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다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 문학동네 / 252쪽​
​(2017. 12. 02.) 




  나쁜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어떤가요. 아이는 자신을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그럴수록 부모는 사랑을 주지 않음으로써 관계 상위를 차지하는 현상을 지적하기도 했죠.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요, 사회 전체적으로도 마찬 가지예요. 예를 들면 그런 게 있더라고요, 압박면접이라고 하나요? 그 무슨 사디스트적인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취업을 하 겠디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거잖아요. 정확히 그건 나쁜 부모가 하는 행동이거든요. “너는 모자라다, 너는 왜 이렇게 부족해” 이런 에기를 하면서 모욕을 주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똑같아요. 그런데도 지원자는 웃어야 되잖아요.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되고, 자기는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처신해야 하고요. 심지어 실수로라도 반항하지 않도록 강자의 논리로 자기를 설득하잖아요. '경쟁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이런 걸 스스로에게 설득시키고 받아들이는 거죠. 나쁜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아이와 비슷한 거죠.
(P.12)


  이제는 열심히 해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이 아니라 비관입니다. 어떤 비관인가? 바로「비관적 현실주의입니다.」비관적으로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되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기도 어렵고 가족도 바꾸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 이다,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 자신이라도 바꿔라, 저는 그것마저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다면 그런 책들이 그렇게 많이 팔릴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대책 없는 낙관을 버리고, 쉽게 바꿀 수 있디는 성급한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고 비관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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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은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P.27)


  육체의 근육도 일정한 훈련을 통해 길러지듯이 감성 근육도, '아, 오늘부터 개인적 즐거움을 깊이 추구해야지'한다고 해서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을 읽고 즐기는 것은 원래 어렵습니다.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 예를 들어 19세기의 귀부인이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나는 얘기라든가, 1920년대의 미국의 벼락부자가 옛날 애인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얘기가 단박에 마음에 와닿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소설이라는 것은 끝까지 읽어도 주제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제를 알기 어려운 소설일수록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능 있는 작가일수록 작품의 주제를 독자가 쉽게 찾지 못하도록 잘 숨겨둡니다. 훈련된 독자 역시 너무 간단해서 주제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 소설 보다는, 지성과 감성을 충분히 사용하면서 적절한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작품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소설을 더 좋아합니다.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화다 미술도 그렇습니다. 소설을 진지하게 읽고 영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입니다.
(P.31)


  예전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오감으로 글쓰기'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어렸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쓰게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학생들이 시각적인 기억에만 의존해 건조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오감을 다 표현해 다시 써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함께 남해안의 해수욕장에 놀러간 기억에 대해 쓴다면, 저 먼 수평선에 갈매기들이 날고, 그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바다로 걸어들어 갔는데, 해초가 종아리에 미끈거리며 감기고 수영을 하며 들이킨 바닷물은 엄청나게 짰다, 이런 게 오감의 글쓰기인데요. 일단 오감을 이용해 글을 쓰면 글 자체가 좋아집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그냥 시각만 이용해서 글을 쓸 때보다 훨씬 깊게 그때의 경험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쓰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는 학생도 있 었습니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여러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P.33)


  세상에 대해서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건강한 개인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입니다.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은 지식만으로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식만 있고 자기 느낌은 없는 사람, 가지감정을 표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개인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 감정은 감추고 다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일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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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 만은 쓸 수 있습니다.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림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굴복을 거부하는 자들이니까요.
(P.56)


  글은 한 글자씩 씁니다. 제아무리 빠른 사람도 글자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글자찍 한 글자씩 써야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글을 끝낼 수 있디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데요. 이렇게 써나기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은, 숨어 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언어는 논리의 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즉 말이 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 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가진 자기해방의
힘입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과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P.58)


  자, 이제 우리가 마음속의 악마를 잠재우고 자기 예술을 시작하려고 할 때, 이제는 밖에서 적들이 나타납니다.
배우자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회사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현실적인 이유들을 들어 여러분이 하려는 작업을 막아섭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하겠다고 할 때, 그들은 묻습니다. 이건 정말 마법의 질문입니다. “그건해서 뭐하려고 그래?” 힘이 쭉 빠집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뭘 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지요. 그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유용한 것도 생산하지 않고 우리 앞날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쓰거 나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거나 좋은 직장을 얻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방치해두었던 우리 마음속의 '어린 예술가'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술과 약물의 도 움 없이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뭔가를 시작하려는 우리는 “그건 해서 뭐하려고 하느냐는 실용주의자의 질문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라고 말하면
됩니다. 무용한 것 이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니까요.
(P.76)


  작가가 되는 데 책은 거의 백 퍼센트의 역할을 하죠. 오직 책만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듭니다. 경험도 아니고, 주변 사람 도 아니고, 정말 책만이 온전하게 작기를 만든다고 저는 생각 해요.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작가는 독자였죠. 작가에서 출발해서 독자가 되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우리나라의 동료 작가 들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작가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다들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처음에는 특정한 소설, 특정한 작가의 열렬한 독자가 되죠. 그것을 읽다가 그보다 더 깊은 만족을 주는 다른 작가, 다른 책들을 읽게 됩니다. ​
  어느 정도 읽다보면, '나도 이런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그런 때가 있어요. 자기 안에서 쓰고 싶은 내용과 자기가 읽어온 책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죠. 그게 대부분의 작가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작기들이 쓰는 소설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일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작기들은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서 그것을 다시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읽었으나 백 퍼센트 동의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응답 을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P.84)


  최고의 소설이란
  다 읽었는데 밑줄을 친 데가 하나도 없고, 그럼에도 사랑하게 되는 소설. 읽으면서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걸린 데가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도 왠지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남에 게 요약하거나 발췌하여 전달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런 소설 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P.92)


  예전에 토니 모리슨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서가를 둘러보고 거기에 없는 책을 쓴다.” 또 어떤 작가는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쓴다고 말했죠. 다 비슷한 말입니다. 내가 읽고 싶거나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거지요. 저는 토니 모리슨의 말을 더 좋아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서가를 둘러본다는 거에요. 서가를 둘러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책을 다 겸토한다는 거죠. 작가에게 독서는 그런 의미에서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읽어보고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지요. 내가 정말 알고 싶었거나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지금껏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것이 있는가? 그것을 나는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서 작가는 늘 서가를 둘러보고 그 안에 넣고 싶은 책을 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작가로서 그런 야심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P.139)


  소설을 많이, 깊이 읽는 사람은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다양한 인물을 알고 있는 사람 겪어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그러지 않은 이들보다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뉴욕 뉴스쿨 대학 심리학과의 연구에 따르면, 소설 중에서도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보다 인물 묘사에 집중한 소설을 읽는 이들이 훨씬 더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의도를 잘 읽어 낸다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때문에 타인을 깊이 이해한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인생이란 예기치 못한 사건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여러 인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건들을 맞닥 뜨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우리가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를 사람들을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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