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 김재범 / 책세상 / 248쪽

(2018. 1. 31.)


  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발판 삼아 더 넓은 세계로 나가겠다는 그림을 그렸지만, 어느 선배의 밀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갇히고 말았다. 문제가 보이는가 싶다가도 흐려지고 깜깜한 방 안에 갇히는 것이 되풀이되었다. 명쾌하지 않은 맨 처음의 원리와 원인=실체=본질. 어떤 사림들은 이것을 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뮌스터 대회에서 만난 한 지인은 그렇기 때문에 존재의 형이상학은 더 이상 철학적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어찌 보면 맞는 말같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의 핵심은 본질에 관한 탐구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많은 학생들이 철학을 공부하려 한다. 무엇 때문일까? 철학은 신학 없이 있다. 그러나 신학은 중세 시대 이래로 신의 존재 증명을 시도해왔으며, 그러는 한 신학은 철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본질 탐구는 신학이 아니라 철학, 특히 형이상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의 문제에 빠져 있어도 될 것이다. 내가 있다는 것과 내가 산다는 것 때문에.
(P.8)


  개별자가 무엇을 위해서 행해져야만 하는지를 아는 학문이 학문들 중 최고의 학문이며 또한 지배를 당하는 것보다는 지배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는 개별자의 착함이며,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에서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탐구된 이름이 언급된 모든 것들에 의해서 같은 학문에 붙여진다. 왜냐하면 맨 처음 원리들과 원인들의 학문은 이론 학문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착함과 무엇을 위해서는 원인들 중의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P.23)


  맨 처음에 있는 것과 어떤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히 있는 것은 실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맨 처음의 것은 다양하게 일컬어진다. 그렇지만 모든 것에서, 개념에서도 앎에서도 시간에서도 실체는 맨 처음의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는 다른 틀들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념에서 실체는 최초의 것이다(왜나하면 실체의 개념이 개별자의 개념 속에 필연적으 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 양, 혹은 장소가 무엇인지를 알 때보다는 인간 혹은 불이 무엇인지를 알 때, 이때에 개별 사물을 가장 잘 이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질 혹은 양이 무엇인지를 알 때, 이때에 이러한 틀들의 각각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전에 그리고 지금 항상 탐구되고 질문된 것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P.30)


  실체는, 만일 여러 가지 의미로 이야기되지 않는 다면, 오히려 대개 네 가지로 언급된다. 즉 무엇임(본질)과 보편적인 것(보편자) 그리고 유가
개별자의 실체인 것으로 여겨지며, 밑바탕(기체)이 네 번째 로 간주된다. 그러나 밑바탕은 자신에 의해서 다른 것들을 언급하지만, 밑바탕 자체는 결코 다른 것들에 해서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먼저 밑바탕에 관하여 규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밑바탕이 실체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P.32)
​​

(생성에에 관하여)
  생성되는 것들 중 한 가지는 자연에서 한 가지는 기술에서, 한 가지는 자발적인 것으로부터 생성된다. 그러나 모는 생성되는 것들은 어떤 것에 의해서, 어떤 것으로부터 그리고 무엇이 생성된다. 그러나 나는 이 무엇을 각각의 틀 지음에 따라서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엇은 여기 이것 혹은 양 혹은 질 혹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생겨남 자체들은 자연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들이며, 질료라고 부르는 것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고, 자연에서 있는 것들 중 어떤 것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며, 그리고 인간 혹은 식물 혹은 이러한 종류들의 다른 어떤 것, 물론 특히 우리가 실체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 그러나 자연에서 혹은 기술에서 생성되는 모든 것들은 질료와 관계한다. 왜냐하면 생성되는 것들 각각은 있음도 있지 않음도 가능한데, 이러한 것은 개별자 안에 있는 질료 때문이다. -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생성될 때 무엇으로부터와 무엇에서는 자연이며(왜냐하면 생성되는 것은, 예를 들면 식물 혹은 등물처럼, 자연과 관계하기 때문에), 무엇에 의해서는 형상에서 일컬어지는 같은 종의 자연이다(그러나 이 자연은 다른 개별자 안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 의미에서 자연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들은 생성되지만, 다른 생성들은 만듦들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모든 만듦들은 기술에 의해서 혹은 기능태에 의해서 혹은 사유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자발성에 의해서 그리고 우연에 의해서 생성되는데, 자연에서 생성되는 것들과 유사하게 생성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몇몇은 씨앗으로부터 또는 씨앗 없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에 관하여나중에 탐구해야만 하지만, 형상이 영혼 안에 있는 것들은 기술에 의해서  생성된다(그러나 나는 형상을 개별자의 무엇임이며 맨 처음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P.45)


 지금 우리는 고도화된 기술 문명 덕에 편리함과 쾌락에 길들어 있다. 어려운 것은 기피하고 쉬운 것만 추구한다. 그러는 동안 생각하는 힘은 약해져간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에 따르면 “높은 가치는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이어서 행하면 행할수록 더 많이 생겨난다". 이에 빗대어 말해본다면, 역설적인 말이지만, 어려운 것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 쉬워질 것이고 쉬운 것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 어려워질 것이다. 어려운 것을 행하다 보면 더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되어 모든 것이 점점 더 쉬워질 것이다. 반면에 쉬운 것만을 행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하는 힘이 더욱더 약해져서 아무리 쉬운 것이 주어져도 어려워질 것이다. 생각의 단순화가 오늘 날 인문학의 위기를 몰고 오지 않았나 싶다.
(P.2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의 미술관 (Art As Therapy)
알랭 드 보통 / 존 암스트롱 / 김한영 / 문학동네 / 240쪽
(2018. 1. 18.)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현대 세계는 예술을 매우 중요하게, 인생의 의미에 버금갈 정도로 소중히 여긴다. 이 높은 존중을 보여주는 증거는 새로 문을 여는 미술관에서, 예술의 생산과 전시에 상당한 투자를 하는 정부 정책에서, 작품에 대한 접근성(특히 어린아이들과 소외 계층에 돌아 갈 혜택을 위해)을 높이고자 하는 예술 수호자들의 열망에서, 학문으로서 예술 이론의 위상과 상업 예술시장에서의 높은 가치 평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술과의 만남은 항상 기대한 바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명성이 자자한 미술 관이나 전시회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왜 예상했던 변화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 어리둥절함과 무능하다는 느낌을 품은 채 문을 나서기도 한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탓하고, 문제의 뿌리는 분명 이해 부족이나 감성적 수용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책은 문제의 뿌리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가르치고, 팔고,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인간과 예술의 관계는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근본적으로 꺼리는 제도의 소극성으로 인해 꾸준히 약화되어왔다. 예술의 존재 이유를 묻는 행위는 아주 부당하게도 조급하고, 불합리하고, 다소 무례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은 예술이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명확히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높은 지위를 신비한 영역에 남겨두고 그와 동시에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예술은 칭송받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설명의 대상이기보다 추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너무나 잦다 예술의 가치는 상식의 문제로 밀려난다. 이는 예술의 수호자들에게 만큼이나 관람자들에게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만일 예술의 껍질 속에, 알기 쉬운 용어로 정의하고 논의될 수 있는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예술은 도구일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자,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에 보다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P.4)


​  만일 세상이 좀더 따뜻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에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술적 경험의 가장 이상한 특징 중 하나는 가끔 눈물을 홀리게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이다. 그런 순간은 괴롭거나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대면할 때가 아니라 특별히 우아하고 사랑스러워 보는 즉시 가슴이 터길 것 같은 작품과 마주칠 때 찾아온다. 아름다움에 격렬히 반응하는 이 특별한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P.16)


  어른과 놀고 있는 아이와. 아이와 놀고 있는 어른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아이의 기쁨은 천진난만하며, 그런 기쁨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어른의 기쁨은 삶의 고난을 회상하는 선에 머물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감동' 시키고 때로는 울게 한다. 만일 우리가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예술을 싸잡아 감상적이고 정적이라 비난한다면 이는 큰 손실이다. 사실 그런 작품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까닭은 현실이 대개 어떤지 우리가 잘 알고 있어서다. 예쁜 미술작품의 쾌감은 불만족에 기인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않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혹시 미를 사랑할 줄 아는 로봇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구상한다면, 우리는 그 로봇이 인생을 증오하고, 혼란과 좌절을 느끼고, 고통을 겪는 동시에 그럴 필요가 없기를 희망하도록 아주 잔인한 조건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예술이 단지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소중해지는 비경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산적한 문제들을 보면 앞으로 수 세기 동안 예쁜 그림이 매력을 잃어버릴 위험성은 전무하다고 확신할 수 있으니
(P.20)


  예술은 이미 충분하다고 섣불리 추정해서는 안 되는 균형과 선함을 시의적절하게.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한다.
(P.42)


(자기이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에겐 직관, 의혹, 육감, 모호한 공상, 이상하게 뒤섞인 감정이 있으며, 이 모두는 단순명료한 판단을 방해한다. 여러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예전에 느꼈지만 명확히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정확히 파악한 듯 보이는 예술작품들과 우연히 마주친다. 알렉산더 포프는 시의 한 핵심 기능을, 우리가 어설픈 형태로 경험하는 생각들을 붙잡아 거기에 명료한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우리가 '자주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는'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생각, 나 자신의 경험이면서도 쉽사리 사라지고,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을 붙잡아 예전 보다 더 좋게 다듬어 나에게 돌려줄 때.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고 느낀다.​
​(P.44)


  예술과의 교류는 유용하다. 비록 소재는 방어적인 지루함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낯선 것이지만 혼자 있는 시간과 상태를 허락해 그런 소재를 좀더 전략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중요한 첫 단계는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미워한 필요는 없다. 많은 예술이 결국 우리의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세계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P.53)


  처음에 낯설게 느끼지는 예술작품의 가치는, 그런 예술을 통해, 익숙한 환경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지만 우리 인류와 충분히 교류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생각과 태도를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전적으로 세속적이거나 평등주의적인 문화에서는 중요한 생각들이 곧잘 사라진다. 우리의 들에 박한 일상은 대체로 우리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일깨우지 않으며, 예술계가 찌르고 치근대고 좋은 의미로 도발할 때까지 내처 겨울잠을 잔다. 이질적인 예술 덕분에 나는 내 안의 종교적 충동, 내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귀족적인 면, 통과의례를 경험해보고픈 욕구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런 발견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의식을 확장시킨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우리 앞에 진열되어 있진 않다.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P.58)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해 고생하고, 매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종종 엉뚱한 갈망을 품는다.​ 문제의 한 원인은 상황에 익숙해지는 우리의 능력. 즉 우리가 습관화라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데 있다. 습관이란 인간적 기능의 전 분야에 걸쳐 행동을 기계적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이다.그러나 습관은 꼭 그만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쉽다. 익숙하지만 주의깊게 교감 할 만한 것들을 마음에 새기지 않는 습관에 짓을 때, 불행이 튀어나온다. 중요한 것에 집중한 수 있게 덜 중요한 것들을 삭제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는 요소들을 삭제하고 만다.
(P.59)


  우리가 말하는 '화려함'은 주로 다른 곳에. 즉 모르는 사람의 집에, 잡지에 나은 파티에, 돈과 인기를 거미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의 삶에 있다. 우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누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유혹에 노출되는 것은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의 본질상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이쪽에서 창문 너머로 그 유혹적 인 것들을 엿보며 괴로워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보다 고급한 영역을 약속하고, 상업적 이미지들은 그 영역에 닿으려는 갈망을 창출하는 데 일조한다. 상업적 이미지들은 휴일의 링사이드 좌석(권투•격투기 경기에서 링 바로 앞에 위치한 값비싼 좌석-옮긴이), 전문가들의 대성공. 멋진 연애, 화려한 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는 우리가 그를 운명적으로 훨씬 더 잘 알 수밖에 없는 어느 엘리트의 생일 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미지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해독제를 건네주어 면목을 세우기도 한다. 이는 우리 삶의 조건인 따분함과 무미건조 함을 메스껍게 만드는 동시에 그 조건과 지적인 화해를 이끌어내는 예술의 힘 덕분이다.
(P.62)
​​

예술은 우리에게 일곱가지의 보조수단을 제공한다.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해준다..
2. 희망의 조달자 : 예술은 즐겁고 유쾨한 것들을 시야에 붙잡아둔다. 예술은 우리가 너무 쉽게 절망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 예술은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우쳐주고. 우리는 그로 인해 곤경 앞에서 덜 당황한다. 곤경을 고귀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4. 균형추: 예술은 우리가 가진 좋은 자질들의 핵심을 특히 명료하게 암호화해 다양한 형태의 매개로 우리 앞에 내놓고, 그럼으로써 우리 본성의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허락된 최고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끌이준다.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 예술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많은 부분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대단히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으며, 잘 다듬어지고 훌륭하게 조직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예술은 우리에게 다른 문화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가장 웅변적인 예들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예술작품과의 교유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준다. 많은 예술이 처음에는 단지 '남의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생각과 태도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발견한다.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예술은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릇없이, 습관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준다.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본다. 예술은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막아준다.
(P.65)


  예술을 진심으로 숭배한다고 해서 반드시 목적을 배제하고 예술을 연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작품 속에 강하게 나타나 있는 선함을 적극 유통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 예술에 매혹된 사람들은 종종 예술가나 학계 연구자가 되지만, 사업, 채용 및 구직 상담, 정부, 데이트 주선, 광고나 부부 심리치료 등의 분야에서 일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예술의 이해라는 더 높은 이상으로부터 떨어져나와야만 하는 직업들이 아니다. 사실 이 직업들이야말로 이론상, 예로부터 예술에서 탐구하고 발전시켜온 가치들을 진지하게 여기고 실현시킬 수 있는 영역이다. 좋은 인간관계, 격조 있는 도시. 금전적 만족도도 높을 뿐 아니라 존경받을 만하고 감성적으로 만족스러운 일. 그것이 진정한 예술작품이다.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대상들은 단지 그것들을 향해 우리가 눈길을 돌리도록 이끌어주는 부차적인 도구일 뿐이다.
(P.231)


  예술의 혜택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술을 언제 밀쳐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정 시점이 되면 우리는 미술관이나 공원 안의 조각품을 떠나 예술의 진정한 목적인 삶의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고마움을 모르거나 감상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술에서 참으로 귀중하고 그래서 좀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큰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책 전체에서 우리는 예술의 혜택에 주목해왔다. 다시 말해, 예술이 인간관계와 관련된 우리의 능력들을 어떻게 증진시키고, 돈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개선하고, 우리의 본래적 자아에 대처하며 우리의 꿈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노력에 어떻게 일조하는지 살폈다. 이것만으로도 기존 예술계가 지금까지 권유해온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성큼 벗어나는 첫걸음을 뗀 셈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예술이 덜 필요하고 덜 예외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늘날사람들이 미술관의 격리된 전시실에서 발견하고, 찬양하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가치들이 온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한다면서도 사회가 언젠가는 예술 때문에 야단법석 떨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내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P.2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털리 부인의 연인 2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 이인규 / 민음사 / 351쪽
(2018. 1. 13.) 


  “나도 정말 뭔가를 나눠주고 싶어요."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나에겐 허용되어 있지 않은 일이에요. 요즘은 모든 것이 값을 받고 팔려야 하게끔 되어 있거든요. 당신이 방금 말한 그 모든 것들 역시, 라그비나 시플리가 사람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파는 것일 뿐이지요. 당신은 심장의 박동 한 번만큼도 진정한 공감을 나누어주지 않지요. 게다가,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과 인간다움을 빼앗아버린 게, 그러곤 이 끔찍한 산업의 현실을 대신 안겨준 게 과연 누구죠? 그런 짓을 한 게 과연 누구냐고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지?"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어서 와서 다 약탈해 갑쇼, 하고 그들에게 부탁이라도할까?"
  “테버설이 왜 이렇게 추하고 끔찍한 거죠? 왜 광부들의 삶이 그토록 절망적이냐고요?"​
  “그들 자신이 그렇게 테버설을 지은 거야. 그리고 그건 바로 그들이 누리며 표현한 자유의 일부인 셈이야. 그들은 자신들의 그 꼴좋은 테버설을 스스로 지은 것이고, 자신들의그 꼴좋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거라고. 내가 그들을 위해 그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거잖아.
(P.46)


아냐. 그들은 날 미워하지 않아!"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잘못 생각하지 말라고.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말은 그들에게는 맞지 않아. 그들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또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동물일 뿐이야. 당신의 착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마. 하층 노동 대중은 언제나 똑같았고, 또 앞으로도 언제나 똑같을 거야. 그 옛날 네로의 노예들, 그러니까 네로의 광산이나 논밭에서 일했던 노예들은 말이야, 지금 우리 탄광 광부들이나 포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고. 그들은 모두 하층 노동 대중으로, 변하지 않는 존재들인 거야. 어떤 한 개인이 좀 특출 나서 그 하층 대중 계급에서 벗어나 는 경우가 있긴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나 둘 벗어나 봤자 하층 대중 전체는 바뀌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하층 대중은 바뀔 수가 없는 거야. 이것은 바로 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야. '빵과 오락(panem et circenses)'! 바로 그것만 있으면 되는 거라고. 그런데 오늘날에는 교육이 오락을 잘못 대체해 버린 거야. 오늘날의 잘못된 문제는 바로 우리가 '빵과 오락'이라는 이 프로그램의 오락 부분을 온통 망쳐놓고는 그 대신 약간의 교육으로 하층 대중의 마음에 해독을 끼쳐놓았다는 사실에 있어."
  하층민들에 대한 클리퍼드의 감정이 이렇게 정말로 자극을 받아 터져 나왔을 때, 코니는 좀 무서워졌다. 그의 말에는 뭔가 거역하기 어려운 강력한 진실이 담겨 있긴 했 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죽이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채찍을 집어 들 필요가 있어." 그는 다시 말했다. “칼 대신 말이야. 하층 대중은 유사 이래 다스림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다스림을 받아야만 할 거야. 그들이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위선이자 터무니없는 소리야.“​
​(P.48)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의 부모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우리를 어느 자리에 갖다 놓느냐 하는 것이야. 어떤 애든지 지배 계급 사이에다 갖다 놓아봐. 그럼 그 아이는 자라서 그 나름의 능력껏 지배계급이 될 거 라고. 왕이나 공작의 자식들을 하층 대중 사이에다 던져 놓아봐. 그러면 그 아이들은 하찮은 평민이라는 대량 생산물이 되고 말 테니. 그건 환경의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인 거야."
  “그렇다면 하층민은 본래 타고난 종족이 아니고, 귀족이란 것도 타고난 혈통이 아니겠군요." 그녀가 말했다.
  “맞아, 여보! 그런 생각은 다 낭만적인 환상일 뿐이야. 귀족 계급이라는 것은 하나의 역할로서, 운명의 한 부분을 맡은 존재인 거야. 그리고 하층 대중이란 것도 운명의 또 다른 부분을 맡아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야. 개개인은 거의 중요하지가 않아. 문제는 우리가 어느 역할을 하도록 길러지고 길들여지는가 하는 점이야. 귀족 계급을 만드는 것은 개인이 아냐. 그건 바로 귀족 계급 전체의 역할과 기능인 거야. 그리고 평민을 평민의 존재로 만드는 것 역시 하층 대중 전체의 역할과 기능인 것이지."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공통된 인간성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겠군요!"
  “그런 셈이지. 우리 모두 자신의 배를 채워야 할 필요가 있긴 하지. 하지만 표현이나 실천의 역할과 기능의 문제에 있어서는, 지배 계급과 섬기는 계급 사이에 심연이, 그것도 절대적인 심연이 존재한다고 난 믿어. 이 두 계급의 역할과 기능은 서로 서로 상반된 것이거든. 그리고 바로 그 기능이 개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지."
(P.50)

​​​
​  인간의 존재는 외적 상황이라는 기계적 힘에 의해 크게 지배되고 있다. 코니도 이 기계적 힘의 손아귀 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그 손아귀에서 자신을 오 분만에 벗어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P.173)


  “하지만 넌 얼마 안 있어 곧 그 사람에게 싫증이 나고 말 거야." 그녀는 말했다. “그러곤 그 사람과 관계한 것을 부끄럽게 여길 거야. 하층 노동자 계급과는 조화롭게 섞일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언니는 열렬한 사회주의자 아냐! 언니는 언제나 노동자 계급 편을 드는 사람이잖아?"
  “정치적인 위기에 있어서는 내가 그들의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의 편에서 보고서 나는 우리의 삶을 그들의 것과 함께 섞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를 또 한 알게 되었어. 이건 속물근성에서 나온 생각이 아냐. 바로 살아가는 리듬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야.”
(P.181)


  시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 얼마나 거짓말쟁이들 이었던가!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부드러운 정감이라고 착각하게 했다. 우리가 진정 최고로 원하는 것은 바로 꿰뚫듯 찔러오고, 모든 걸 불살라 없애버리며, 좀 끔찍하기까지 한 이 관능인데도 말이다. 수치심이나 죄의식 또는 마지막 한 줌의 불안감도 없이 그 관능을 감히 실행할 수 있는, 그런 남자를 찾아내다니! 만약 그가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여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참으로 안타깝게도, 섬세하고 관능적인 남자는 정말 드물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너무나 겉치레뿐이 고 왠지 모르게 수치스러운 존재였다 바로 클리퍼드처럼, 그리고 심지어 마이클리스처럼 말이다! 두 사람 모두, 관능적인 면에서 어던지 모르게 겉치레뿐이고 굴욕감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정신의 지고한 즐거움이라고! 그게 여자한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실, 그걸 뇌까리는 남자 본인에게조차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자신마저도 정신에 있어서, 그저 엉망진창에다 겉치레 뿐인 존재가 되고 마는데, 정신을 순화하고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조차도 바로 순전한 관능은 필요한 것이다. 엉망 진창이 아니라 불꽃같은 순전한 관능이 말이다. 아, 하나님, 진정한 한 사람의 남자란 그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지요, 남자들은 모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코를 킁킁거리고는 교미나 해대는 개들이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진정한 남자를 찾은 것이다.​
​(P.197)


  "얘야, 내 진심을 말해도 좋다면, 그건 이렇구나. 세상은 계속되는 법이야. 라그비도 그대로 계속 존재할 테지. 세상이란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그것에 순응해서 살아야 하는 법이야. 사적으로야, 물론 이것도 내 사적인 의견이지만,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 감정이란 변하는 법이니까 말이야. 올해엔 한 남자를 좋아하다가 내년엔 다른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라그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거란다.
라그비가 너를 버리지 않는 한 라그비를 버리지 말거라. 그런 한에서 네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관계를 끊고 나와버리는 것으로 네가 얻는 것은 거의 없을 게야. 물론 네가 정 원한다면, 관계를 끊고 나올 수도 있겠지. 너에겐 독립된 수입이 있고, 그것만은 절대 너를 저버리는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얻는 것은 별로 없을 게야. 그러니 라그비에 꼬마 준남작을 안겨주도록 하려무나. 그렇게 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나서 맬컴 경은 뒤로 기대고 앉아 다시 미소를 지었다. 코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에게 마침내 진짜 남자다운 남자가 생겼기를 바란다.” 그가 잠시 후 그녀에게 말했다. 관능의 촉각을 세우고서 던지는 말이었다.
  “예, 그런 남자가 생겼어요. 그게 문제예요. 그런 사람은 주위에 많지가 않거든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 정말로 그렇지!" 그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런 남자는 정말 별로 없지! 글쎄, 얘야, 너를 보니 그는 행운아인 것 같구나. 분명코 그는 너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지?”
   “그럼요! 그 사람이 저를 속박하려 들거나 하는 것은 정말 전혀 없어요.”​
  “그래, 그래, 진정한 사내라면 그릴 거야."
(P.254)


  남자란 모름지기 최선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 자신을 초월한 어떤 다른 존재의 능력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법이오. 미래에 대한 어떤 확신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진정으로 믿고, 나아가 그것을 초월한 다른 존재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오. 그래서 나는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그 조그만 불꽃을 믿고 있소. 지금 나에게 있어,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오 친구가, 즉 진정한 내면의 친구가 하나도 없소. 오직 당신뿐이오. 그리고 지금 그 조그만 불꽃은 내가 삶에서 마음을 쏟는 유일한 대상이오. 물론 아기가 있긴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요. 그 불꽃은 나의 오순절 불꽃. 나와 당신 사이의 갈라진 불꽃이오. 이제까지의 낡은 오순절 불꽃은 정말 제대로 된 것이 아니오. 나와 하나님 사이가 불꽃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건방진 생각이오. 하지만 나와 당신 사이에 갈라진 자그만 불꽃이 존재한다고 할 때는, 그건 정말 진짜요! 그리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굳게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지켜가고자 하는 것이라오. 클리퍼드나 버사 같은 인간 들, 탄광 회사나 정부(政府), 또는 돈에 사로잡힌 대중 등, 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말이오.
(P.318)


  로렌스가 말년에 병마와 싸우면서도 이렇게 두 차례나 다시 새로 써서 작품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가 작가로서 이 작품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따라서 온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창작에 임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이 소설에는 현대 문명과 인간에 대한 로렌스의 생각이 그의 다른 어느 소설에서보다도 강렬하고 분명한 결정체로 집약되어 있으며, 독자도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런 점을 쉽게 느끼게 된다. 즉, 이 작품은 로렌스의 소설들 가운데 주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인물과 줄거리도 가장 직접적이고 명료하게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것은 바로 위와 같이 반복된 재창작의 손질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P.324)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이렇게 남다른 과정을 거쳐 출판된 상황은 작가와 작품을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하는 결과를 낳기는 하였지만, 모순되게도 작가로서의 로렌스와 작품 자체에 대한 정당한 이해의 측면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렌스가 죽음과 싸우면서 심혈을 기울여 현대 문명과 인간의 문제에 대한 본질적 진단과 처방으로 제시한 작품이, 출판 과정에서의 논쟁으로 인해 작품의 노골적인 성 묘사 측면만이 대중적으 로 부각되고 선전됨으로써 작품 자체의 전체적 성격이 왜 곡되어 알려지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음란한 호색 문학 또는 에로티시즘의 고전쯤으로 알고 있거나 로렌스를 성 문학의 대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꼼꼼히 제대로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 이 작품은 음란한 호색 문학은 물론이고 에로티시즘 문학 작품과도 아주 거리가 멀다. 물론 이 작품에는 솔직하고 대담한 성행위 장면과 성적 묘사가 여러 차례 나오면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추잡한 성적 흥분과 충동을 조장하거나 성애 그 자체의 아름다운 미화나 탐닉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P.326)


​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로렌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은 상당히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기계적 관념성과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산업 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기부이며 이에 대응할 구원적 가치로서 살아 있는 인간적 관계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다. 작품의 배경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중부 탄광 산업 지대인 테버설이라는 마을이지만 로렌스는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이 지배하는 산업 사회의 비인간적 본질을 집약하고 있는 전형(典型)으로서의 성격을 그곳에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그곳에서 움직이는 세 주인공, 즉 클리퍼드와 코니 그리고 멜러즈 역시 각각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로 창조되고 있는 동시에 문명과 시대의 본질적 문제를 대변하거나 대응하고 있는 전형들로 형상화되거나 의도되고 있다.
(P.327)


  이 작품이『무지개』나『사랑하는 여인들』과 같은 로렌스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상상적 복합성이나 풍부함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 작품은 주제 의식의 집중성과 명료성 그리고 그것의 응축된 형상화의 측면에서 앞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남달리 '의도적' 이라는 리비스의 말은 분명 맞다. 그러나 그 의도가 리비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상상적 감수성의 감정에 호소하지 못할 만큼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한 무엇보다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첫인상 또는 선입견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P.3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똑똑한 바보들
(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
크리스 무니 / 이지연 / 동녘사이언스 / 2012년 / 394쪽
(2017. 1. 9.)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심리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 이라는 기본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과학적 주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옳지 않을까?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최소한 지 금 이용 가능한 증거들은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결론 으로 이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위협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진보주의와 보수주의가 인간 본성의 오래된 부분이라고 시사한다. 그 말은 진보주의자들이 그저 소동을 일으키고 난리법석 피우기를 좋아하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애기다.
그들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인용한 장 자크 루소에 관한 글처럼 말이다. “그 무엇도 그가 세상에 불을 지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보수주의자들이 진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가능할까? 보수와 진보는 기본적인 인간의 전통이다. 진보주의자가 한계를 초월해 지나친 개방성이라는 오류를 범하면 보수주의자는 우리를 다시 끌어다놓고 지나친 폐쇄성이라는 오류를 저지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보수주의자들과 저널리스트들은 이 책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P.9)​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실을 보수주의자들은 왜 부정하는지 그 밑바닥에 깔린 이유를 조사하면서, 나는 핵심 결론을 가리키고 있는 분명한 증거들을 무시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 증거들은 정치학, 사회심리학, 진화심리학, 인지신경과학, 유전학에서 나은 것들이다. 심리와 성격이라는 차원에서 보수주 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이것은 두 집단이 논쟁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우선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이것은 지능에 관한 주장이 아니다. 나는 보수주의자가 일정 방식으로 진보주의자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두 집단은 그냥 다르다. 진보주의자들 역시 심리에 뿌리를 둔 자신들만의 약점이 있으며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P.24)


   그럼에도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차이점 중에는 그들이 왜 정치적 토론을 할 때 증거 앞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예를 들어, 두 집단은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성격 척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부분에 대한 증거는 상당히 확고하다. 전체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개방적이고 유연하며 호기심이 많고 표현에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폐쇄적이고 고정되어 있고 자신의 관점에 대해 확고한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개방성이라는 것은 성격의 핵심 측면이기 때문에 이 부분의 차이를 조사하려면 정치적 뇌 분야를 검토해야 한다. 이 분야는 이제 막 시작된 학문이지만 과학자들은 진보적인 뇌와 보수적인 뇌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차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유전자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유전자라는 것은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팩트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이 상황은 정치에만 의존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곳에 있는 심리적·인지적 요소들까지추적해 보아야 한다.
(P.25)
​​

​  나는 진보주의자 친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듣는다. “보수주의자들이 x도 믿지 못 할 만큼 멍청하다니 믿을 수 없어!” 우리는 거짓말과 잘못된 정보에 격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반박하고 싶어 한다. 어째서 우리가 옳고
보수주의자들이 들렸는 지를 논증하고, 논증하고, 또 논증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마치 우리처럼) 더 현명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더 가르칠 수만 있다 면, 정확한 정보라는 치료제를 먹일 수만 있다면, 보수 진영의 잘못된 정보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해 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P.28)


  우리는 보수주의의 비非이성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에서 비이성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아야 한다. 유행 지난 계몽주의 이성의 힘 에 관해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망상들도 모조리 걷어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 이성이 어떤 식으로
작동한다고 보는가에 관한 비극적 스토리로 1부의 문을 연다. 이 참담한 진보주의 이야기는 혁명기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이 시기는 정치적 차이가 처음으로 좌우 스펙트럼으로 정의된 시기다. 우리는 이성의 시대 일부 선인들이 믿있던 것처럼 추론히지 않을 뿐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심리 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이 동기회된 추론(motivated reasoning)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계몽주의 이상을 생각하면 슬픈 소식이겠지만, 인간이성이 진실을 얻는데 그다지 좋은 도구가 아님을, 어찌면 인간 이성은 에당초 그런 목적으로 (진화에 의해) 설계되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P.30)


  진보주의자라면 콩도르세를 찬양할 수밖에 없다. 과학에 기반을 둔 계몽주의에 관한 진보주의적 이상향을 그렇게 또박또박 써내려갈 수 있었던 콩도르세의 열정과 명석함은, 축구장 몇 개 분량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동시에 이성의 함성을 지르는 것보다도 더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과학적 진보주의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점에서 틀렸다. 이성적 주장을 널리 전파하면 필연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수용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또한 거짓 주장을 반박하면 인간이 그 주장을 버릴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잘못이었다. 왜일까?
  확신을 가진 사람은 바뀌기 힘들다. 의견이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그냥 돌아서서 가버린다. 팩트나 숫자를 보여주면 그는 당신자료의 출처를 의심한다. 논리에 호소하면 그는 딩신의 논점을 보지 못한다.
(P.46)


  동기화된 추론 이론은 신경과학의 핵심 통찰에서 나왔다. 사고와 추론 위에는 감정이 얼룩진다(연구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 자극과 정보에 대한 우리의 만용은 많은 부분 깊이 생각한 결과라거나 냉철한 판단이 아니며 오히려 감정적이고 자동적이다. 우리의 반응은 의식적인 생각보다 먼지(의식적 생각이 부재하는 상태로) 나온다.
  이제 신경과학자들은 뇌 활동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뇌가 현재 몰두하고 있는 사항의 작은 일부만을 자각할 뿐이다. 고작 2%밖에 모른다는 추정도 있다. 우리는 생각하기 전에 느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생각의 단계에 이르지도 않는다. 생각을 하는 경우에도 자주 감정이 추론을 좌우한다.
  우리의 사전 감정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온갖 종류의 증거들을 잘못 읽게 만든다. 또 한 이미 믿고 있는 것에 유리하도록 증거들을 선택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반응은 심리학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과학적•기술적 증거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기존 신념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읽고 반응한다.
(P.50)


  동기화된 추론에는 단계가 있다. 심리학 실험에서 급격한 감정적 충동을 느껴 자신의 신념을 방어하는 것과 오랜 시간동안 계속해서 반대되는 정보를 접하는데도 반복적으로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은 불편한 팩트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어느 지점이 되면 졌다고 시인하고 받아 들인다 마지막으로 각 개인은 자신의 신념을 방어하고 싶은 필요성에서 차이가 있다. 확고부동하고, 바뀌지 않으며, 바뀔 수도 없는 확신을 가지려는 내적 욕망에 차이가 있다. 원가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확신하고, 그것만큼은 결코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또한 사람들은 내 집단은 옳고 남의 집단은 들렸음을 확신해야 하는 필요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결속이나 통일성에 대한 필요, 또는 세상을 볼 때 집단의 내부와 외부로 명확하게 구분을 해야 할 필요성이 다르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이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다.
(P.59)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해 강한 감정적 확신이 있으면 그 확신은 뇌의 물리적 실체처럼 간주되어야 한다. 그 확신은 개별 뇌 세포(또는 뉴런)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포들 사이의 복잡한 연결 속에 있다. 이전에 수없이 발생했던 신경 활성화의 패턴이 또 다시 발생할 것이다. 특정 연결 네트워크를 많이 활성화할수록 그 연결 네트워크는 더 강력해진다. 기타 치는 능력이나 축구공으로 저글링을 하는 능력처럼 그 연결 네트워크는 점점 더 우리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논리적 • 이성적 논거를 가지고 그 신념을 공격하여 뇌에 서 그 신념이 사라지거나 멈추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뇌를 바꾸려 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도, 효과적인 방법도 아니다.
(P.60)


  열성 지지자들이 편향된 정치적 추론을 하고 있을 때는 뇌에서 논리적 사고와 관련된 부분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감정처리 및 심리적 방어와 관련된 부분을 사용했다. 이 뇌 부분들을 다 열거하면 독자들이 복측 같은 단어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기에 핵심 결론만 강조하겠다.
  웨스턴은 실험 대싱자들이 자신의 당파적 충동을 활성화시키는 논리적 모순에 마주쳤을 때 감정 지향의 뇌 회로로 보이는 부분이 활성화되는 것을 포착했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심사숙고는 포착하지 못했다. 대상자들은 수학문제를 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은 주먹으로 가습을 치는 것과 똑같은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P.66)


  동기화된 추론의 가장 간교한 측면이 아직 남았다. 이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하는 보수주의와 관련된다. 나는 이것을 똑똑한 바보 효과라고 부른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유식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편향되고 설득이 안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에 관해 스토니브룩대학교의 밀턴라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정책에 대해, 예를 들어 낙태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유식하지 않다면 그 사람들은 이유 없이 거부합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 걸음 더 나가서 반론을 내놓지요.” 이 반론에는 감정이 실려 있고 기억과 뇌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일부다. 그러면 그 반론은 더 정교하게 스스로를 설득하게 되고 심지어 처음에 확신했던 것이 옳다고 더 강하게 믿게 만든다. 이 똑똑한 바보 효과 때문에, 특히 이 효과가 정치적 우파에서 계속 나타났기 때문에 나는 과학과 팩트에 관한 논쟁을 다르게 생 각하게 됐고 결국 이 책을 쓰게 되었다.
(P.74)


  그러면 똑똑한 바보 효과는 어떻게 설명될까? 우선 정보가 많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보수주의자일수록 보수적 뉴스나 의견들을 더 많이 소비할 것이다. 폭스뉴스를 보는 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이들은 해당 이슈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자기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가능성이 크다. 그 관점을 지지하는 논거나 이유에도 더 익숙하니 누가 반박을 하면 그 논거들을 기억해서 말할 수 있다. 이들은 그런 논거를 자기 정체성과 뇌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특정 팩트와 정치적 가치관 사이에 강한 감정적 연결망을 만들었다. 이것은 앤드루 슐래플리 같은 유식한 보수주의자들이 유식하지 않거나 정보가 별로 없는 보수주의자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얘기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정보가 별로 없는 보수주의자들이 설득하기 더 쉽고 새로운 정보나 상충하는 정보에도 더 잘 반응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P.77)


  진보주의란 모든 의문을 자기 자신의 관점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고려하는 것을 중시 여기는 이데올로기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한, 진보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에 따르면 이들은 가끔 지나치게 뒤로 물러선 나머지 빤한 도덕적 판단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한 때가 있다. '우리가 뭔데 이 독재자, 저 독재자를 심판하는가?, '범죄자들은 나쁜 환경의 산물일 뿐이다.'와 같은 식이다. 어지 되었건 '진보주의자는 논쟁에서 자기편도 못 들 사람이라는 농담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원칙에 대한 확신에 찬 주장과 기꺼이 자기주장을 굽힐 수 있는 태도는 각자 그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흑백논리의 상황이나 같은 회색에서 명암차만 있는 상황, 둘 모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찌 되었건 보수주의자들은 흑백논리의 세계관이라는 우를 범하고 진보주의자들은 회색 명암차의 세계관이라는 우를 범하는 것 같다.
(P.93)


  진보주의는 계몽주의라는 관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계몽주의란 우리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고 경험을 사용할 수 있고 팩트들을 분류할 수 있고 과학적 방법(역사는 핵물리학과는 다르지만) 같은 것을 사용해서 탄탄한 기반을 가진 진실에 대한 일치된 시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우익이 생각하는 진실과는 다르다. 우익의 진실은 훨씬 신화적이고 내집단 확인에 기반하고 직관과 전통에 의존한다. 하지만 학계에서 전문가들의 정전에서 그런 종류의 역사는 경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역사로 대체되었다.
(P.279)


  진보주의자들은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서 진실을 얻는데 뛰어 나다. 이들의 심리적 형제인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상당 부분 그들이 그에 맞는 기질과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애매모호함이나 불확실성을 잘 참아내고 깊은 사고를 하는 것을 좋아 한다. 따라서 휴전을 위한 조건의 하나는 보수주의자들이 지식이 필요할 때는 실제로 그게 뭔지를 결정하는데 능숙한 사람(개인이 아니라 과학계 같은 집단이면 더 좋다)에게 가야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옳다고 확신한다고 해서 혼자서 만들어내고 전문가들의 말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결단력 있고, 가던 길을 고수하고, 흔들리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자들이 더 뛰어나다. 따라서 휴전 조건의 일부는 선택안이 결정될 수 있도록 다양한 리더십 위치에 보수주의자들 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진보주의자들이 인정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현실에 기초하는 방식으로 리드한다는 조건이 선행된다면 말이다. 나는 진지하게 우리가 서로의 장점과 약점을 인정하고 각자가 강한 영역에 대한 경의를 보여준다면 정치가 훨씬 더 건강해지리라 본다. 나는 진보주의자들이 내 주위에서 뭐가 진실인지를 알려주면 좋겠고, 우리 팀안에 보 수주의자가 있어서 내가 단호하고 효과적으로
가던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
​(P.3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로사회
한병철 / 김태환 / 문학과지성사 / 2012/ 128
(2017. 1. 7.)



  시대마다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 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P.11)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의미에서 타자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메두사는 아마도 최고도로 극단화된 형태의 면역학적 타자일 것이다. 메두사는 파멸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조차 없는 근원적인 이질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신경성 폭력은 어떤 면역학적 시각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부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에,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지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별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P.21)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올중 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을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기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지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P.27)


  힘에는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기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P.52)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인간의 내적 영혼에도 구조적 변화를 가져온다. 후기근대적 성과주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대상으로 히는 복종적 주체외는 완전히 다른 심리를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 장치에서는 부인과 심적 억압, 위반에 대한 불안이 지배적이다. 자아는 불안의 장소이다하지만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부인할 일이 거의 없다. 그는 긍정의 주체다. 만약 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부인과 심적 억압의 부정성과 결부 되어 있는 것이라면, 후기근대적 성과주체에게는 더 이상무 의식이 없다. 그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자아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무시간적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금지와 억압의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로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 에 그런 사회를 떠난 것이다.
(P.83)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그는 타자의 명에 따라 행동자히 않고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명령하는 타자의부정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 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정애의 원인이 된다.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 인정으로서의 보상은 타자 또는 제3자라는 심급을 전제한다.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칸트에게는 신이 보상의 심급이다. 신은 도덕적 업적을 보상하고 인정해준다. 보상구조에 이상이 생기면서 성과주체는 점점 더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 따라서 타자관계의 부재는 보상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인 것이다. 오늘날의 생산관계도 보상의 위기를 불러온 또 다른 원인이다. 완결도.ㄴ 일의 결과로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오늘의 생산관계는 완결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들은 열려 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나간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버렸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나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는 삶 자체마저도 섬뜩한 경직성을 띠게
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적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 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P.113)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사회, 긍정성 과잉의 사회는 흔히 얘기되는 후근대적 사회.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냉전의 종식, 다문화주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효과적 퇴치, 규제와 억압의 철폐와 개인적 욕망의 긍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관철되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 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지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기,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 개인의 무한 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괴주체의 만성질환이다.
(P.120)


  한병철은 성과사회와 성과주체의 이상이 오늘의 세계에서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더욱 생산적으로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요구라면,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착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지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명철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이것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P.1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