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 가기
알랭드보통 / 정영목 / 143쪽
(2017. 11. 18.)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런 범주에 드는 다른 분야의 예술가로는 바흐나 레너드 코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호퍼 예술의 중심 주제는 외로움이다. 호퍼의 인물들은 집에서 멀리 떠니온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호텔 침대 가장자리에 서서 편지를 읽거나 바에서 술을 마신다. 창밖의 움직이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호텔 로비에서 책을 읽는다. 상처받은 듯 자기 내부를 응시하는 표정이다. 방금 누군가를 떠나왔거나 떠나보낸 것 같다. 그들은 일이나 벗을 찾으며 오래 머물지 않을 곳을 떠돌고 있다. 시간은 주로 밤이다. 창문으로는 어둠이 다가오고, 넓은 시골 또는 낯선 도시의 위협이 그 뒤에 도사리고 있다.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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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화가와 만나서 얻을 수 있는 부수입은 그들의 그림 덕분에 이 세상에서 화가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을 만한 곳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호퍼 적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민감해진다. 이제는 호퍼 자신이 돌아다녔던 북미의 여러 곳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든 모텔과 휴게소, 도로변 식당과 공항, 버스 정류장과 심야 슈퍼마켓이 있는 데서는 호퍼적인 곳을 찾을 수 있다. 호퍼는 '주변적인' 장소들, 집과 사무실 너머에 있는 건물들, 특별한 종류의 소외된 시정詩情을 느끼며 지나치게 되는 곳들을 제재로 삼는 미술 유파의 아버지다. 우리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와 해너 스타키의 사진들, 빔 벤더스의 영화와 토머스 베른하르트의 책 이면에서 호퍼의 존재 를 느낄 수 있다.
(P.12)


  어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다다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 그림이 담긴 엽서를 사서 책상 위의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놓기도 한다(내가 호퍼의 그림들을 여러 번 그렇게 했듯이). 그 그림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 마음 깊은 곳에서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감정적 질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눈앞에 존재하는 견고한 상징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 그 림을 보면서 그 특질이 조금씩 벗겨져서 우리에게로 오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 그림에서 반기는 것은 제재라기보다는 분위기다. 색과 형태를 통하여 전달되는 감정적 태도다. 우리는 물론 그런 감정으로부터 곧 멀리 쓸려 내려 갈 것임을 안다. 그림이 전하는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여러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대담한 의견을 내기도 하고, 확신을 품기도 하고, 가벼운 재치를 보이기도 하고, 부모로서 권위를 세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망록으로서, 닻으로서 그 그림을 환영하는것이다.
(P.15)


  공항의 매력이 집중된 곳은 터미널 천장에 줄줄이 매 달려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텔레비전 화면들이다. 미학적 자의식이 전혀 없는 그 모습. 노동자 같은 상자와 보행자 같은 활자는 아무런 위장 없이 자신의 감정적 긴장 상태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을 드러낸다. 도쿄,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바르샤바, 시애틀, 리우. 이 화면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마지막 줄의 시적 울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마지막 줄은 소설을 쓴 곳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똑같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쓰는 행위의 바탕이 된 세계주의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 화면들에 쉬지 않고 나타나는 안내문, 가끔 커서의 초조한 박동을 수반하 기도하는 안내문은 일견 단단하게 굳어버린 듯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냥 복도를 따라 내려가 비행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착륙할 것이다. 오후 세 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 감정에 깊은 크레바스들이 파여 있을 때, 늘 어딘가로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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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이륙에는 심리적인 쾌감도 있다.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형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점視點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한다. 도로는 산을 피하느라 곡선을 그리고, 강은 호수로 항하는 길을 따르고, 고압선 철탑은 발전소에서
도시로 이어 지고, 땅에서 보면 제멋대로인 것 같은 도로들은 잘 짜인 격자로 드러난다.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일치시키려 한다. 익숙한 책을 새로운 언어로 판독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P.35)


  비행기에서 구름을 보면 고요가 찾아는다. 저 밑에는 적과 동료가 있고, 우리의 공포나 비애가 얽힌 장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지금은 이주 작다. 땅 위의 긁힌 자국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유서 깊은 원근법의 교훈은 전부터 잘 알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비행기 창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있을 때만큼 이것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드물기에, 우리가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심오 한 철학을 가르치는 스승이라 부를 만하다.
(P.38)


  근대 작업장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컴퓨터, 자동화, 세계화 등괴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 특징은 우리의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디는 널리 퍼진 믿음이다. 어느 사회나 일을 그 중심에 두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처음으로 일이 벌이나 고행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처음으로 정신이 멀찡한 인간이 경제적 압박을 받지 않아도 일을 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 어떤 일을 선택하느냐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받는디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사람에게 묻는 핵심적인 질문은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가 아니라 하는 일이 무어냐다. 마치 오직 이 사실만이 인간 생활의 독특한 특징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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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일에서 행복을 얻기가 그렇게 힘들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내세우는 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일자리에서 프로이트나 루스벨트가 맛보았던 만족감의 일부라도 맛볼 수 있기 를 기대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기대하는 대신 마르 크스를 읽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마르크스는 더 나은 세상에 관한 처방에서는 들렸지만, 왜 일이 그렇게 괴로울 때가 많은지 진단할 때는 지금 보아도 상당히 날카롭다.
(P.78)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의 기초>(1785)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들을 부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로" 존중한니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칸트를 참조하여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새로운 과학인 경제학이 대규모로 “부도덕"을 자행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경제학은] 노동자를 일하는 동물로 밖에 알지 못한다-최소한의 육체적 요구만 남은 짐승으로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피고용인에게 주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돌아가도록 칠하는 윤활유와 같다. 일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
   마르크스가 역사가로서 능력이 떨어져 산업화 이전의 과거를 별나게 이상화하고 부르주아지를 지나치게 혹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을 포착하고 극화했다는 점에서 여전치 가치가 있다.
(P.79)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프루스트)
(P.122)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 더 많이 알 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세계는 어떠 한지 돌아보게 된다.
(P.126)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 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 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 는 것이다.
(P.126)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여지면 도덕적 의미를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는 방법,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 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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