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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 호스피스 의사가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깨달은 삶의 의미
레이첼 클라크 지음, 박미경 옮김 / 메이븐 / 2021년 10월
평점 :
P127-오늘날 자행되는 심폐 소생술, 즉 CPR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잔인한 과정이다. 말기 심부전처럼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어 가는 환자들에게 애초에 시행하면 안 되는 처치였다. 건강한 환자들에게도 흉부 압박과 전기 충격은 흔히 실패로 끝난다. 병원 안에서 심정지에 빠진 사람들 다섯 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병원을 나간다. 병원 밖에서 심정지에 빠진 환자들의 소생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서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 남는다. 물론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에게 CPR은 시도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심장이 정지된 시간 동안 산소 부족이 장기화되면 환자는 살아나더라도 영구적으로 뇌 손상을 입게 될 위험이 있다.
P129-풋내기 의학도로서 병동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CPR을 받은 환자들이 실제로 살아서 병원을 나서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 또 의학 드라마가 생존 가능성을 얼마나 터무니없게 과장했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드라마에서 CPR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묘사하여 대중의 인식을 왜곡시키는 이른바 '텔레비전 효과'를 증명한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이런 텔레비전 효과는 비단 일반인뿐 아니라 나 같은 초보 의사들에게도 나타났음이 분명했다.
P144-나이가 많이 들어서 입원한 환자가 완치되어 나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늙고 쇠약해서 서서히 죽음의 길로 접어든다. 의학은 그들을 좀체 구할 수 없다. 그게 당신 잘못은 아니다. 의과 대학에선 언급을 회피하지만, 그게 인간의 본질이자 냉혹한 운명이다.
P166-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생체 검사 결과 기다리다 드디어 오늘 전문의에게 소식을 들었다. 6월에 처음 진단 받았을 때 내 골수에는 미성숙 세포가 1퍼센트밖에 없었다. 이젠 그게 50퍼센트로 늘어났다. 내 몸은 완전히 점령당했다. 화요일 저녁까지만 해도 어디서 눈썹 왁싱을 할지 고민했는데, 금요일이 되자 가까운 장래엔 눈썹 왁싱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의사가 화학 요법 치료와 탈모 증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현실이 그런걸 어쩌랴. 2주 뒤엔 내 몸에 남아 있는 털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골수도 없을 것이다. 화학 요법 치료로 하나씩, 하나씩 나자빠질 테니까.
P240-도로시는 며칠 뒤에 사망했다. 결국 에드워드 선생의 예측은 겨우 48시간 빗나갔지만, 그 시간 동안 그의 환자는 참으로 멋진 삶을 살았다. 시간과 세상의 무게 앞에서 우리 삶이 너무나 짧다는 인간 존재의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당신의 남은 인생에도,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도 아니 어쩌면 특히 마지막 순간에 당신이 찾아야 할 불꽃 같은 아름다움과 의미가 늘 존재한다.
P242-던모어의 마지막 시집에 실린 '내 인생 줄기가 잘렸다'라는 시는 완화 의료의 정수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인생의 덧없음을 고통스럽게 의식하지만, 죽어 가는 동안에도 꽃을 피우겠다는 의지가 잘 드러나있다. 시는 대단히 단순하게 끝을 맺는다.
나는 안다. 내가 죽어 간다는 것을.
하지만 잘린 줄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꽃을 피워 보는 건 어떨까?
P265-한때는 죽음에 자꾹 노출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삶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실상은 정반대였다. 세상을 일찍 하직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볼 때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서서히 늘어지는 살과 하나둘 잡히는 주름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친구가 잃어버린 젊음을 한탄하면 맞장구를 쳐 주긴 했지만 좌절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흰머리와 돋보기 안경을 장수의 선물로 간주했다. 외모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노화는 권리도 아니고 도전도 아니었다. 피해야 할 것도 아니었다. 노화는 특권이었다.
P354-"레이첼, 아버지가 가셨단다" 나는 가슴을 치면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충동을 억누르고 얼른 아래층으로 뛰어가 아버지를 껴안앗다. 여전히 온기가 느껴지는 아버지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생명의 기운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온몸으로 아버지를 붙잡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손깍지를 끼었다. 내 온기를 전해서 단 몇 분이라도 아버지를 곁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
장의사들이 밤의 유령처럼 서리를 맞으며 달려와 엄숙하게 문을 두드렸다. 검정 양복 차림의 남자들은 이승을 막 떠난 분의 신속한 수송을 위해 정중하고 요령있게 움직였다. 엄마가 그들을 배웅한 뒤 문을 닫았다. 차량에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실은 장의차가 출발했다. 아버지의 흔적이라곤 구겨진 시트에 희미하게 눌린 자국뿐이었다. 우리는 머뭇머뭇 각자의 침실로 돌아가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각자의 비통함 속으로 잠겨 들었다.
P366-"남은 날들은 '왜 나지? 도대체 왜 나야?'라고 따지면서 낭비할 수도 있어.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아니 우리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어. 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여전히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나는 그저 묵묵히 내 삶을 살아갈 거야."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여전히 놀라우리만치 감미로운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완치는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고 기뻐하고 함께 지낼 수 있다. 웃고 울고 감탄하고 위로할 수 있다. 더 농축된 상태로 삶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나날과 마찬가지로, 삶의 마지막을 호스피스에서 보내겠다고 선택한 내 환자들을 위해 나는 죽어 감이 살아감과 공존하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