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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사상의 무서움에 대하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생각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이 발전하여 이론이 되고, 사상이 되고 사람들의 행동, 의식을 결정하는 사회적 규범이 된다. 그런 이론, 사상이 애초에 인간 중심이 아닌 순간 무서우리만큼 흉악한 무기로 변한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가 그러했고, 책에 나오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그러하다. 사상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실체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교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 정도는 더 심해진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한국의 교육 과정에서도 등장하는 이론이다. 인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그에 반해 식량은 인구의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론이었다. 딱 여기까지만 가르친다. 그럼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이나 해결책은 전혀 제시하지 않고, 단지 이론의 설명뿐인 것이다. 여기까지 정도 배운 사람이 스스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기아와 인구과잉의 문제를 동시에 볼 경우, 인구의 적절한 수 유지를 위해 기아를 묵인하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론이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교육과정에 여전히 쓰일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재 더욱더 심해지고 있는 기아의 문제에 대해 해결할 의지조차 내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안다. 기아의 문제가 선진국들의 탐욕적인 경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국민이 아둔할수록 국가는 더욱더 탐욕을 드러낸다.
국민들이
왈가왈부하지 않는 이상, 국가의 정책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국제기구뿐인데, 지금의 국제기구는 단지 허수아비의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금의 경제 위상을 가진 것에 비해 빈곤국을 도와주는 정도가 너무나 낮다. 국제개발원조에 투여하는 금액은 다른 선진구의 평균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그나마도 보여주기 식의 성과 위주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원조금액을 늘려야 한다고 몇몇의 전문가들이 주장할 때마다, 아직 우리는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지 못했다, 아직 개발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국가는 주장하며 탐욕을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들은 그런 국가의 말이 그럴 듯 하게 들리니 아직도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 사회지도층으로써
이보다 좋은 국민들도 있을까. 자신만의 사상이 없으면 사회의 사상이나 이론에 휩쓸리기 쉽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론이 조금만이라도 형성되는 순간 유난히 동조의 모습을 보이며 과격하게 행동한다. 자신만의 사상이 없으니 사회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열성적으로 동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걱정스러운 부분은 우리나라의 강점인 IT이다. 세계 최상위권의 스마트폰의 보급률이 유지될수록 우리는 점점 아둔해져 간다. 일인당 독서량을 끝을 모르고 떨어지고, 도서정가제는 현실은 반영하지 못하고 좋은 취지만을 살려 강행한 탓에 책에 대한 관심을 더 떨어트리고 있다. 정부가 우리나라의 일인당 도서관수가 개도국보다도 못하는 현실을 알면서도 공공도서관을 적극적으로 늘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진국들이 바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국민들이 바뀌어야 한다.
- 커피 한 잔에 대하여
이
책은 카페에서 다 읽어 내려갔다. 3,000원짜리 카페라떼를 시켜놓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노래가 나오는 쾌적한 공간에서 난민 캠프의 참상과 그곳에서 간호사들이 생명을 선발하여 영양주사를 주고, 선발되지 아니한 난민들은 천천히 죽어가는 내용을 읽었다. 순간 나의 이 행동하지 않는 모습이, 경제 대국의 혜택을 받고 있는 나의 모습이 옳지 않은 것만 같았다. 나의 3,000원으로 몇 백 명의 아기들에게 생명을 연장할 기회를 줄 수 있는데도 나는 먹지 않아도 나의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커피를 마셨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행동인지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보였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에 이것들을 당연히 누려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동안 내가 이 엄청난 불균형을 단지 미디어를 통해 정제된 장면만 봐서 그 진실을 몰랐던 것이었는지. 작가는 책을 통해 우리들의 원조의 손길이나 긴급 구호활동보다는 보다 많은 이들이 진실을 알기를 원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진실만 알았을 뿐 변화하지 않았다. 책을 막 읽었을 때에는 당장이라도 정기후원금을 시작하고 내 여유 자금을 아프리카에 보내야지라고 마음 먹었지만 하지 않았다. 내가 보내봤자 뭐 크게 달라지겠어라는 날 미약한 힘이라고 포장하며 말이다. 그러면서 커피를 마신다. 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내 양심을 마셔 없앤다.
- 개혁자에 대하여
책에서는
빈곤국에서도 개혁의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그 교육이 어렵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개혁자는 반드시 나온다. 책에서 나온 이들은 칠레의 아옌데와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였다. 둘 다 젊은 개혁자들로써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둘 다 모두 죽임을 당하여 개혁이 일어나지 못했다. 저자는 빈곤국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해외의 원조가 아닌 나라의 구조가 개혁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내부에서 진정한 변화를 통해 근본부터 바꾸어야 중심을 잡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개혁자들을 발굴해 내는 방법이나 여건은 말하지 않은 채 단순히 개혁자가 나타나 개혁을 이룰 때까지 이 빈곤을 버텨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아마도 개혁자가 나타나는 원리는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개혁가는 범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더 멀리 본다. 누군가 그런 방법을 알아 낸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시각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개혁가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어려운 시기에 개혁가가 더 많이 나오는 것만은 맞는 것 같다. 어려워질수록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그것이 응축되어 개혁가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갈수록 위험해지고 어려워지는 한국 사회에서도 개혁가가 필요하다. 미봉책을 만들어내는 기성세대적인 사상가들이 아닌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개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