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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하미나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9월
평점 :
이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난 여자들을 우울증, 불안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같은 딱지를 붙여 구분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옹호자이고 싶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아주 많은 곳에 인덱스를 붙이게 된다.
이유는 나 자신이 병원에 가서 느꼈던 수많은 느낌들에 대해서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호르몬 때문이야."
"너무 예민한 거 아니니?"
"괜히 엄살 부리는 거 아니지?"
"갱년기라 그래."
"오춘기가 왔나 보다!"
이런 일상적으로 쓰던 말들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아진다.
그런 말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이 들기 시작한다.
내 주변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무엇 하나 이해하려 한 적 없고, 보듬어 볼 생각도 안 하고, 원인이 뭔지를 알려고 해보지도 않으면서 무심하게 내뱉는 말들이니까.
우울증, 조증, 불안증, 공황장애, 기타 등등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과 고통들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병명이다.
설사 위의 병명이 가리키는 증상과 일치하지 않더라고 아무 병명 없이 아픈 것보다는 저런 병명이라도 있어야 위안을 받는 것이 환자다.
이 책을 쓴 저자 하미나 역시 조울증 환자다.
본인이 겪는 고통을 뚜렷하게 치료되지 않는 상황들을 더 이상 방치하기 싫어서 스스로 공부하고, 비슷한 증상의 여성들과 수많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써낸 결과물이다.
나랑 상관없는 얘기네.
정말 그럴까?
우리는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극심한 고통은 기억을 와해시킨다. 우리는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기억이 무너지면 자아도 와해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산산이 무너지고 흩어진 기억을 모아 재구성하며 시작된다.
이 책은 우울에 대한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 사회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직시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쓰여진 책이다.
2부에서 읽게 되는 여성들의 개인사는 폭력과 학대로 인한 상처를 복기하는 일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최초의 폭력이 시작되는 곳이거나 폭력과 맞닥뜨리는 곳이다.
엄마에게 가해지는 아버지의 폭력,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주먹과 언어폭력 앞에 그대로 노출되는 동심은 그 자체로 우울이 된다.
그렇게 쌓여 온 감정들은 표출되지 못하고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들이 고통으로 아우성치며 몸 여기저기를 공격하는 것이다.
엄마와 딸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난장에서 함께 미쳐 뒹구는 동안, 아빠는 난장의 원인을 제공했으나 그곳에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피해 간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발현되는 정신질환을 가족 내의 문제로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 또한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가정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대목에서 나는 통쾌함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폭력이 "사랑이 가득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가. 또 이렇게 가족 안에서 형성된,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은 상처는 대물림되기 쉽다. 우울증의 가족력이란 비단 유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엄마가 1차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자신의 고통 앞에서 아이들까지 돌보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만만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울분을 덜어내었을 것도 같다.
그것도 아들보다는 딸이 더 만만하기에 딸에게만은 자신의 감정을 분출했던 것이 딸에게는 더 많은 상처를 가져다주는 결과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은 채로 뭉뚱그려서 "우울증이나 조울증"으로 명명하고 만다.
우울증이 어른에게만 통용된다고 생각하지만 우울증은 꽤 어린 나이에서 출발한다는 사실도 이 책이 알려주고 있다.
학교와 직장에서 얻는 정신적인 폭력도 많은 사람들에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감정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가해자는 모르는 피해자의 상처는 그렇게 계속 복제된다.
'한국에서 네가 너답게 살려 하면 결국 죽게 돼.'
동년배 연예인의 자살은 그들에게도 상처가 되었다.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받았던 질타들이 결국 그들을 사지로 몰아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가정, 학교, 데이트 폭력과는 또 다른 사회적 폭력 앞에서 많은 여자들이 좌절하고, 꺾이고, 숨어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상처는 우리의 자긍심이 될 수 있을까. 고통을 수용하고 치료하는 것을 넘어서, 이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 지나온 궤적들이 꺼내기 어려운 기억 속에서 멈춰 있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를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총 31명의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들이 이제라도 이렇게 목소리를 내어 준 것이 고맙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받았던 상처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자들은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로 묵살되었고, 까다롭고, 예민하고, 잘난 척하고, 불란만 일으키는 존재로 다뤄져 왔다.
세상이 변하고 여성들의 지위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그러나 고통에 머물지 않고, 원인을 찾아내고, 들여다보며, 치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그녀들 때문에
미처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을 그녀들에게도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
이유를 모른 채 몇 년을 아팠습니다. 마음을 들여다보고서야 알았어요. 제 마음의 폭풍은 작은 바람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것을요.
처음엔 우리 '둘'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였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쉬고 싶은 우리'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미.괴.오.똑.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모든 그녀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해받지 못하고 돌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읽어 봤으면 좋겠다.
이 세상은 지금 당신이 느끼는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