그걸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의 코 밑에 바친다. 원색적인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그리는 꽃을 보며 그 강렬한 성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없으리라.
(P.171)


  작은 규모의 집단에서는 세습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 꾸려야 하는 대기업들은 투명한 전문경영인이 아니고는 더 이상 이끌어갈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아마도 그래서 대부분의 국기들도 더 이상 군주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국왕을 모시고 사는 영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도 왕은 그저 상징적 존재일 뿐 실권을 쥐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훌륭한 군주가 나리를 통치하던 시절만큼 태평성대가 없었다 자비롭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리를 맡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군왕정치보다 더 좋은 정치체제가 없다는 사실은 정치학자가 아니라도 짐작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가장 효율적인 제도가 결코 아니다. 다만 가장 공평하고 합리적인 제도일 뿐이다.
(P.198)


  저는 어려서 반성문을 많이 썼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덕에 제가 글줄이라도 몇 줄 꿸 줄 알 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책에 담긴 많은 글들은 제가 자연에게 써 올린 반성문들입니다.
  제가 감히 인류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함께 무릎을 꿇게 해드렸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저 일부라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길 빕니다.
  그런데 반성문치곤 제 글의 대부분에 이렇다 할 결론이 없습니다. '동물농장'도 아닌데 동물들의 눈으로 감히 인간을 훈계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삶을 뒤집어보려 했을 뿐입니다.
(P.3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