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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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로하다! 번아웃!


하루의 대부분이 피로하다! 아침에 눈 뜨기는 너무나 힘들고 사무실 나가면 무조건 커피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 좀 차리고 일 좀 하려고 하면 점심시간. 점심 먹은 뒤 식곤증에 결국은 엎드려 잔다. 엎드려 자서 피곤한 상태로 밤까지 일하고 집에 오면 피곤하다. 하루 중 피로가 없는 시간대가 점심시간 직전 뿐이고 그 외의 시간은 항상 피로하다! 




그런데 이런 피로는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주변의 내 친구들도 아침 커피는 필수라고 하고 늦잠에 허덕이는 이들도 많다. 주말엔 정오가 넘도록 자는 경우도 부지기수라 한다. 체력적으로 가장 좋을 20대들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특히 10대 학생들은 살인적인 학업시간 때문에 피로가 너무 과다하여 에너지 드링크, 총명탕 같은 건강을 해치는 것들이 인기라고 한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전국민이 피로하다. 과거 그 어느 시기보다 물질적으로 편안 시기에 사는 우리들인데 대체 왜 이런 것일까. 세탁기, 청소기, 컴퓨터, 인터넷의 발달은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인가.



2. 


저자는 그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근대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것은 규율사회 였다. ‘~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하는 사회로 금지, 규율, 규칙, 법이 중점적이 사회이다. 여기서 개개인은 규칙을 가진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면 해방될 수 있었다. 빵 1,000개 생산으로 규칙으로 한 사회가 있다고 치면 1,000개 생산을 달성하는 순간 더 생산해도 되지만 목적을 달성했기에 쉬어도 되는 시기였다. 여기서 도태되는 이들은 광인과 범죄자로 추락한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성과사회가 도래했다. ‘~이든 할 수 있다’는 모토로 각종 규제가 없다. 누구든지 열심히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고 더 성공할 수 있다. 여기서 피 말리는 자기 채찍이 시작된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모두가 앞만 보고 전력질주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고 한다. 그 열망의 한계를 없애 버리자 모두가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는 누구도 성과의 목표를 고정하지 않는다. 항상 더 많이, 더 크게, 더 좋은이다. 경쟁지표가 없다. 옛날에는 경쟁자가 타인이었기에 어느정도 비교라도 가능했는데 성과사회에서의 경쟁자는 ‘어제의 나’ 다. 자기 자신을 뛰어 넘기 위해 자신을 소비한다. 자신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낙오자로 여겨 우울증 환자로 도태되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링거를 맞으며 일을 한다. 일이 잘못되면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다. 사회는 모든 자유를 주었는데 개인이 그것을 활용을 못한 게 된다. 다들 숨이 턱턱 막히지만 낙오되지 않기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고, 인맥을 만든다.


나 역시 이런 성과사회의 주체이다. 나는 일년 중 어느 시점이 되면 올해 나는 뭐를 했나, 무엇을 성취했나 돌아본다. 작년의 나의 비해 무엇이 발전했나 따져보는데 항상 자책으로 끝난다. 이거 밖에 못했나, 뭐 별로 한 게 없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그렇게 자책하고 나면 빠르게 까먹고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자책할 행동들만 해서 우울증으로 심화되지는 않지만 나와 같은 자책들이 매일 지속되면 아마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까 싶다. 끝없는 자유가 우리를 이렇게 옥죄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새삼 놀랍다. 읽으면서 숨이 턱턱 막힌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생각 자체가 틀려버린 것이다. ‘어제의 나’도 이미 ‘완벽한 나’라고 생각하면 됐었는데 굳이 뛰어넘으려고 했던 것이 잘못되었다. 어느 쪽으로 더 나아져야 한다는 것인가. 그동안 뭔지도 모를 성과를 위해 달려온 나의 과거들이 아쉽다. 고생했다. 



3.


성과사회에서의 해결책으로 저자는 심심함을 역설한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모든 것을 가만히 내려놓고 심심함을 느끼는 것. 거기서 인간관계가 태어나고 창의성이 발휘된다. 거기서 인간성이 회복된다. 그동안 전력질주 해온 우리의 몸과 마음에게 잠시 쉴 틈을 주자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개방적이게 되고 다른 이들의 피로를 볼 수 있고 우애의 분위기를 띨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갉아먹은 자신을 무료함을 느끼며 회복할 수 있다니. 흥미로우면서도 놀랍다. 요즘 읽은 책들 역시 쓸모 없는 시간, 심심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저자 역시 그 점을 꿰뚫고 있다. 현대 사회가 진짜 과잉시대이기는 한가보다. 



4. <인상깊은 구절>


p.32 –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는 바 있다. 


p.66 –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p.72 –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p.121 –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출처

1.도시의 엎드린 여성분

https://unsplash.com/search/sleep?photo=kEFrAFKY6Sk

2.혼자 공부하는 여성분

https://unsplash.com/search/study?photo=ckrUhWyTd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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