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평점 :
- 공항에 대하여
공항에 이유 없이 간 적이 있다. 이유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할 일이 없었던 휴학 초기 시절이라고 볼 수 있지만 공항의 그 느낌을 얻고 싶어 갔다. 그 즈음에 아마 이 책의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을 읽었다가 거기서 저자가 공항의 매력을 극찬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어슬렁어슬렁 책 한 권 들고 가서 인천공항에서 반나절을 보낸 소감은…. 일단은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부럽다는 점이었다. 선글라스 끼고 캐리어 끌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기다리는 모습에 우리는 아마 여행을 가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또 가만히 지켜보니 공항은 예의 그 어떤 관광지, 어떤 장소보다도 다양한 감정이 드러나는 곳 같았다.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의 기대감으로 들뜬 사람들, 출장일로 공항에서조차 노트북에 파묻힌 사람들, 비행기 연착에 잡지나 티비를 보며 따분해 하는 사람들, 공항 내 패스트푸드점에서 국내로 다시 돌아와 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치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먹는 것처럼 심각하게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 공항 내 공연을 의미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 도착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어른들, 아이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여행을 가더라도 공항에 제대로 머무르는 시간은 별로 없다. 비행기시간 몇 시간 전에 도착하여 발권을 빠르게 하고, 면세점을 둘러보다가 행여 늦을까 1시간~30분 이전부터 입구 근처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느라 공항 그 자체를 둘러보는 시간은 얼마 없었다. 앞서 말한 저런 다양한 사람들도 내가 여행을 나갈 적에는 나의 앞 길을 막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랬던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저자는 반나절 머무른 나와는 비교도 안되게 히드로 공항에 일주일 동안 머물며 공항의 진짜 모습을 파헤친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딱딱하고 세련된 공항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나게 해준다.
그렇게 저자의 책을 읽고, 몇 안 되는 나의 공항 경험을 돌이켜보니, 공항은 참으로 신비로운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지만 우리나라 같지 않은 곳. 단번에 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도 있고, 그런 곳에서 단 번에 내 나라로 보내줄 수 있는 곳이 공항이다. 올라갈 때 볼 수 없고 내려올 때 볼 수 있었던 그 꽃처럼 공항 역시 너무 스쳐 지나가는 공간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조금만 깊게, 조금만 느긋하게 바라보면 공항 속의 사람들, 사람들의 감정들을 마주 할 수 있다. 가끔씩 감정의 메마름을 느낄 때, 나를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날카롭게 느껴질 때, 아무 생각 없이 공항엘 책 한 권을 들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 공항의 마케팅 방법에 대하여
경영학도로서 마케팅에 대한 과목을 몇 개 들었다. 우리 사회가 광고의 사회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만큼 수만가지의 광고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시각은 물론이고 후각, 청각, 미각까지 오감 중 하나라도 끌기 위해 더욱 화려하게 더욱 강렬하게 그렇게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애를 쓴다. 공항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항은 대게 깔끔한 편의 시설, 빠른 처리, 다양한 면세점이 있는 점으로 광고에 승부를 본다. 인천공항만 하더라도 세계 1위를 했다는 광고만 수없이 봤고, 뭔 세계 최고의 면세점, 가장 편안한 서비스를 강조했었다. 그래서 항상 깨끗하고 사무적이고, 쾌적한 분위기가 났었다. 그렇게 공항의 좋은 이미지가 강해질수록, 사람 냄새는 점점 나지 않았다. 수만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항이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공항 그 자체만 부각이 되었다. 마치 사람이 이용하지 말고 그 자체로 보존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평소에도 공항을 좋아하는 저자에게, 물론 저자가 공항을 좋아하는지는 모른 채, 한 공항을 소유한 회사가 제의를 해서 공항에 일주일간 머무르며 그 느낌을 글로 써달라고 요청하여 탄생한 책이다. 저자의 글쓰기 능력은 당연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에 공항의 감성을 물씬 느낄 수 있었는데, 놀라운 점은 그 제의를 한 공항이었다. 앞서서 말한 인천공항처럼 그런 방법이 아닌 공항의 이미지를 작가의 눈을 통해 보게 하다니. 이 제의를 한 공항의 책임자는 예술을 마케팅에 어떻게 이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공항의 시설들이 아닌 공항의 직원들을, 여행객들을, 보이지 않던 숨겨진 공간들에 대하여 느낄 수 있었다. 어느 공항이 작가를 위해 공항의 한 켠에 책상과 의자를 마련하고 숙소까지 제공하여 마음대로 글을 쓰게 할 수가 있을까. 문학이라는 예술과 마케팅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효과적인 것 같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이 되는 일반 광고에 비해서는 책이라는 점 때문에 적은 사람들에게만 읽히게 되지만, 한 번 읽으니 그 분위기, 그 느낌이 오히려 더 깊고 오래도록 전달되어 훌륭하다.
우리나라는 문화강국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류는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고 하고, 다른 나라의 문화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능력이 좋다. 하지만 이런 영국의 항공사에 했던 문화의 새로운 발상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의 문학이 유독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최근 신경숙 사태를 보면 왜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문학의 힘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한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류가 잘된다고 관련 상품만 많이 만들어서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실생활에 더욱 끌어들여 문화강국의 면모를 이어나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