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 문학동네 / 282쪽
(2017. 12. 05.) 



  제이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기만의 세계지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에는 무관심했다.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어른들의 말은 거의 믿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가 헛소리라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그는 평등하게 같은 면적을 차지하고 똑같이 먹어대지만 갇혀 있는 우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개들의 운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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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고통을 외면하는 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는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고통은 피할수 없는 거야.”
  “피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할 수 있죠.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돼요. ”
  “세상일이 네 말대로 간단하다면 좋겠지.”
  “뭐가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고통의 경중은 누가 가리지? 네가 가리나?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만 고통받는 줄 알아? 개장수들도 먹고사느라 힘들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어. 네가 타이어를 펑크냈기 때문에 그 집의 아이들이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너는 우선 어른이 돼야 한다. 그럼 자연히 알게 돼.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제 판단으로 행동한 거고, 그러니까 아무 후회가 없어요."
  “너는 세상에 원한을 품고 있어. 그래서 네 알량한 정의의 이름으로 그걸 심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위험해.”
  제이는 마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한 안내를 들은 소비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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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계들이 있어. 바로 센서야. 감각을 하는게 그것들의 목적이야. 지구 곳곳의 센서들은 기온과 습도와 바람을 측정하지. 어떤 센서는 전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시베리아 호랑이가 지나가면 반응을 하고 사진을 찍어 . 센서는 너무나도 많아. CD의 홈을 읽기도 하고 적외선으로 피사체와 렌즈 사이의 거리를 재기도 하고. 그런데 고통을 감지하는 센서는 없어.”
  “그게 너라는 거야?"
  “그래,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고통이 내 영혼을 짓눌러. 그들이 지고 가는 삶의 무게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아? 너도 편하게 살고 싶을 거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내 운명이야."
(P.133)


  사람들은 슬픔에 대해서 말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무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무지에 대해 불편한 수치심을 품고 있었다. 여기 물을 담은 풍선이 있다고 하자. 풍선이 터지면 물이 갑자기 쏟아질 것이다. 그 안에 든 것이 만약 슬픔이라면 내 몸은 슬픔에 젖게 될 것이다. 그대에야 그게 무슨 색인지. 어던 냄새를 풍기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풍선을 내가 자의로 터뜨려버린다면 어떨까? 그때에도 슬픔은 그대로 슬픔일까?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죄책감이 슬픔을 덮어 버리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죄책감으로 슬픔을 '돌려막는' 자야말로 진정 강한 자가 아닐까?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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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든 죄책감이든 다시의 나로서는 공히 멀고 고상한 감정이었다. 그 고상한 감정들을 강렬히 원하는 또다른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깊은 혼란을 느꼈다. 그런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내게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아니 그것을 처음부터 거부하고, 마치 바텐더가 이런저런 술을 섞어 칵테일을 제조하듯, 나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낸 것을 나 자신의 계획에 따라 온전히 경험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내 마음속의 혼란은 결국 살인의 흰상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을 떠올릴 때만이 내 마음 깊은 곳의 조바심과 열패감은 사 라졌다. 태풍이 접근하면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듯이.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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