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미술관 (Art As Therapy)
알랭 드 보통 / 존 암스트롱 / 김한영 / 문학동네 / 240쪽
(2018. 1. 18.)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현대 세계는 예술을 매우 중요하게, 인생의 의미에 버금갈 정도로 소중히 여긴다. 이 높은 존중을 보여주는 증거는 새로 문을 여는 미술관에서, 예술의 생산과 전시에 상당한 투자를 하는 정부 정책에서, 작품에 대한 접근성(특히 어린아이들과 소외 계층에 돌아 갈 혜택을 위해)을 높이고자 하는 예술 수호자들의 열망에서, 학문으로서 예술 이론의 위상과 상업 예술시장에서의 높은 가치 평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술과의 만남은 항상 기대한 바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명성이 자자한 미술 관이나 전시회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왜 예상했던 변화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 어리둥절함과 무능하다는 느낌을 품은 채 문을 나서기도 한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탓하고, 문제의 뿌리는 분명 이해 부족이나 감성적 수용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책은 문제의 뿌리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가르치고, 팔고,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인간과 예술의 관계는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근본적으로 꺼리는 제도의 소극성으로 인해 꾸준히 약화되어왔다. 예술의 존재 이유를 묻는 행위는 아주 부당하게도 조급하고, 불합리하고, 다소 무례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은 예술이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명확히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높은 지위를 신비한 영역에 남겨두고 그와 동시에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예술은 칭송받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설명의 대상이기보다 추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너무나 잦다 예술의 가치는 상식의 문제로 밀려난다. 이는 예술의 수호자들에게 만큼이나 관람자들에게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만일 예술의 껍질 속에, 알기 쉬운 용어로 정의하고 논의될 수 있는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예술은 도구일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자,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에 보다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P.4)


​  만일 세상이 좀더 따뜻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에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술적 경험의 가장 이상한 특징 중 하나는 가끔 눈물을 홀리게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이다. 그런 순간은 괴롭거나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대면할 때가 아니라 특별히 우아하고 사랑스러워 보는 즉시 가슴이 터길 것 같은 작품과 마주칠 때 찾아온다. 아름다움에 격렬히 반응하는 이 특별한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P.16)


  어른과 놀고 있는 아이와. 아이와 놀고 있는 어른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아이의 기쁨은 천진난만하며, 그런 기쁨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어른의 기쁨은 삶의 고난을 회상하는 선에 머물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감동' 시키고 때로는 울게 한다. 만일 우리가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예술을 싸잡아 감상적이고 정적이라 비난한다면 이는 큰 손실이다. 사실 그런 작품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까닭은 현실이 대개 어떤지 우리가 잘 알고 있어서다. 예쁜 미술작품의 쾌감은 불만족에 기인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않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혹시 미를 사랑할 줄 아는 로봇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구상한다면, 우리는 그 로봇이 인생을 증오하고, 혼란과 좌절을 느끼고, 고통을 겪는 동시에 그럴 필요가 없기를 희망하도록 아주 잔인한 조건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예술이 단지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소중해지는 비경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산적한 문제들을 보면 앞으로 수 세기 동안 예쁜 그림이 매력을 잃어버릴 위험성은 전무하다고 확신할 수 있으니
(P.20)


  예술은 이미 충분하다고 섣불리 추정해서는 안 되는 균형과 선함을 시의적절하게.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한다.
(P.42)


(자기이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에겐 직관, 의혹, 육감, 모호한 공상, 이상하게 뒤섞인 감정이 있으며, 이 모두는 단순명료한 판단을 방해한다. 여러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예전에 느꼈지만 명확히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정확히 파악한 듯 보이는 예술작품들과 우연히 마주친다. 알렉산더 포프는 시의 한 핵심 기능을, 우리가 어설픈 형태로 경험하는 생각들을 붙잡아 거기에 명료한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우리가 '자주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는'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생각, 나 자신의 경험이면서도 쉽사리 사라지고,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을 붙잡아 예전 보다 더 좋게 다듬어 나에게 돌려줄 때.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고 느낀다.​
​(P.44)


  예술과의 교류는 유용하다. 비록 소재는 방어적인 지루함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낯선 것이지만 혼자 있는 시간과 상태를 허락해 그런 소재를 좀더 전략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중요한 첫 단계는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미워한 필요는 없다. 많은 예술이 결국 우리의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세계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P.53)


  처음에 낯설게 느끼지는 예술작품의 가치는, 그런 예술을 통해, 익숙한 환경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지만 우리 인류와 충분히 교류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생각과 태도를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전적으로 세속적이거나 평등주의적인 문화에서는 중요한 생각들이 곧잘 사라진다. 우리의 들에 박한 일상은 대체로 우리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일깨우지 않으며, 예술계가 찌르고 치근대고 좋은 의미로 도발할 때까지 내처 겨울잠을 잔다. 이질적인 예술 덕분에 나는 내 안의 종교적 충동, 내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귀족적인 면, 통과의례를 경험해보고픈 욕구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런 발견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의식을 확장시킨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우리 앞에 진열되어 있진 않다.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P.58)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해 고생하고, 매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종종 엉뚱한 갈망을 품는다.​ 문제의 한 원인은 상황에 익숙해지는 우리의 능력. 즉 우리가 습관화라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데 있다. 습관이란 인간적 기능의 전 분야에 걸쳐 행동을 기계적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이다.그러나 습관은 꼭 그만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쉽다. 익숙하지만 주의깊게 교감 할 만한 것들을 마음에 새기지 않는 습관에 짓을 때, 불행이 튀어나온다. 중요한 것에 집중한 수 있게 덜 중요한 것들을 삭제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는 요소들을 삭제하고 만다.
(P.59)


  우리가 말하는 '화려함'은 주로 다른 곳에. 즉 모르는 사람의 집에, 잡지에 나은 파티에, 돈과 인기를 거미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의 삶에 있다. 우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누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유혹에 노출되는 것은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의 본질상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이쪽에서 창문 너머로 그 유혹적 인 것들을 엿보며 괴로워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보다 고급한 영역을 약속하고, 상업적 이미지들은 그 영역에 닿으려는 갈망을 창출하는 데 일조한다. 상업적 이미지들은 휴일의 링사이드 좌석(권투•격투기 경기에서 링 바로 앞에 위치한 값비싼 좌석-옮긴이), 전문가들의 대성공. 멋진 연애, 화려한 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는 우리가 그를 운명적으로 훨씬 더 잘 알 수밖에 없는 어느 엘리트의 생일 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미지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해독제를 건네주어 면목을 세우기도 한다. 이는 우리 삶의 조건인 따분함과 무미건조 함을 메스껍게 만드는 동시에 그 조건과 지적인 화해를 이끌어내는 예술의 힘 덕분이다.
(P.62)
​​

예술은 우리에게 일곱가지의 보조수단을 제공한다.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해준다..
2. 희망의 조달자 : 예술은 즐겁고 유쾨한 것들을 시야에 붙잡아둔다. 예술은 우리가 너무 쉽게 절망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 예술은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우쳐주고. 우리는 그로 인해 곤경 앞에서 덜 당황한다. 곤경을 고귀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4. 균형추: 예술은 우리가 가진 좋은 자질들의 핵심을 특히 명료하게 암호화해 다양한 형태의 매개로 우리 앞에 내놓고, 그럼으로써 우리 본성의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허락된 최고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끌이준다.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 예술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많은 부분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대단히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으며, 잘 다듬어지고 훌륭하게 조직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예술은 우리에게 다른 문화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가장 웅변적인 예들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예술작품과의 교유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준다. 많은 예술이 처음에는 단지 '남의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생각과 태도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발견한다.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예술은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릇없이, 습관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준다.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본다. 예술은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막아준다.
(P.65)


  예술을 진심으로 숭배한다고 해서 반드시 목적을 배제하고 예술을 연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작품 속에 강하게 나타나 있는 선함을 적극 유통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 예술에 매혹된 사람들은 종종 예술가나 학계 연구자가 되지만, 사업, 채용 및 구직 상담, 정부, 데이트 주선, 광고나 부부 심리치료 등의 분야에서 일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예술의 이해라는 더 높은 이상으로부터 떨어져나와야만 하는 직업들이 아니다. 사실 이 직업들이야말로 이론상, 예로부터 예술에서 탐구하고 발전시켜온 가치들을 진지하게 여기고 실현시킬 수 있는 영역이다. 좋은 인간관계, 격조 있는 도시. 금전적 만족도도 높을 뿐 아니라 존경받을 만하고 감성적으로 만족스러운 일. 그것이 진정한 예술작품이다.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대상들은 단지 그것들을 향해 우리가 눈길을 돌리도록 이끌어주는 부차적인 도구일 뿐이다.
(P.231)


  예술의 혜택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술을 언제 밀쳐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정 시점이 되면 우리는 미술관이나 공원 안의 조각품을 떠나 예술의 진정한 목적인 삶의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고마움을 모르거나 감상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술에서 참으로 귀중하고 그래서 좀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큰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책 전체에서 우리는 예술의 혜택에 주목해왔다. 다시 말해, 예술이 인간관계와 관련된 우리의 능력들을 어떻게 증진시키고, 돈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개선하고, 우리의 본래적 자아에 대처하며 우리의 꿈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노력에 어떻게 일조하는지 살폈다. 이것만으로도 기존 예술계가 지금까지 권유해온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성큼 벗어나는 첫걸음을 뗀 셈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예술이 덜 필요하고 덜 예외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늘날사람들이 미술관의 격리된 전시실에서 발견하고, 찬양하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가치들이 온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한다면서도 사회가 언젠가는 예술 때문에 야단법석 떨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내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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