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 박상미 / 한길아트 / 118쪽
(2017. 12. 09.) 



내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관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그동안 비평가들로 인해 빚어진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이제껏 씌어진 글들은 왜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호퍼의 그림 앞에서는 비슷한 종류의 감동을 받는지, 그 주된 이유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 내 접근 방식은 주로 미적인 것으로 호피 그림의 사회적인 면보다는 그 회화적 전략에 관심을 둔 것이다.​
  물론 그의 그림은 이 세상과 약간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흔히 그의 그림을 두고 20세기 초 미국인의 삶의 변화에서 온 만족감과 불 안감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관객들이 그의 그림에 그토록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다. 호퍼의 그림은 사회상의 기록도, 불행에 대한 은유도 아니다. 또 그처럼 부정확한 성격을 지니는, 미국인의 심리적 기질에 관한 것도 아니다. 호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이 책의 주제는 비로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P.5)


  <나이트호크>를 보고 있으면 두 개의 모순적인 명령어 사이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사다리꼴은 가던 길을 계속 가라고 우리를 재촉 하고, 어두운 도시 속 환한 실내는 우리에게 머물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도로와 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호피의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역시 차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을 우리와 함께 보 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보다 앞서 보았던 사람들도 없다. 그림 속의 장면은 오직 우리에게만 존재한다. 경험하는 모든 것은 완벽하게 우리 것이 될 것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상실감과 덧없는 부재감을 동반하는, 여행이 배제된 순간은 점점 무성해질 것이다.
(P.15)
​​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를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호피의 그림은 암시로 기득 차 있다.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지고, 그림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림은 우리를 더욱 끌어들인다. 어차피 우리는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떠나가는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우리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면-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이야 한다. 호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위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 (vacancy)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위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지 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이나 있다고 말해준다.
(P.48)


  시간을 둘러싼 질문들-우리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가?-은 호퍼가 그의 그림에 어둠을 얼마나 가두어놓느나, 또는 적어도 제한하고 있느냐의 문제 안에 존재하는 것 같다. 호퍼의 그림에는 기다림이 많다. 호퍼의 그림 속 사람들은 아무 할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배역(配役)으로부터 버림 받은 등장인물처럼, 이제 기다림의 공간 속에 홀로 갇힌 존재들이다. 그들에겐 특별히 가야 할 곳도, 미래도 없다.
(P.49)​


  빛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밖에 나가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호퍼는 밖에서 유화작업을 하지 않았다. 호퍼처럼 천천히 작업하는 화가에게 빛은 너무 빨리 바뀌었던 것이다 자세한 묘사가 사라지고 있는 그의 세계와 어울리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상상력이 필요 했고, 이러한 작업에는 작업실이 최적이었다. 그의 그림은 즉흥적이 기보다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계획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빛은 축하의 빛이라기보다는 기념의 빛이다. 호퍼의 빛이 기하학적인 견고성을 갖추게 된 것은 그가 빛이 흩어지지 않도록 빛에 어떤 생명을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 오히려 빛이 저항하고 있는 대상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그에게 빛은 결국 어둠이라는 더욱 강한 세력의 휴지(休止)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P.58)


  우리가 이 그림(뉴욕극장, 1939) 앞에 서 있는 모양은 안내원과 더 닮았는 지도 모른다. 그림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들여다보고 있는 거라고 한다면, 내면을 '보고 있는 안내원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가 설명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의 시선이 그림의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우리는 두 가지 모순적인 충동-그림을 보고, 그림 속을 들여다보는-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호퍼의 다른 그림에서처럼 그림의 기하학적 요소와 서사성이 부딪히며 빚어 내는 드라마를 보는 대신, 이 둘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본다. 어떤 이는 여자 안내원이 눈을 감고 있으니 관객과 상응할 수 없다고 말 할지도 모른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에서 시선을 돌려 내면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의 사고라는 공간 속에 유폐된 이미지들이 세상에 관한 지식으로 변하는 것이니까.
(P.76)


그림(바다 옆의 방)의 왼편으로는 자연과 상반되는 모습인, 좁고 붐비는 실내가 있다. 그곳엔 소파 또는 의자와 옷장 그리고 그림과 같은 집안 살림들이 보인다. 그림은 우리에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 것을 요구 하는데, 바다가 아니라 좁은 틈으로 보이는 실내를 보라고 하는 것 같다. 바다마저 실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고, 빛은 우리가 보아야 할 방향을 가리기는 듯하다 호퍼의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이 그림에서 순간은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기념비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띤 것 같지도 입다. 대신 우리가 보는 시간을 감안하여 연장된 순간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가로질러 우리는 그림 깊숙이 들어간다. 가구로 채워진 두번째 방은 첫번째 방의 반향(反響)이다 두 공간이 한 쌍을 이룬 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가정의 안정에 기본이 되는 지속과 연결이라는 개념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연의 의지를 구현하는 한 쌍의 힘인 바다와 하늘은 전혀 해롭지 않은 모습이다
(P.99)


  호퍼의 후기 작품인〈빈방의 빛〉에서 빛은 고요하지 않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같은 방에 두 번-한 번은 창과 가까운 벽에,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조금 안으로 들어간 벽에-떨어진다. 이 그림에 서 일어나는 일은 이게 전부이다. 우리의 시선은〈바다 옆의 방〉에서 처럼-실제 거리든 은유적인 거리든-움직이지 않는다. 빛은 두 공간을 한꺼번에 비추지만, 연속성의 느낌보다는 종말의 기미를 준다. 이것이 어떤 리듬을 내포하고 있다면, 이 리듬은 도중에 끝날 것이다.
(P.102)


​  호퍼의〈이른 일요일 아침〉은 전통적인 구성을 파괴하는 평면적 구성으로 일단 눈길을 끈다. 하지만 그림은 예상외로 그 평면성을 다차원적으로 만드는 여러 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창문 이다. 호퍼의 그림에는 건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 건물들에는 창문이 있고, 창문들 중 어떤 것은 닫혀 있고 어떤 것은 반쯤 열려 있는 상태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 없이 창문들은 열리고 닫힘을 반복한다. 창문의 열려진 틈에 호퍼는 주로 가장 어두운 색을 칠하는데, 이
것은 다른 그림들에서 깊이감을 주는 데 이용되는 장치들(예들 들면 소실점의 이용이라든가)보다 덜 명백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강렬한 힘으로 보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이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아득한 감정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평면적인 그림에서 예상치 못한 깊이감이 느껴지는 순간 낯익은 것이라 생각되던 일요일 아침의 정경은 갑자기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P.106)


이 책은 흔히 볼 수 있는 화가의 모노그래프가 아닌, 스트랜드라는 시인의 특별한 시각을 담은 책이다. 호퍼는 불공평 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주 '미국적 사실주의 작가'라고 일컬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이런 평가에 대해 항상 불만을 품어왔다 호퍼의 폭과 깊이를 제한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호퍼는 보통의 평보다 좀 더 보편적이면서도 복집한 작가이고, 스트랜드는 그걸 누구보다 정밀하게 읽어내고 있다. 난 과학보다 정확한 것이 시인의 언어라고 믿는 편이데, 스트랜드는 이 책에서 놀라운, 때로는 따라 잡기 힘들 정도의 정교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른 일요일 아침>에서 그의 관찰은 매우 인상적이다.

  '부동(不動)과 정적(靜寂)의 몽상적인 조화로 미술적인 순간은 길게 늘어나고, 그 앞에 선 우리는 특별히 허락된 목격자들이다.'

  호퍼 그림의 분위기뿐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 그리고 호피의 그림 이 요구하는관람객의 '특별한 시각' 즉, 그 그림의 초월적인 깊이까지를 압축해서 담아낸 문장이다. 또한 스트랜드는 호퍼의 공간을 시간적인 은유로 표현하면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원을 열어주기도 한다.
(P.112)


이제까지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한 방식이 모두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스트랜드의 고유한 '호퍼 읽기를 통해 호퍼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 도움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술을 보는 전반적인 시각까지도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림을 볼 때 필요한 건 미술사적인 지식과 비평적 관찰뿐만이 아니다. 스트랜드를 통해 우리는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시각, 명철한 시정으로 예술에 접근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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