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 박상미 / 한길아트 / 118쪽
(2017. 12. 09.) 



내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관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그동안 비평가들로 인해 빚어진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이제껏 씌어진 글들은 왜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호퍼의 그림 앞에서는 비슷한 종류의 감동을 받는지, 그 주된 이유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 내 접근 방식은 주로 미적인 것으로 호피 그림의 사회적인 면보다는 그 회화적 전략에 관심을 둔 것이다.​
  물론 그의 그림은 이 세상과 약간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흔히 그의 그림을 두고 20세기 초 미국인의 삶의 변화에서 온 만족감과 불 안감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관객들이 그의 그림에 그토록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다. 호퍼의 그림은 사회상의 기록도, 불행에 대한 은유도 아니다. 또 그처럼 부정확한 성격을 지니는, 미국인의 심리적 기질에 관한 것도 아니다. 호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이 책의 주제는 비로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P.5)


  <나이트호크>를 보고 있으면 두 개의 모순적인 명령어 사이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사다리꼴은 가던 길을 계속 가라고 우리를 재촉 하고, 어두운 도시 속 환한 실내는 우리에게 머물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도로와 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호피의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역시 차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을 우리와 함께 보 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보다 앞서 보았던 사람들도 없다. 그림 속의 장면은 오직 우리에게만 존재한다. 경험하는 모든 것은 완벽하게 우리 것이 될 것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상실감과 덧없는 부재감을 동반하는, 여행이 배제된 순간은 점점 무성해질 것이다.
(P.15)
​​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를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호피의 그림은 암시로 기득 차 있다.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지고, 그림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림은 우리를 더욱 끌어들인다. 어차피 우리는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떠나가는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우리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면-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이야 한다. 호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위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 (vacancy)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위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지 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이나 있다고 말해준다.
(P.48)


  시간을 둘러싼 질문들-우리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가?-은 호퍼가 그의 그림에 어둠을 얼마나 가두어놓느나, 또는 적어도 제한하고 있느냐의 문제 안에 존재하는 것 같다. 호퍼의 그림에는 기다림이 많다. 호퍼의 그림 속 사람들은 아무 할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배역(配役)으로부터 버림 받은 등장인물처럼, 이제 기다림의 공간 속에 홀로 갇힌 존재들이다. 그들에겐 특별히 가야 할 곳도, 미래도 없다.
(P.49)​


  빛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밖에 나가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호퍼는 밖에서 유화작업을 하지 않았다. 호퍼처럼 천천히 작업하는 화가에게 빛은 너무 빨리 바뀌었던 것이다 자세한 묘사가 사라지고 있는 그의 세계와 어울리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상상력이 필요 했고, 이러한 작업에는 작업실이 최적이었다. 그의 그림은 즉흥적이 기보다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계획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빛은 축하의 빛이라기보다는 기념의 빛이다. 호퍼의 빛이 기하학적인 견고성을 갖추게 된 것은 그가 빛이 흩어지지 않도록 빛에 어떤 생명을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 오히려 빛이 저항하고 있는 대상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그에게 빛은 결국 어둠이라는 더욱 강한 세력의 휴지(休止)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P.58)


  우리가 이 그림(뉴욕극장, 1939) 앞에 서 있는 모양은 안내원과 더 닮았는 지도 모른다. 그림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들여다보고 있는 거라고 한다면, 내면을 '보고 있는 안내원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가 설명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의 시선이 그림의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우리는 두 가지 모순적인 충동-그림을 보고, 그림 속을 들여다보는-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호퍼의 다른 그림에서처럼 그림의 기하학적 요소와 서사성이 부딪히며 빚어 내는 드라마를 보는 대신, 이 둘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본다. 어떤 이는 여자 안내원이 눈을 감고 있으니 관객과 상응할 수 없다고 말 할지도 모른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에서 시선을 돌려 내면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의 사고라는 공간 속에 유폐된 이미지들이 세상에 관한 지식으로 변하는 것이니까.
(P.76)


그림(바다 옆의 방)의 왼편으로는 자연과 상반되는 모습인, 좁고 붐비는 실내가 있다. 그곳엔 소파 또는 의자와 옷장 그리고 그림과 같은 집안 살림들이 보인다. 그림은 우리에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 것을 요구 하는데, 바다가 아니라 좁은 틈으로 보이는 실내를 보라고 하는 것 같다. 바다마저 실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고, 빛은 우리가 보아야 할 방향을 가리기는 듯하다 호퍼의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이 그림에서 순간은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기념비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띤 것 같지도 입다. 대신 우리가 보는 시간을 감안하여 연장된 순간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가로질러 우리는 그림 깊숙이 들어간다. 가구로 채워진 두번째 방은 첫번째 방의 반향(反響)이다 두 공간이 한 쌍을 이룬 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가정의 안정에 기본이 되는 지속과 연결이라는 개념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연의 의지를 구현하는 한 쌍의 힘인 바다와 하늘은 전혀 해롭지 않은 모습이다
(P.99)


  호퍼의 후기 작품인〈빈방의 빛〉에서 빛은 고요하지 않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같은 방에 두 번-한 번은 창과 가까운 벽에,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조금 안으로 들어간 벽에-떨어진다. 이 그림에 서 일어나는 일은 이게 전부이다. 우리의 시선은〈바다 옆의 방〉에서 처럼-실제 거리든 은유적인 거리든-움직이지 않는다. 빛은 두 공간을 한꺼번에 비추지만, 연속성의 느낌보다는 종말의 기미를 준다. 이것이 어떤 리듬을 내포하고 있다면, 이 리듬은 도중에 끝날 것이다.
(P.102)


​  호퍼의〈이른 일요일 아침〉은 전통적인 구성을 파괴하는 평면적 구성으로 일단 눈길을 끈다. 하지만 그림은 예상외로 그 평면성을 다차원적으로 만드는 여러 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창문 이다. 호퍼의 그림에는 건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 건물들에는 창문이 있고, 창문들 중 어떤 것은 닫혀 있고 어떤 것은 반쯤 열려 있는 상태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 없이 창문들은 열리고 닫힘을 반복한다. 창문의 열려진 틈에 호퍼는 주로 가장 어두운 색을 칠하는데, 이
것은 다른 그림들에서 깊이감을 주는 데 이용되는 장치들(예들 들면 소실점의 이용이라든가)보다 덜 명백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강렬한 힘으로 보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이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아득한 감정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평면적인 그림에서 예상치 못한 깊이감이 느껴지는 순간 낯익은 것이라 생각되던 일요일 아침의 정경은 갑자기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P.106)


이 책은 흔히 볼 수 있는 화가의 모노그래프가 아닌, 스트랜드라는 시인의 특별한 시각을 담은 책이다. 호퍼는 불공평 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주 '미국적 사실주의 작가'라고 일컬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이런 평가에 대해 항상 불만을 품어왔다 호퍼의 폭과 깊이를 제한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호퍼는 보통의 평보다 좀 더 보편적이면서도 복집한 작가이고, 스트랜드는 그걸 누구보다 정밀하게 읽어내고 있다. 난 과학보다 정확한 것이 시인의 언어라고 믿는 편이데, 스트랜드는 이 책에서 놀라운, 때로는 따라 잡기 힘들 정도의 정교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른 일요일 아침>에서 그의 관찰은 매우 인상적이다.

  '부동(不動)과 정적(靜寂)의 몽상적인 조화로 미술적인 순간은 길게 늘어나고, 그 앞에 선 우리는 특별히 허락된 목격자들이다.'

  호퍼 그림의 분위기뿐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 그리고 호피의 그림 이 요구하는관람객의 '특별한 시각' 즉, 그 그림의 초월적인 깊이까지를 압축해서 담아낸 문장이다. 또한 스트랜드는 호퍼의 공간을 시간적인 은유로 표현하면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원을 열어주기도 한다.
(P.112)


이제까지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한 방식이 모두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스트랜드의 고유한 '호퍼 읽기를 통해 호퍼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 도움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술을 보는 전반적인 시각까지도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림을 볼 때 필요한 건 미술사적인 지식과 비평적 관찰뿐만이 아니다. 스트랜드를 통해 우리는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시각, 명철한 시정으로 예술에 접근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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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상상
하비에르 페레스 / 김유경 / 어바웃어북 / 280쪽
(2017. 12. 06.) 



  어떤 상상은 허무맹랑한 '공상'이라며 쓸모없이 여기고, 어떤 상상은 '사색'이라며 높이 삽니다. 상상은 바람과 같습니다. 가뒤두거나 어떤 형태를 만 들 수
없습니다. 바람처럼 그냥 자유롭게 흐르게 둬야 합니다. 그런 상상에 등급이란 어울리지 않습니다. 평소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을 머릿속에 가뒤두고 있습니다. 가끔은, 생각을 자유롭게 놓아두세요. 이곳저곳을 방황하다 돌아온 당신의 생각은 꽤 근사한 모습이 되어 있을 거예요.
(P.5)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배가
고파지면 사과를 따 먹곤 했습니다.
때로는 나무 뒤에 숨어 숨바꼭질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나무에 기대서 단잠을 자기도 했지요
소년은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소년은 오늘도 어김없이 나무를 찾아욌습니다.

“시간이 흘러 네가 날 떠나려고 해도,
널 붙잡자고 내 전부를 내주지는 않을 거야.”

나무는 밑동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아버지 사과나무를 보며 중얼거렸습니다.
(P.36)


연필을 뾰족하게 깎고
어디로 갈지 생각한다
화성, 달, 해왕성, 명왕성,
심이 더 굵거나 얇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연필이랑
상상력이면 충분하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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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 문학동네 / 282쪽
(2017. 12. 05.) 



  제이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기만의 세계지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에는 무관심했다.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어른들의 말은 거의 믿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가 헛소리라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그는 평등하게 같은 면적을 차지하고 똑같이 먹어대지만 갇혀 있는 우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개들의 운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P.65)
​​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고통을 외면하는 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는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고통은 피할수 없는 거야.”
  “피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할 수 있죠.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돼요. ”
  “세상일이 네 말대로 간단하다면 좋겠지.”
  “뭐가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고통의 경중은 누가 가리지? 네가 가리나?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만 고통받는 줄 알아? 개장수들도 먹고사느라 힘들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어. 네가 타이어를 펑크냈기 때문에 그 집의 아이들이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너는 우선 어른이 돼야 한다. 그럼 자연히 알게 돼.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제 판단으로 행동한 거고, 그러니까 아무 후회가 없어요."
  “너는 세상에 원한을 품고 있어. 그래서 네 알량한 정의의 이름으로 그걸 심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위험해.”
  제이는 마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한 안내를 들은 소비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P.73)
​​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계들이 있어. 바로 센서야. 감각을 하는게 그것들의 목적이야. 지구 곳곳의 센서들은 기온과 습도와 바람을 측정하지. 어떤 센서는 전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시베리아 호랑이가 지나가면 반응을 하고 사진을 찍어 . 센서는 너무나도 많아. CD의 홈을 읽기도 하고 적외선으로 피사체와 렌즈 사이의 거리를 재기도 하고. 그런데 고통을 감지하는 센서는 없어.”
  “그게 너라는 거야?"
  “그래,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고통이 내 영혼을 짓눌러. 그들이 지고 가는 삶의 무게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아? 너도 편하게 살고 싶을 거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내 운명이야."
(P.133)


  사람들은 슬픔에 대해서 말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무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무지에 대해 불편한 수치심을 품고 있었다. 여기 물을 담은 풍선이 있다고 하자. 풍선이 터지면 물이 갑자기 쏟아질 것이다. 그 안에 든 것이 만약 슬픔이라면 내 몸은 슬픔에 젖게 될 것이다. 그대에야 그게 무슨 색인지. 어던 냄새를 풍기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풍선을 내가 자의로 터뜨려버린다면 어떨까? 그때에도 슬픔은 그대로 슬픔일까?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죄책감이 슬픔을 덮어 버리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죄책감으로 슬픔을 '돌려막는' 자야말로 진정 강한 자가 아닐까?
(P.172)​
​​

슬픔이든 죄책감이든 다시의 나로서는 공히 멀고 고상한 감정이었다. 그 고상한 감정들을 강렬히 원하는 또다른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깊은 혼란을 느꼈다. 그런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내게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아니 그것을 처음부터 거부하고, 마치 바텐더가 이런저런 술을 섞어 칵테일을 제조하듯, 나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낸 것을 나 자신의 계획에 따라 온전히 경험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내 마음속의 혼란은 결국 살인의 흰상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을 떠올릴 때만이 내 마음 깊은 곳의 조바심과 열패감은 사 라졌다. 태풍이 접근하면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듯이.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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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 문학동네 / 252쪽​
​(2017. 12. 02.) 




  나쁜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어떤가요. 아이는 자신을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그럴수록 부모는 사랑을 주지 않음으로써 관계 상위를 차지하는 현상을 지적하기도 했죠.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요, 사회 전체적으로도 마찬 가지예요. 예를 들면 그런 게 있더라고요, 압박면접이라고 하나요? 그 무슨 사디스트적인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취업을 하 겠디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거잖아요. 정확히 그건 나쁜 부모가 하는 행동이거든요. “너는 모자라다, 너는 왜 이렇게 부족해” 이런 에기를 하면서 모욕을 주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똑같아요. 그런데도 지원자는 웃어야 되잖아요.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되고, 자기는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처신해야 하고요. 심지어 실수로라도 반항하지 않도록 강자의 논리로 자기를 설득하잖아요. '경쟁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이런 걸 스스로에게 설득시키고 받아들이는 거죠. 나쁜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아이와 비슷한 거죠.
(P.12)


  이제는 열심히 해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이 아니라 비관입니다. 어떤 비관인가? 바로「비관적 현실주의입니다.」비관적으로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되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기도 어렵고 가족도 바꾸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 이다,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 자신이라도 바꿔라, 저는 그것마저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다면 그런 책들이 그렇게 많이 팔릴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대책 없는 낙관을 버리고, 쉽게 바꿀 수 있디는 성급한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고 비관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P.22)

​​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은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P.27)


  육체의 근육도 일정한 훈련을 통해 길러지듯이 감성 근육도, '아, 오늘부터 개인적 즐거움을 깊이 추구해야지'한다고 해서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을 읽고 즐기는 것은 원래 어렵습니다.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 예를 들어 19세기의 귀부인이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나는 얘기라든가, 1920년대의 미국의 벼락부자가 옛날 애인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얘기가 단박에 마음에 와닿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소설이라는 것은 끝까지 읽어도 주제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제를 알기 어려운 소설일수록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능 있는 작가일수록 작품의 주제를 독자가 쉽게 찾지 못하도록 잘 숨겨둡니다. 훈련된 독자 역시 너무 간단해서 주제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 소설 보다는, 지성과 감성을 충분히 사용하면서 적절한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작품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소설을 더 좋아합니다.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화다 미술도 그렇습니다. 소설을 진지하게 읽고 영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입니다.
(P.31)


  예전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오감으로 글쓰기'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어렸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쓰게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학생들이 시각적인 기억에만 의존해 건조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오감을 다 표현해 다시 써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함께 남해안의 해수욕장에 놀러간 기억에 대해 쓴다면, 저 먼 수평선에 갈매기들이 날고, 그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바다로 걸어들어 갔는데, 해초가 종아리에 미끈거리며 감기고 수영을 하며 들이킨 바닷물은 엄청나게 짰다, 이런 게 오감의 글쓰기인데요. 일단 오감을 이용해 글을 쓰면 글 자체가 좋아집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그냥 시각만 이용해서 글을 쓸 때보다 훨씬 깊게 그때의 경험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쓰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는 학생도 있 었습니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여러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P.33)


  세상에 대해서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건강한 개인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입니다.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은 지식만으로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식만 있고 자기 느낌은 없는 사람, 가지감정을 표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개인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 감정은 감추고 다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일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P.34)

​​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 만은 쓸 수 있습니다.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림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굴복을 거부하는 자들이니까요.
(P.56)


  글은 한 글자씩 씁니다. 제아무리 빠른 사람도 글자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글자찍 한 글자씩 써야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글을 끝낼 수 있디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데요. 이렇게 써나기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은, 숨어 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언어는 논리의 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즉 말이 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 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가진 자기해방의
힘입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과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P.58)


  자, 이제 우리가 마음속의 악마를 잠재우고 자기 예술을 시작하려고 할 때, 이제는 밖에서 적들이 나타납니다.
배우자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회사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현실적인 이유들을 들어 여러분이 하려는 작업을 막아섭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하겠다고 할 때, 그들은 묻습니다. 이건 정말 마법의 질문입니다. “그건해서 뭐하려고 그래?” 힘이 쭉 빠집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뭘 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지요. 그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유용한 것도 생산하지 않고 우리 앞날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쓰거 나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거나 좋은 직장을 얻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방치해두었던 우리 마음속의 '어린 예술가'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술과 약물의 도 움 없이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뭔가를 시작하려는 우리는 “그건 해서 뭐하려고 하느냐는 실용주의자의 질문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라고 말하면
됩니다. 무용한 것 이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니까요.
(P.76)


  작가가 되는 데 책은 거의 백 퍼센트의 역할을 하죠. 오직 책만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듭니다. 경험도 아니고, 주변 사람 도 아니고, 정말 책만이 온전하게 작기를 만든다고 저는 생각 해요.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작가는 독자였죠. 작가에서 출발해서 독자가 되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우리나라의 동료 작가 들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작가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다들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처음에는 특정한 소설, 특정한 작가의 열렬한 독자가 되죠. 그것을 읽다가 그보다 더 깊은 만족을 주는 다른 작가, 다른 책들을 읽게 됩니다. ​
  어느 정도 읽다보면, '나도 이런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그런 때가 있어요. 자기 안에서 쓰고 싶은 내용과 자기가 읽어온 책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죠. 그게 대부분의 작가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작기들이 쓰는 소설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일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작기들은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서 그것을 다시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읽었으나 백 퍼센트 동의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응답 을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P.84)


  최고의 소설이란
  다 읽었는데 밑줄을 친 데가 하나도 없고, 그럼에도 사랑하게 되는 소설. 읽으면서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걸린 데가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도 왠지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남에 게 요약하거나 발췌하여 전달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런 소설 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P.92)


  예전에 토니 모리슨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서가를 둘러보고 거기에 없는 책을 쓴다.” 또 어떤 작가는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쓴다고 말했죠. 다 비슷한 말입니다. 내가 읽고 싶거나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거지요. 저는 토니 모리슨의 말을 더 좋아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서가를 둘러본다는 거에요. 서가를 둘러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책을 다 겸토한다는 거죠. 작가에게 독서는 그런 의미에서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읽어보고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지요. 내가 정말 알고 싶었거나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지금껏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것이 있는가? 그것을 나는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서 작가는 늘 서가를 둘러보고 그 안에 넣고 싶은 책을 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작가로서 그런 야심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P.139)


  소설을 많이, 깊이 읽는 사람은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다양한 인물을 알고 있는 사람 겪어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그러지 않은 이들보다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뉴욕 뉴스쿨 대학 심리학과의 연구에 따르면, 소설 중에서도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보다 인물 묘사에 집중한 소설을 읽는 이들이 훨씬 더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의도를 잘 읽어 낸다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때문에 타인을 깊이 이해한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인생이란 예기치 못한 사건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여러 인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건들을 맞닥 뜨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우리가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를 사람들을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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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GUTE NACHT)

나 방랑자 신세로 왔으니,
방랑자 신세로 다시 떠나네.
오월은 흐드러진 꽃다발로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지.
그 아가씨는 사랑을
속삭였고, 그 어머니는
결혼까지 말했지만이제 온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고,
나의 길에는 눈만 높이 쌓여 있네.

떠나가는 나의 방랑길에
이별의 때를 정할 수는 없다네: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네.
나의 길동무는
달그림자뿐,
하얗게 눈 덮인 벌판에서
나는 짐승의 발자국을 찾네.

무엇하러 더 오래 머물다가,
사람들에게 떼밀려 갈 텐가?
길 잃은 개들아
집 앞에서 실것 짖으려무나!
사랑은 방랑을 좋아해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네
정처 없이 떠돌 수밖에
귀여운 내 사랑, 잘 자요!

그대의 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대의 단잠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발걸음 소리 들리지 않도록
살며시, 살며시 문을 닫네!
가면서 나는 그대의 방문에다
"잘 자요'라고 적어 놓네,
내가 당신을 생각했음을
보아주기를 바라며.​


얼어 버린 눈물

얼어 버린 눈물방울들이
두 뺨에서 굴러떨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던 것인가?

아, 눈물아, 나의 눈물아,
너희는 왜 그리 미지근하여,
차가운 아침 이슬처럼
얼어서 얼음이 되는 거니?

하지만 너희는 내 가슴의 샘에서
펄펄 뜨겁게 쏟아져 나온다,
온 겨울의 얼음 덩어리들을
모두 다 녹여 버릴 것 같구나.


보리수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곳을 지나야 했다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네.

나뭇가지들이 살랑거리면서,
꼭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내게로 오라,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세차게 때렸네,
모자가 바람에 날려도,
나 돌아보지 않았네.

이제 그곳에서 멀어진 지
벌써 한참이 되었네,
그래도 여전히 속삭이는 소리 들리네: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

거리의 악사

저편 마을 한구석에
거리의 악사가 서 있네,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손풍금을 빙빙 돌리네.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지만;
그의 조그만 접시는
언제나 텅 비어 있어.

아무도 들어 줄 이 업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네;
개들만 그 늙은이 주위를 빙빙 돌며
으르렁거리고 있네.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손풍금을 돌린다네, 그의 악기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네.


슈베르트가 한 친구를 찾아갔다가 친구는 집에 없고 그의 책상에 놓여 있는 뮐러의 시집을 무심코 읽고, 너무 좋아서 그 시집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집으로 들고 와 그중 몇 편을 곧장 노래로 작곡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렇다면 작곡가 슈베르트에게 그토록 감흥을 줄 만큼 그 무언가가 뮐러의 시 속에 내재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시인 빌헬름 뮐러는 자신의 시가 노래로 작곡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일찍부터 피력한 바 있다. 막 스물한 살이 된 패기만만한 시인 뮐러는 어느 날의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악기를 연주할 줄도 노래를 부를 줄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시를 짓는다면, 그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면서 연주를 하는 것이다 멜로디를 내 힘으로 붙일 수 있으면 나의 민요풍 시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질 것이다. 그러나 확신컨대, 나의 시어에서 음률을 찾아 그것을 내게 되돌려 줄,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바로 프란츠 슈베르트였던 것이다.
(P. 177)


​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보다 시인의 더 많은 개인적 체험이 반영된「겨울 나그네」에서는 나그네의 실존적 몰락과 자아 상실의 과정이 잘 나타난다. 뮐러가 1821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824년에 완성한「겨울 나그네」는 사랑을 잃은 젊은이가 실의와 굴욕과 슬픔에 빠진 나머지 겨울 벌판을 정처 없이 헤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방랑자 신세로 잠시 머물렀던 마을을 떠난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을 맞으면서 눈과 얼음의 얼어붙은 세계 속을 오직
사랑했던 사람을 잊기 위해 걸어간다. 그는 절망에서 어느덧 광기의 징조까지 보인다. 죽음을 원했지만 거부당하고, 마지막에 그는 길바닥에서 걸식하는 늙은 악사와 손을 맞잡고 눈이 평평 쏟아지는 풍경 속을 비틀거리면서 사라진다.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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