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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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모인 티셔츠 얘기로 책까지 내고 대단하다. 흔히 '계속하는 게 힘'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렇군. 뭔가 나 자신이 계속성에만 의지하여 사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누구에게나 딱히 모으려고 한 게 아니데 모아지는 물건들이 있다.

내가 산 것도 있고, 누군가가 선물한 것도 있고, 기념품으로 받은 것도 있고.

하루키에겐 티셔츠가 그런 물건이다.

모으려고 한 게 아닌데 모아진 것.




다양한 티셔츠의 사진과 함께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긴

하루키의 티셔츠 에세이.

 

마라톤에 참여해서 받은 티셔츠

공연이 끝나고 기념으로 산 티셔츠

여행지에서 눈에 띄어서 산 티셔츠

자신의 책 홍보로 찍은 티셔츠

여행지마다 찾아가는 서점, 레코드 가게에서 사거나 받은 티셔츠

어떤 것은 늘 애용하고, 어떤 것은 고이 접어 보관용으로 둔다.

 

이런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전반에 걸쳐 살다 간 소설가 한 명이 일상에서 이런 간편한 옷을 입고 속 편하게 생활했구나 하는 것을 알리는, 후세를 위한 풍속 자료로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입는 티셔츠 보다 보관하고 있는 티셔츠가 더 많은 거 같은 하루키 컬렉션(?)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하루키는 LP도 상당량 수집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책, 레코드, 티셔츠 중에 어떤 걸 제일 많이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책은 내가 몰랐던 하루키의 모습을 알 수 있어서 좋다.

나는 하루키의 열성팬은 아니다.

하루키라는 이름만으로 가슴이 설레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루키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를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이름있는 작가 정도로만 담아두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달리기를 좋아하고(매년 마라톤 대회를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철인 3종 경기도 해봤고

서점이나 레코드 가게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어디를 가나 희귀 음반을 구하기 위해 오래된 레코드점을 뒤지고, 서점엔 꼭 들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그의 작품 속에 그의 일상들이 녹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금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들여다보고 말 물건들이지만

왠지 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물건들에게 하루키처럼 어떤 서사도 부여하지 못할 거 같다.

그 물건들이 어떻게 내게로 왔는지, 어떤 이유로 지니고 있는지 하루키처럼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에.

 

뒤쪽에 하루키의 인터뷰가 담긴 부록이 있다.

책에서 못다 한 티셔츠들의 사진도 담겨 있다.

피곤한 날은 짐빔 하이볼을 마신다니 왠지 해리 홀레가 생각난다.

 

하루키가 가장 애정 하는 티셔츠는 1달러에 샀지만 가장 가성비 좋은 투자였다.

그 티셔츠에 영감을 받아 소설도 쓰고 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이 일화를 읽으니 소설가가 가져야 할 가장 큰 영감은 바로 호기심인 거 같다.

 

작정을 하고 글은 이렇게 쓰는 거라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그저 짤막하게 신변잡기의 글을 소재와 함께 적어 둔 이 책이 바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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