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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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기기에 몰두한 모두가 오직 네트 안에서 '소통'하고 있었다. 고삐 풀린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라지만 네트 밖에서는 그조차 고요했다. 네트 밖에는 세상이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세상.

마지막 일주일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최상의 것을 선사하기로 한 나.

그 곁은 지키는 안드로이드 조이.

 

1세대 안드로이드 조이.

무수한 삭제의 기억 그 어디쯤에 남아 있는 기억들은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라는 걸 생성해 주는 밑거름이 되었을까?

자신이 보호했던 인간의 죽음을 지켜야 하는 안드로이의 마음에 어떤 것이 깃들여졌을까?

안드로이드를 기계로만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이 올 테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기계 어딘가에도 인간은 자신을 증명할 무언가를 남길 테니.

 

많은 것들이 유의미하게 변할 때, 또 어떤 것들은 고집스럽게 살아남는 법이다.

 

 

화성으로 이주했음에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비싼 통신료를 지불해가며 디지털 제사를 지내는 심정들은 무엇일까.

4분 30초의 시간 간격 사이로 서로의 등과 엉덩이만을 보여주며 절을 주고받는 지구인과 화성인.

 

전화기에 대고 조상 귀신에게 절하는 상황에 어이가 어디 있다는 건지 말 좀 해주세요, 기자님.

게다가, 이 멀리까지 찾아오는 집념 어린 귀신이라니 정말 무섭다고요.

 

 

여기와서 제일 황당할 때가, '우린 화성인이라 그런 거 안 따져'하던 사람들이 '그래도 한국인인데 이건 챙겨야지'할 때예요.

 

 

 

단어가 내려온다. 이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모두 화성에 산다.

그러니 화성인이다.

화성인이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고수해야 하는 화성인.

제사와 육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자들.

경력단절과 독박 육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안타까워하지 않는 그녀들의 시간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미주는 화성에서 지구로 이직을 준비한다.

하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서류를 접수 시키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녀는 지구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까?

 

지구와 똑같은 쌍둥이 행성이 있다면?

그 행성으로 행성 사파리를 떠날 수 있다면?

지구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는 그 행성으로 사파리 여행을 하는 기분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인간의 조상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나기 이전의 호모 속들이 즐긴 고유의 습성은?

호모 리터스들의 서핑을 구경하는 인간 중의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는 행성사파리.

하지만 미아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 행성사파리가 더 특별해진다.

 

 

"생물의 진화가 완벽하게 무계획적인 것처럼, 행성의 일생 역시 아무리 주어진 조건이 기적처럼 동일해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역시 지구의 과거가 아니죠."

 

 

단어가 내려온다.

제목을 듣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어떨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SF를 빙자한 현실의 이야기들 속에 언제일지 모를 미래가 스며있다.

 

이 책을 읽어 가면서 화성인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행성사파리가 언젠가는 가능해질 거 같고

안드로이드가 더 이상 기계처럼 느껴지지 않고

내게도 어느 날 나만의 단어가 내려올 거 같다.

 

묘한 중독성이 있는 SF 단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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