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제정신입니다 - 마메의 정신없는 날들
마메 지음, 권남희 옮김 / 사계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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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고 하면 왠지 멋진 그림체가 생각나는데 마메씨의 그림에는 그런 느낌이 없다.

단순하고 담백한 그림에 최소한의 배경만 가진 이 만화는 생활 밀착형이라서 꽤 많은 공감을 갖게 만든다.

읽다 보면 마메씨 얘기인지 내 얘기인지, 일본 사람 얘기인지 우리 얘기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많은 에피소드에서 나에게도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 속이 뜨끔뜨끔하다.

완죤~ 내 얘기네~





딸과 아들을 키우는 싱글 맘

BTS에 입문해 SNS를 시작하고

그래서 만화가까지 된 마메 아줌마의 일상이 그려진 만화를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국제적으로 그런 거라는 묘한 위안을 받는다.

 

 

꽃집, 도시락 공장, 도시락 배달 등 여러 가지 일을 파트타임으로 뛰며 세 아이를 혼자 키우는 마메씨의 일상은

성별을 알기 힘든 그림체가 주는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서 에피소드가 더 돋보이는 효과를 주는 아직 제정신입니다.

 

내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무수한 건망증과 그로 인해 저절로 생기는 웃픈 상황들이 마메씨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니

그래서인지 묘한 동질감이 더해져서 살맛이 난다.

제목처럼 아직 제정신이라는 걸 확인하는 거 같아서.

 

40대. 세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이 단어들이 주는 막연한 걱정들은 만화를 보고 있으면 사라져 버린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깨알 같은 상황들을 단순한 그림으로 재현해낸 마메의 그림일기.

 

뭔가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서고

내가 참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은 괜찮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다들 그러고 사니까.

 

나도 BTS 때문에 밤을 새우고

그들의 공연 동영상을 보다 보면 현실의 걱정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 좋은 에너지를 사장 시키지 않고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 보낸 마메씨.

좋은 영향력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마메씨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

 

내 일상이 별 볼일 없어 보이고

정신머리 없음에 자괴감이 들 때

마메씨를 만나면 다들 그러고 사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걱정이 사라집니다.

ㅋㅋㅋ 키득거리게 되면 내 삶도 좋아 보입니다.

덤으로 내 일상에서도 뭔가 길어 올릴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생깁니다.

마메씨처럼 잘 엮어 보세요.

혹시 아나요?

당신도 당신의 이야기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지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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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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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모인 티셔츠 얘기로 책까지 내고 대단하다. 흔히 '계속하는 게 힘'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렇군. 뭔가 나 자신이 계속성에만 의지하여 사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누구에게나 딱히 모으려고 한 게 아니데 모아지는 물건들이 있다.

내가 산 것도 있고, 누군가가 선물한 것도 있고, 기념품으로 받은 것도 있고.

하루키에겐 티셔츠가 그런 물건이다.

모으려고 한 게 아닌데 모아진 것.




다양한 티셔츠의 사진과 함께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긴

하루키의 티셔츠 에세이.

 

마라톤에 참여해서 받은 티셔츠

공연이 끝나고 기념으로 산 티셔츠

여행지에서 눈에 띄어서 산 티셔츠

자신의 책 홍보로 찍은 티셔츠

여행지마다 찾아가는 서점, 레코드 가게에서 사거나 받은 티셔츠

어떤 것은 늘 애용하고, 어떤 것은 고이 접어 보관용으로 둔다.

 

이런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전반에 걸쳐 살다 간 소설가 한 명이 일상에서 이런 간편한 옷을 입고 속 편하게 생활했구나 하는 것을 알리는, 후세를 위한 풍속 자료로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입는 티셔츠 보다 보관하고 있는 티셔츠가 더 많은 거 같은 하루키 컬렉션(?)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하루키는 LP도 상당량 수집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책, 레코드, 티셔츠 중에 어떤 걸 제일 많이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책은 내가 몰랐던 하루키의 모습을 알 수 있어서 좋다.

나는 하루키의 열성팬은 아니다.

하루키라는 이름만으로 가슴이 설레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루키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를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이름있는 작가 정도로만 담아두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달리기를 좋아하고(매년 마라톤 대회를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철인 3종 경기도 해봤고

서점이나 레코드 가게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어디를 가나 희귀 음반을 구하기 위해 오래된 레코드점을 뒤지고, 서점엔 꼭 들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그의 작품 속에 그의 일상들이 녹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금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들여다보고 말 물건들이지만

왠지 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물건들에게 하루키처럼 어떤 서사도 부여하지 못할 거 같다.

그 물건들이 어떻게 내게로 왔는지, 어떤 이유로 지니고 있는지 하루키처럼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에.

 

뒤쪽에 하루키의 인터뷰가 담긴 부록이 있다.

책에서 못다 한 티셔츠들의 사진도 담겨 있다.

피곤한 날은 짐빔 하이볼을 마신다니 왠지 해리 홀레가 생각난다.

 

하루키가 가장 애정 하는 티셔츠는 1달러에 샀지만 가장 가성비 좋은 투자였다.

그 티셔츠에 영감을 받아 소설도 쓰고 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이 일화를 읽으니 소설가가 가져야 할 가장 큰 영감은 바로 호기심인 거 같다.

 

작정을 하고 글은 이렇게 쓰는 거라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그저 짤막하게 신변잡기의 글을 소재와 함께 적어 둔 이 책이 바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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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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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은행 강도, 아파트 오픈하우스, 인질극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수도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을 기다려왔다.

그래서 잔뜩 기대를 하고 읽어 나갔다.

그러나.

무슨 말장난 같은 말투와 반복되는 이야기의 설정이 나를 짜증스럽게 한다.

배크만의 이야기 스타일이 바뀌었나?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하나같이 답답하고 멍청하고 고집스러운 모습들은 상식적인 세상에서 아웃된 사람들의 공동체 같다.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서로 얽히고 설킨 사람들의 짜증 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무언가 번득거리는 걸 느끼게 된다.

아! 이게 다가 아니구나!

그럼. 그렇지 !

딱 하나의 지독하게 한심한 발상. 그것만 있으면 된다.

우리가 바보가 되기 위해서는 그 당시에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지독하게 한심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 발상.

그것만 있으면 된다.

이 모든 사건들은 과거로부터 시작되었고, 털끝만 한 인연들이 모이고 모여서, 한심한 발상에 투여된 상황이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두는 착하고, 따뜻하고,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인질극에 대한 답변을 할 때는 한심하고, 짜증 나고, 고집스럽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은 따뜻하고, 감동스럽고, 용기 있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된다.

정말

보통의 선한 사람들이

한순간 잘 못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우왕좌왕하고, 어이없는 실수들을 하는 모습 그대로가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와, 타인의 실수마저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희한한 위로를 받게 된다.

이 성가신 인질들은 은행강도를 다그치고, 훈계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어떻냐고, 은행 강도답지 않다고 지적질 한다.

생전 처음 은행 강도를 계획했지만 하필 털려던 은행은 현금이 전혀 없는 은행이었다.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은행인 걸까?

간신히 도망쳐서 얼결에 들어간 곳이 오픈하우스 아파트였고, 그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졸지에 인질이 되었다.

이 어설픈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조마조마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프레드릭 배크만은 자신의 이름값을 지켰다.

작은 도시의 사람들은

티끌만 한 인연으로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은행강도로 시작해서 인질극으로 변질됐지만 결국 다리에 관한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낯선 존재들이지만

결국 자신도 모르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바보 같은 사람들이 바보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새해 전야제에서 터뜨리는 불꽃놀이 같다.

세상 어딘가엔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불행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짜증 나는 사람을 참아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사랑을 잊은 사람에게 사랑을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뒤에 가서야 이 이야기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나 자신의 각박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였다.

느긋하게 즐기지 못했던 나 자신을 반성해 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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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 숲속의 삶 웅진 세계그림책 215
필리프 잘베르 지음, 이세진 옮김, 펠릭스 잘텐 원작 / 웅진주니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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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않아도 돼, 밤비. 엄마는 너를 믿는단다.

 

 

디즈니판 밤비의 귀여운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나에겐 이 그림체가 조금 낯설었습니다.

귀엽고 밝은 동화적 이미지가 아닌 사실적이고 섬세한 표현의 그림체는 훨씬 우아하고 깊이 있게 느껴졌죠.

한 번의 가을, 겨울과 두 번의 봄, 여름의 삶.

 

 

갓 태어난 밤비의 비틀거리는 모습들

엄마를 따라 세상으로 한발 내딛는 밤비의 이야기가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게 만듭니다.

 

 


 

 

온전히 엄마의 품 안에서 자라던 밤비는 여름을 맞습니다.

그리고 좀 더 넓은 곳을 향해 새로운 감각을 느끼며 나아가다 플린을 만나게 됩니다.

또래의 친구를 만나게 된 밤비와 플린은 티티새를 쫓아다니며 즐겁게 노닐죠.

 

 

 

여기는 산기슭이란다.

여기서 더 가면 우리를 보호해 주는 나무들이 없어. 그러니 조심해야 해.

엄마가 앞장설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엄마를 기다리지 말고 숲속 깊은 곳으로 앞만 보고 달려. 뒤도 돌아 보면 안 돼.

우리가 떨어져도 엄마가 나중에 너를 찾아갈 테니까 말이야. 알았지?

 

 


 

 

아름답기만 한 숲 가장자리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충고는 아직 어린 밤비에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비는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그런 건 난생처음 봤어요. 그들은 두 발로만 우뚝 서 있었어요. 위풍당당하게.

밤비와 플린을 바라보던 그들은 천천히 기다란 나뭇가지 같은 것을 들어 올리고는 잠시 멈추었어요.

그 모습은 정말 기이했어요.

 

 

탕!

 

 

첫 총소리를 들은 밤비와 플린은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잊지 못할 소리였죠.

무사히 피한 밤비는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동안 엄마와 숲속 깊숙한 바위틈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밤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밤입니다...

 

 

여름비가 그치고 다시 햇살을 즐기려는 동물들 사이로 또다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밤비가 첫 번째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비가 내리던 밤에 치던 천둥소리와 지금 들린 천둥소리는 다른 것임을 밤비가 깨닫게 되었을까요?

 

 


 

밤비가 눈치채기 전에 가을이 왔네요.

숲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습니다.

 

 

"저 노루가 누구인지 알아? 플린이 밤비에게 물었어요

"우리의 아버지들 중 하나잖아."

"아니, 정확하게는 네 아버지야. 숲에서 가장 오래 산 노루. 여러 해 동안 많은 노루가 저 왕자의 자리에 도전했지만 다들 무릎을 꿇고 말았지. 그렇게 숲의 왕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왕자, 너의 아버지야."

 

 

아빠 노루의 늠름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밤비는 가을날 알록달록한 숲에서 숲의 왕자 아빠 노루를 만났습니다.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춥고, 먹을 것도 없었죠.

 

 

그리고...

그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탕!

 

 

밤비는 열심히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독했던 겨울은 가고 다시 봄이 왔습니다.

밤비의 뿔도 자라고 있었죠.

밤비는 몸이 튼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탕! 탕! 탕!

 

 

이번에는 그 천둥소리가 밤비의 다리에 닿았습니다...

 

 

아픔을 참고 무작정 달리는 밤비는 문득 자신의 옆에서 누가 달리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바로 숲속의 왕자.

밤비의 아빠 노루가 밤비와 함께 달리고 있었죠.

밤비를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려는 듯.

 

 

밤비는 안전한 곳으로 피했을까요?

밤비의 상처는 잘 아물었을까요?

엄마도 없는 밤비는 어떻게 숲속에서 살아남을까요?

 

 


 

아름다운 그림은 귀엽고 말랑말랑했던 디즈니의 밤비를 잊게 만든다.

원작 밤비는 인간에 의해 위협을 받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앞선 생태문학으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우리는 디즈니 때문에 아기사슴 밤비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밤비가 사슴이 아닌 노루였다는 사실!

 

 

 

원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필리프 잘베르는 연필과 목탄으로 그린 그림에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밤비를 탄생시켰다.

멋진 숲의 풍경과 노루들의 모습이 그래서인지 훨씬 애잔하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밤비.

 

 

50X60의 큰 판형에 가득 채워진 그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숲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이 책을 받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서 밤비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던 그 그림은 이제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밤비보다 더 성숙하고, 강단 있고, 숲속의 왕자처럼 늠름한 밤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밤비를 마주하고 나니

필리프 잘베르가 "빨간 모자"를 각색한 "너의 눈 속에" 가 궁금해졌다.

 

 

21세기에 새롭게 재해석된 밤비.

다 채우지 않은 글의 여백이 남긴 깊은 사색은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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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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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땅에 묻으면서 자식 없는 딸의 유년도 막을 내렸다. 죽어가던 그 도시에서, 우리는 전부 잃어버렸다. 현재 시제의 단어들까지도.

 

무법지대가 되어 버린 카라카스.

혁명의 아이들은 가진 자의 것을 빼앗는 단계를 지나 이제는 아무 곳이나 침범하고, 아무에게나 자신들의 법을 들이댄다.

 

엄마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델라이다 팔콘.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혁명의 아이들에게 집을 빼앗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옆집의 문을 두드리지만 그 문은 잠기지 않았다.

아델라이다는 그곳에서 아우로라 페랄타의 주검을 본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살았다. 아우로라 페랄타는 주검이었고, 나, 아델라이다 팔콘은 생존자였다. 보이지 않는 실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이어주는 뜻밖의 탯줄.

.....

사후 경직이 그녀를 슬픈 곡예사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를 밀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힘껏 밀었다. 시체 처리가 아니라 출산 중이기라도 한 듯.

 

 

매 페이지마다 폭력이 숨을 쉰다.

매 페이지마다 부당함이 소리친다

매 페이지마다 죽음이 자장가를 부른다.

 

아델라이다는 아우로라가 되기로 한다.

시체를 처리하고 아우로라의 모든 것을 배운다.

그녀는 이 지옥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뼛속까지 아우로라가 될 것이니까.

 

베네수엘라는 혼란스러워 아름다웠다. 아름다움과 폭력, 그 둘이야말로 나라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신들 고유의 모순이 만들어낸 균열과 당장이라도 국민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태세를 갖춘 풍경의 구조적 결함 위에 형성된 국가였다.

 

 

더 이상 국가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 안에서 숨 쉬는 것조차도 숨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가족인 엄마를 잃고 집까지 빼앗긴 아델라이다.

그녀는 옆집에 살던 스페인 여자의 딸이 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그녀 역시 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이미 죽은 죽음이지만

시체를 감쪽같이 처리해야 해야 신분 세탁을 할 수 있는 아델라이다.

밤마다 총성이 울리고 시위대와 정부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아델라이다는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했다.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살아남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조마조마하다.

금방이라도 들통날 거 같고

금방이라도 옆집까지 밀고 들어올 거 같은 혁명의 아이들이 자기 집에서 내는 소리들을 들으며 숨죽이고 있는 아델라이다의 팽팽한 긴장감이 모든 문장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나는 베네수엘라를 미인들을 많이 배출하는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사정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닌 자국민끼리의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비정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수상한 사람, 경계하는 사람이 되었고, 연대를 약탈로 둔갑시켰다.

 

 

 

첫 소설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는 기자 출신답게 서슬 퍼렇고 생생한 문장들이 긴박한 상황을 전달한다.

나는 그녀가 스페인 땅을 밟을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한다.

아니, 그 스페인 땅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지 알지 못해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

 

거짓말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이름에서부터? 몸짓에서부터? 기억에서부터? 어쩌면 말에서부터?

 

 

거짓으로 시작해야 하는 새로운 삶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자기보다 열 살 많은 삶을 연기하는 것도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종이와 펜을 놓고 요리사가 되어야 하는 삶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나는 그 여자가 아니었고 완전하게 그 여자가 될 일도 결코 없을 터였다.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베네수엘라

가보지 않고 알지 못했던 곳에 대한 무지는 이 책 한 권에 의해 그 수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암울한 시대를 건너 온 우리의 현대사가 오버랩 되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순간을 그들도 언젠간 누리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현실 아닌 현실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고전이 될 지금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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