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상깊은 구절>


p.52 – 대부분의 일상적 독서 시간은 소비의 양식, 즉 소유 양식으로 읽는 일로 허송되고 있다… 결말을 알았을 때, 그들은 마치 자신의 경험에서 그 결말을 찾아낸 것처럼 현실적으로 전체 스토리를 ‘소유’하는 것이다.


p.80 – 바실리우스에게 있어서 모든 재물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 그의 특성을 말해 주는 이런 질문이 있다. ‘다른 사람의 옷을 가져가는 사람은 도둑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주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가?’

p.109 – 소유의 또 다른 기능은 ‘생존적 소유의 기능’이다. 인간존재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보전하고, 손질하여 사용하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 음식, 주거, 옷, 일용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도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형태의 소유는 인간존재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생존적 소유라고 할 수 있다. 


p.122 –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반적인 비판과 사회주의의 이상이 기초로 삼고 있는 개념은 인간의 능동성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마비되므로 생의 모든 분야에서의 능동성을 회복함으로써 완전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p.193 –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항은 곧 왜곡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1백 년은 일찍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발달의 절정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내놓았다. 자본주의의 절정기에 번졌던 반자본주의자들의 생각은, 만약 그것이 성공하려면 자본주의 정신으로 완전히 변형되었어야만 했다. 그것은 역사적인 필연성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p.146 – 거의 모든 종류의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발기만은 거짓으로 꾸밀 수가 없다. 정신분석학자의 한 사람인 조지 그로데크는 남자는 결국 단 몇 분 동안만 남자일 뿐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어린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p.183 – 시장적 성격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또 자신에 대해서도 깊은 애착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계가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 사실 어느 누구도 시장적 성격과는 친밀하지 않고, 또 시장적 성격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도 가깝지 않다. 


p.214 – 건강한 사람을 위한 건강한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첫번째 중요한 조치는 생산이 ‘건전한 소비’를 위하여 행해지도록 이끄는 것이다. …. 자유시장경제하에서는 소비자가 그들이 바라는 바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선택적’인 생산을 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소비자가 그들에게 유익한 것만을 원한다는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누가 보든 분명히 잘못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이 명백히 무시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소비자의 욕구는 생산자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상품간의 경쟁은 있지만 광고가 낳는 전체적인 효과는 소비욕을 자극시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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