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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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땅에 묻으면서 자식 없는 딸의 유년도 막을 내렸다. 죽어가던 그 도시에서, 우리는 전부 잃어버렸다. 현재 시제의 단어들까지도.

 

무법지대가 되어 버린 카라카스.

혁명의 아이들은 가진 자의 것을 빼앗는 단계를 지나 이제는 아무 곳이나 침범하고, 아무에게나 자신들의 법을 들이댄다.

 

엄마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델라이다 팔콘.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혁명의 아이들에게 집을 빼앗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옆집의 문을 두드리지만 그 문은 잠기지 않았다.

아델라이다는 그곳에서 아우로라 페랄타의 주검을 본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살았다. 아우로라 페랄타는 주검이었고, 나, 아델라이다 팔콘은 생존자였다. 보이지 않는 실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이어주는 뜻밖의 탯줄.

.....

사후 경직이 그녀를 슬픈 곡예사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를 밀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힘껏 밀었다. 시체 처리가 아니라 출산 중이기라도 한 듯.

 

 

매 페이지마다 폭력이 숨을 쉰다.

매 페이지마다 부당함이 소리친다

매 페이지마다 죽음이 자장가를 부른다.

 

아델라이다는 아우로라가 되기로 한다.

시체를 처리하고 아우로라의 모든 것을 배운다.

그녀는 이 지옥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뼛속까지 아우로라가 될 것이니까.

 

베네수엘라는 혼란스러워 아름다웠다. 아름다움과 폭력, 그 둘이야말로 나라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신들 고유의 모순이 만들어낸 균열과 당장이라도 국민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태세를 갖춘 풍경의 구조적 결함 위에 형성된 국가였다.

 

 

더 이상 국가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 안에서 숨 쉬는 것조차도 숨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가족인 엄마를 잃고 집까지 빼앗긴 아델라이다.

그녀는 옆집에 살던 스페인 여자의 딸이 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그녀 역시 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이미 죽은 죽음이지만

시체를 감쪽같이 처리해야 해야 신분 세탁을 할 수 있는 아델라이다.

밤마다 총성이 울리고 시위대와 정부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아델라이다는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했다.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살아남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조마조마하다.

금방이라도 들통날 거 같고

금방이라도 옆집까지 밀고 들어올 거 같은 혁명의 아이들이 자기 집에서 내는 소리들을 들으며 숨죽이고 있는 아델라이다의 팽팽한 긴장감이 모든 문장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나는 베네수엘라를 미인들을 많이 배출하는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사정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닌 자국민끼리의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비정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수상한 사람, 경계하는 사람이 되었고, 연대를 약탈로 둔갑시켰다.

 

 

 

첫 소설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는 기자 출신답게 서슬 퍼렇고 생생한 문장들이 긴박한 상황을 전달한다.

나는 그녀가 스페인 땅을 밟을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한다.

아니, 그 스페인 땅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지 알지 못해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

 

거짓말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이름에서부터? 몸짓에서부터? 기억에서부터? 어쩌면 말에서부터?

 

 

거짓으로 시작해야 하는 새로운 삶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자기보다 열 살 많은 삶을 연기하는 것도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종이와 펜을 놓고 요리사가 되어야 하는 삶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나는 그 여자가 아니었고 완전하게 그 여자가 될 일도 결코 없을 터였다.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베네수엘라

가보지 않고 알지 못했던 곳에 대한 무지는 이 책 한 권에 의해 그 수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암울한 시대를 건너 온 우리의 현대사가 오버랩 되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순간을 그들도 언젠간 누리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현실 아닌 현실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고전이 될 지금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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