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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부조리. 이 책을 읽고 나서 몇몇의 독후감을 읽어보니 이 책은 부조리에 관한 소설이라는 글이있었다. 부조리. 우리는 이 단어를 비교적 자주 쓴다. 부조리한 사회, 부조리한 세상 등등. 나 역시 이 단어에 익숙했고 글을 쓸 때 몇 번 써 보았지만 사실 그 정확한 뜻은 잘 알지 못했었다.
부조리. 불합리ㆍ불가해ㆍ모순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프랑스의 실존주의자카뮈가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나타내는 데 썼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모두 '부조리의 상태'에 있고, '부조리의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으로서 질투, 야심, 방종 등을 들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무의미ㆍ무목적적인 생활로 운명지워진다. 그의 철학에는 이러한 염세관적 견해가 지배하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인간은 '반항적'인간(l'homme révolté)으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학사전, 2009,중원문화)
아하,그러했던 것이다. 부조리란 단어는 사실 이 책의 저자가 강력하게 썻던 단어였던 것이다.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리고 부조리란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나서야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미약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부조리한 사회는 그렇다면 무엇일까. 불합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사회, 소설 속 주인공인 뫼르소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울지 않았다. 단지 어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자고 싶을 뿐이었다. 나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검사의 심문을 당할 때도 이 점이 부각되어 그의 냉혈한적 모습이 비판받았다. 필자 역시 그를 냉혈한, 못되 먹은 놈이라고 처음에 생각되었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그것이 과연 비판받아야 할 일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일까? 그렇지 않음은 확실하다.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씩은 세상의 순리와는 맞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부조리라 말하고 타파하기를 원한다. 부조리가 없는 사회가 있을까. 그것은 확실하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카뮈는 우리들에게 반항적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항적 인간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라는 것 자체에서 벗어나 ‘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 이 책의 제목은 과연 주인공 뫼르소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방인이다. 라고 주위 사람들이 생각한다. 재판 과정에서 그의 이방인적인 모습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검사와 변호사는 뫼르소를 두고 틀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재판을 위한 일정한 틀. 그 속에서 뫼르소는 완전히 제외되고 완벽한 재판을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뫼르소는 그러한 모든 것에 따분함을 느꼈고, 변호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그의 고집을 부려 결국 광장에서 머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받은 형벌. 하지만 그는 이방인이 아니다. 소설 마지막부분에 나오는 신부를 향한 절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그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하기를 원했다. 종교, 사회, 제도, 이런 것들은 그에게 있어 별로 중요치 않은 것들이고 그 자신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사회를 향한 그의 내적인 투쟁은 사형으로 끝나지만 그는 그것조차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설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는 부분을 통해 자신에게 있어 부조리한 사회에서 벗어남을 기뻐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인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왜 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웃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성립되지 않느냐하면 신만큼 강하지만 최고로 악한 악마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그 악마가 사실은 우리가 웃고 있지 않지만 웃고 있다고 속일 수 있고, 사실 내 몸은 없지만 몸이 있다고 속일 수 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생각만큼은 악마조차 속이는 것이 불가능한데, 일단 생각을 속이기 위해서는 생각자체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존한다. 뫼르소는 실존했다. 그는 이방인이 아닌 실존인이다. 이방인은 도리어 우리 보통의 사람들이 아닐까.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다른 외적인 것들에 휘둘리는 이방인들.
남들의 부조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우리들보다 차라리 자신에게 주어진 부조리조차 신경쓰지 않는 뫼르소가 한편으로는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