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 무의미에 대하여


  요즘 의미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일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면 흔적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하는 행동들이 가치가 있다.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들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배척당한다. 수집품을 모으는 사람들이나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잉여인간으로 취급 받는 세상. 기업의 입사 지원서에는 취미, 특기란이 있는데 이로써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하는 취미, 또는 개인적으로 열심히 해서 특기가 되는 일도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취미의 사전적 의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다.  하지만 면접에서 좋게 말하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위해서 취미는 ‘즐기지는 못해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 혹은 전문적으로 보이는 일’이라고 재정의를 내려도 좋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그는 무의미를 찬양하고(제목이 무의미의 축제이듯이), 책에서는 무의미한 에피소드들의 연속이었다. 책은 배꼽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배꼽티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배꼽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무의미한 고민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짧은 내용의 장편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무의미와 의미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에게 있어 의미 있는 일과 무의미한 일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프로게이머의 게임과 청소년의 게임은 다른 것인가. 철학가가 자유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일반인이 지나가는 배꼽티를 보며 고민에 잠기는 것은 정말 다른 것인가. 나는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의미 있는 일은 의미가 없으며 모든 의미 없는 일은 의미가 있다. 그 둘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둘 모두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누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노래를 수없이 듣는 것, 주말마다 등산을 하는 것 모두 무의미하면서 의미 있는 일이다. ‘예술수업’이란 책을 쓰신 오종우 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학기 말미에 이 책의 저자처럼 무의미한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다.  우리 모두 하나씩 의미 없어 보이는 취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내 것도 아닌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나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것처럼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여도 필요하다고 역설하셨다. 의미만을 찾는 사람들은 메말라 갈 뿐이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을 통해 우리는 충전을 하고 새로운 생각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 무의미를 찬양하시며 예시로 보여준 영화가 타르콥스키의 ‘희생’이란 영화인데, 영화의 시작과 끝이 주인공의 아들이 죽은 나무에게 물을 주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이다. 무의미적인 행위를 통한 의미의 발견. 지금 이 책을 읽고 교수님의 그 강의가 다시 생각나는 것을 보니 저자와 교수님은 같은 것을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리라. 나 역시 그 수업 내용을 듣고 무의미해 보이는 취미를 가지고자 했지만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취미도 가지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오래 전 어떤 모임에서 나를 소개할 때 나의 미래 꿈은 호숫가에서 바늘 없이 낚시를 해서 걸리면 놓아주고 석양이나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꿈이 상당히 노인네 같다고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 얼마나 무의미하고도 무의미한 일인가 라는 느낌이 든다. 그 무의미적인 꿈을 계속 간직해야겠다. 무의미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란 개인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무의미를 찬양하자.



- ‘자신의 죽음을 구하기 위해’에 대하여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특히 이 구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단순히 활자를 읽는 것뿐인데 어떻게 그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은 구절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의 죽음을 구하기 위해’라는 문장이다. 이 부분은 한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다리에서 강으로 몸을 날렸는데, 지나가던 행인 발견하고 구하러 오는 과정에 그녀가 죽기 위해 몸부림치는 장면을 설명한 글이다. 나도 솔직히 왜 내가 이 부분에서 그런 감탄사가 터져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그 문장이 완벽한 모순이자 완전한 문장 같았다. 죽음이라는 단어와 ‘구한다’라는 단어는 정확히 극과 극에 있는 단어인데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문장. 나의 죽음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건데, 그런 구한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인가, 항상 무언가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새로운 접근. 이런 다양한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그 문장을 완전하게 만들어줬다. 자신의 죽음을 구함과 동시 자신의 목숨은 끝나는 이 아리송한 문장에 나는 그저 감탄했다. 이런 문장을 쓸 줄 알아야 책을 쓸 수 있구나 라고 혼자만의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지 않을까 싶다.



- 세상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하여 


     세상은 지금 한심하게 굴러가고 있다. 가깝게는 취업 문제부터 멀리는 국제 경제 문제나 정치 문제까지, 기술의 발전으로 더 살기 편해지는 것이 맞기는 한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 한심한 세상에서 개인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은 점점 좁아진다. 대중 권력의 시대다.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권력이 무너지고 있다고 빙산의 일각만 부숴져 내린 것일 뿐, 해저에 있는 빙산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 저자는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라고. 사회의 지식인들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외친다. 젊은이들이여 투표를 하라. 대자보를 붙여라. 너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결코 바뀔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정반대의 말은 묘한 끌림이 있다.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장난으로 대하자. 연회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해서 자신은 전혀 한국말을 못하는 듯이 장난을 치자. 뱅크시처럼 재미있는 벽화를 그리자. 한심한 세상을 만든 것도 그들인데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한심해질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뭐 세상을 평생 진지하게 보지 않으면 문제가 많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진지하지 않게 무의미하게 대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겠다. 인생은 재미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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