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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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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한 단상
그 어느 누구도 행복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에게 왜 일을 하냐고, 왜 저축하냐고 묻는 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위해서 살고 일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행복의 의미가 묻는 다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본주의의
사회는 돈이 행복의 척도라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나의 자유가 늘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돈을 많이 벌 때까지는 행복을 포기해도 된다는 말들이 나온다. 그러면 결국 돈을 많이 벌어서 풍족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 것 같은데 막상 또 한번 더 깊게 생각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세계인의 행복도를 비교한 연구 결과에서 스리랑카나 부탄 등,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일컬어지는 나라들이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하지만 행복도를 비교한 기준도 역시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직 누가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나 역시 행복을 단순히 명예, 돈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행복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읽었다. 이 책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수용소에서의 하루를 서술해 놓은 책이다. 우리는 흔히 수용소라고 하면 고통과 절망만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괴로워하고 희망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주인공 이반은 수용소 내에서 ‘잘’ 생활한다. 벽돌공의 능력을 잘 살려서 일도 잘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서 운 좋게 밥도 더 얻어 먹는 어떻게 보면 참 쾌활한 삶을 살고 있었다. 더군다나 놀라운 점은 책의 중간중간 주인공이 행복하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운 좋게 난로 옆에 자리를 잡아 발에 온기를 줄 수 있을 때 그는 행복을 느꼈고, 담배를 오래도록 못 피우다가 몰래 하나 피웠을 때, 정신 없이 일을 하다가 결국 일을 완벽하게 끝냈을 때에도 그는 행복하였다고 말하였다. 책의 말미, 하루를 정리하면서도 데니소비치는 ‘오늘은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라고 까지 하였다. 자유도 잃고, 음식도 맛 없고, 추워 죽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말들을 통해서 어쩌면 행복이라는 것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원래 행복이라고 하면 그 행복한 감정이 지속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오늘 점심에 정말 기가 막힌 음식을 먹었을 때에나 운 좋게 수업에 늦지 않았을 때에 잠깐이나마 느끼는 그 감정들이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들은 이런 행동들을 통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나는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통해 행복은 상대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돈이 없는 내가 느꼈던 순간의 행복을 돈이 많은 사람이 똑같이 해도 느낄 수 없듯이, 행복은 서로 비교 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감정이 아닌 것이다. 결국 행복이란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고, 각각이 느끼는 행복도 다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모두가 공감할 만한 행복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여전히 행복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성공하고 돈을 벌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행복의 의미를 물어보고 싶다. 그들이 원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정말 자기가 생각했었던 행복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놓은 행복인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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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대한 단상
이 책의 내용은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여 잠들 때까지의 단 하루만을 다루고 있다. 몇 년, 아니 몇 십 년의 기간을 설정하는 여러 많은 책들과는 다르게 24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는 내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현재만을 생각하며 어떻게 일을 할까. 어떻게 음식을 더 받아낼까를 걱정한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를 보지 못한 자는 결국 뒤쳐지고 쓰러질 것이라고 하며. 하지만 미래를 너무나 강조한 탓에 우리는 현재를 너무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미래에 혹시 모를 일을 위해 현재의 돈을 저금하고, 미래의 풍족한 생활을 위해 20대의 청춘을 희생하고 있다. 우리에게 오늘이란 미래라는 꼭대기층을 위한 하나의 계단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데니소비치는 오늘이 꼭대기 층이고 마지막 층이다. 빵 하나를 먹을 때에도 그 먹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일을 할 때에도 결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루를 그 어느 누구보다 온전히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장기간의 형량이 있는 수용소이긴 했지만 미래라는 것도 현재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닌지라고 생각해본다. 미래를 꿈꾸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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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단상
책의 중간에 영외 노동을 하던 수용자들은 수용소의 기적소리가 들리자 ‘집으로
돌아간다’ 라고 말하였다. 참으로 인상 깊은 문구였다. 그 춥고 끔찍해 보이는 수용소를 집이라고 표현하다니.
집이라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가족과 함께 사는 공간? 그렇다면 내가 나중에 결혼하고 아파트를 사면 어떤 것이 집이 되는 것이지? 내가 아파트를 샀으니까 아파트가 내 집인가? 대학교 근처의 자취방에 사는 학생들은 모두 그네들의 자취방을 집이라고 부를까? 자취방을 산 것도 아니고 월세로 사는 것인데도? 이런 끊임없는 물음과 책에서 나온 집이라는 표현을 같이 생각해보니 결국 마음의 안식처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에게 수용소는 이제 더 이상 고통의 공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항상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다. 그는 그곳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나와 같은 일반인들이라면 수용소는 절대 애정을 가질 수 없는 공간이고 절대로 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그곳에서 관계를 맺고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집이 단순히 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텐트가 되었든, 상자가 되었든, 월세가 되었든, 궁전이 되었든, 결국 집이라는 것은 공간에 대한 나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